

* Love? Or Love! *
*캐붕이 많습니다.
[Love? Or Love!]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본인이 들었다면 어이없어하겠지만 송태원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탐스러운 꽃잎이 고풍스러운 드레스 자락처럼 풍성해 보였고 붉은색이 강렬하게 빛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과할 정도로 화려한 것이 성현제와 딱 맞았다.
물론 눈앞의 저 장미꽃을 피어났다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겠으나 연인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꺾어다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고 싶어질 만큼 아름다운 꽃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이 던전이 아니고, 그 크기가 작은 빌딩만 하다는 것과 현재 격렬하게 꿈틀거리고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랬을 거란 거다.
거대한 장미꽃 아래 굵은 덩굴이 뻗어 나왔다. 눈앞의 몬스터는 알려지지 않은 미확인 몬스터였다. 사전지식이 없으니 일단 건드리고 물러나는 식으로 정보를 알아낼 수밖에 없다. 송태원은 빠른 속도로 내리치는 덩굴을 뒤쪽으로 굴러 간신히 피해냈다. 그가 서 있었던 딱딱한 땅바닥에 깊은 구덩이가 생겼다.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다네."
노래 부르듯이 즐거운 어조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꽃의 공격 범위 바로 앞에서 팔짱을 낀 채 구경이나 하는 성현제는 소풍 나온 어린아이처럼 한가로워 보였다. 덩굴을 피해 구르느라 여기저기 묻어난 흙먼지를 털어낸 송태원이 무기를 다잡으며 대답했다.
"여유가 넘치시는군요."
"저런, 자네는 벅찬가 보지? 나처럼 뒤로 물러서서 좀 쉬지 그러나."
입술을 보기 좋게 올리며 하는 말은 얼핏 다정하게 들리기도 했다. 언제나처럼 흑적색 코트를 보기 좋게 걸친 그의 주위로, 전기를 둘러 파직거리는 사슬이 결계처럼 떠다닌다. 송태원은 저 아름답지만 흉포한 몬스터가 역시 성현제 꼭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보기만 해도 지친다는 소리였다.
던전 입장 조건만 아니었다면 송태원은 성현제와 단둘이 공략을 해야 하는 상황을 어떻게든 피했을 것이다. 최대 정원 2명, 그것도 A급 이상만 들어올 수 있는 이 특수던전은 발견 즉시 협회에 보고되었다. 난이도가 난이도인지라 안전을 위해 S급 각성자 두 명이 들어가기로 결정되고 그중 한 명이 송태원이 된 것은 필연 적인 일이었다. 문제는 나머지 한 명이 세성 길드장이 되었다는 거다.
"왜 하필.."
저도 모르게 새어나간 진심에 성현제가 눈가를 콕콕 찍어내는 시늉을 했다.
"송실장이 나와 보내는 시간을 이렇게 싫어하다니 상처라네."
송태원의 미간이 깊어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들 다른 던전을 공략 중이거나 해외로 출장을 갔으니 어쩌겠나. 뭐, 우리보다 해연의 도련님이 들어오는 게 더 나았을 뻔했긴 하지만 말이야. 한방에 태워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좀 아쉽군."
전기저항이 있는지 몇 번이나 거대한 벼락을 내리꽂았는데도 장미꽃은 건재했다.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면 바로 굵은 덩굴을 채찍처럼 휘둘러 접근을 막았다. 반대로 그 범위만 지킨다면 먼저 공격해오지는 않으니 그렇게 까다로운 상대는 아니었다. 공격 형태가 단순한 만큼 파고드는 것 역시 가능했지만 수많은 덩굴이 금세 에워싸 갇힐 것이 뻔했다.
"정석대로, 뿌리부터 공격하겠습니다."
"그럼 내가 덩굴을 맡지."
그 한마디로 역할분담을 나눈 그들이 각자의 자리를 잡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은 합을 맞춰 싸운 적이 꽤 많았다. 그 중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는 일 역시 파다했지만 둘 사이에 익숙한 거리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였다.
성현제가 번쩍거리는 사슬을 쏘아냈다. 덩굴들이 반응하며 사슬을 쳐내려 움직인다. 사슬이 움직이는 덩굴을 휘감아 올리는 틈을 타 송태원이 몬스터의 중심부로 달려 나갔다. 몬스터가 마구 날뛰는 동안 꽃의 뿌리는 땅 밖으로 튀어나와있었다. 그가 우람한 뿌리를 끊어 낼 때마다 줄기가 바싹 말라간다. 모든 게 순조롭게 느껴졌을 때였다.
"송태원, 당장 거기서 나와!"
덩굴을 붙드느라 발이 묶인 성현제의 외침에 송태원이 고개를 든다. 죽어가는 줄 알았던 몬스터가 장미꽃처럼 생긴 머리를 그에게 향한 채 꽃잎을 한껏 펼치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성현제는 덩굴을 포기하고 사슬의 방향을 틀었지만 노란 꽃가루가 송태원과 그 주위를 덮치는 것이 그보다 더 빨랐다. 어마어마한 양의 꽃가루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지독한 꽃향기가 성현제에게도 느껴졌다. 마치 송태원을 묻어버리려는 것처럼 모든 걸 토해낸 몬스터는 마지막 기력마저 뱉어내고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말라비틀어진 꽃잎이 비처럼 떨어진다.
꽃가루와 떨어지는 꽃잎으로 아직 시야가 불분명했지만 성현제는 송태원에게 달려 나갔다. 극단적으로 치닫는 사고를 스스로도 막을 수 없었다. 겨우 확보한 시야 속에 비친 것은, 놀랍게도 멀쩡한 모습으로 서있는 송태원이었다. 성현제는 내심 안도하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다친 곳은 없는건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성현제의 물음에 본인도 얼떨떨하게 대답하던 송태원이 노란 가루를 털어내며 성현제를 바라보았을 때 였다.
"허억."
그가 별안간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성현제가 단숨에 거릴 좁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독인가? 아니면 마비? 아무튼 당장 여기서 나가야겠군."
"그런, 큭. 그런 게 아닙니다."
"억지 부리지 말게. 자네가 참는 데 이골이 나있단 건 잘 알지만 이런 것까지 참을 필요는 없어."
"...니까....십시오..."
억눌린 음성에 성현제가 눈썹을 찌푸렸다. 송태원이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대답을 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뭉개져 잘 들리지 않았다. 그가 몇 번이나 되물어도 눈을 질끈 감은 채 웅얼거리던 송태원이 집요한 성현제의 손길을 확 뿌리치며 소리쳤다.
"두근거려서 숨을 못 쉬겠으니까 다가오지 마십시오!"
"...뭐?"
단언하건데 성현제가 그런 멍청한 대답과 표정을 지어본 것은 그의 인생에서 그 때가 처음이었다.
.
.
.
"저주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송태원은 단호하고 절박해보였다. 지켜보는 한유진이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실장님, 이건 저주계열은 아니고 상태이상에 가까운 느낌인데요."
"저주입니다."
"네, 그 심정 충분히 이해는 해요."
"다들 너무하는군. 내가 뭐 잡아먹기라도 하나? 오히려 잡아먹힐 걱정을 해야 하는 건 나 같은데."
송태원과 떨어져있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성현제가 눈썹을 한없이 떨어트린 채로 울상을 지었다. 저도 모르게 돌아가려는 송태원의 고개를 한유진이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보시면 안돼요. 해로운 얼굴을 하고 있어요."
던전에 들어간 장본인 둘을 제외하고 각관실 실장이 인생 최대의 위기에 빠진 것을 아는 사람은 난데없는 파트너의 요청으로 (시스템과 관련된 일인지 묻기 위해서였으나 한유진은 단순한 몬스터 부산물의 효과 같다고 남몰래 대답했다.) 오게 된 한유진과 길드장에게 볼 일이 있어 셋이 모여 있던 회의실에 들이닥친 강소영 정도였다.
"그럼 그 꽃가루가 사랑의 묘약이라도 되는 거예요?"
시야가 막힌 송태원이 은근 불만스러워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강소영은 소파 뒤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더니 그렇게 물었다. 밝은 금발이 꼬리처럼 흔들린다. 한유진이 여전히 송태원의 시야를 막으면서 대답했다.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죠. 소영씨도 이런 거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네! 엄청 비싸게 팔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길드사업을 하나 늘리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에블린언니한테 말해볼까요, 길드장님?"
마지막 말은 성현제를 보며 한 소리였다. 그쪽 관심이었냐고요. 소리 없이 절규하는 한유진을 뒤로하고 성현제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무리라네. 남은 꽃가루를 가져와서 감정해봤지만 그냥 평범한 꽃가루였어. 본체에서 채취한 직후에만 효력이 있는 것 같네. 무엇보다 우리가 나온 다음 게이트가 막혀버려서 들어갈 수도 없게 됐더군."
"아깝네요."
"그러게나 말일세."
"저기요? 여기 그 꽃가루로 인한 피해자가 바로 눈앞에 있거든요. 사업논의는 그만하시죠. 앗."
한유진이 한눈을 판 틈을 타 송태원은 또 다시 홀린 듯이 성현제를 쳐다보고 있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그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건 애정에 가까운 집착이 담긴 눈동자였다.
"실장님? 저기요, 실장님?"
뒤늦게 손짓을 해보았지만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성현제만 보이는 모양이다. 그의 시선을 눈치 챈 성현제가 샴페인색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아, 불길한 표정. 한유진의 예상은 정확했다. 시선을 송태원에게 고정한 채 누가 봐도 일부러 야살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성현제는 재수 없을지언정 아름다웠다. 특히나 상태이상으로 고뇌하는 누군가에게는 가히 파괴적일 정도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송태원의 머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책상에 처박혔다.
"그렇게 웃지 마십시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책상에 짓눌려 새어나왔다. 성현제는 진심으로 유쾌해졌다.
"살다보니 송실장이 나한테 홀리는 날도 다 오는군."
"그만 놀려대요. 아무튼 처음 보는 종류의 몬스터라 확실하지 않지만 영구적인 건 아닐 거 아니에요. 지속기간 안 나와요?"
"...안나옵니다. 애초에 설명도 불친절하게 한 줄만 적혀있...어....서."
송태원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성현제가 송태원의 두 뺨을 감싸 안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색소가 옅은 머리카락을 말끔하게 올려 드러난 하얀 이마가 시야에 잡혔다. 그 아래, 겨우 손가락하나 정도의 사이를 두고 보이는 샴페인색 눈동자가 세밀하게 컷팅된 보석보다도 더 반짝였다. 달빛을 조각내어 눈동자 속에 담아낸다 해도 이보다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성현제이기에, 성현제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파괴력만이 송태원을 뒤흔들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좋은가, 송실장?"
성현제가 낮은 미성의 목소리로 묻는다. 그는 대답해야했다. 아니라고, 이것은 다 몬스터 부산물의 효과일 뿐이니 당장 얼굴치우라고. 모든 게 허상이었다. 거짓이다. 가짜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 당장 튀어나갈 것 같은 심장은 분명히 송태원의 것이었다. 귀 끝까지 새빨개진 송태원이 성현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성현제는 실컷 놀려먹었으니 한대정도는 맞아줄 각오를 했다.
"원하는 대로 하게."
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가오는 것은 주먹이 아니라 말랑한 입술이었다. 금빛 눈동자가 놀라 동그랗게 변하는 걸 송태원은 기껍게 바라보았다. 연한 살덩이가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섞여 들어간다. 성현제에게도 한없이 여린 속살이 존재했다. 그것이 그를 이토록 흥분하게 만든다는 것을 송태원은 미처 알지 못했다. 안쪽의 무른 살을 짓씹자 성현제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막혀버린 신음소리를 내며 어느새 그도 송태원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숨 쉴 틈도 없이 집어삼킬 것처럼 성현제의 입안을 물고 빨던 송태원은 혀 밑에 고인 타액까지 말끔하게 훑어버리고서야 그를 놔주었다. 정확히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만 성현제도 그가 손을 놓자마자 바닥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정장이 구겨져있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아니 변명은 그만하겠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뭐?"
연이어 이어진 사죄의 말에 성현제는 생애 두 번째로 멍청한 얼굴을 했다.
"젠장, 미칠 것 같으니까 그런 눈으로 절 보지 마십시오!"
"이번엔 아무 짓도 안했네만."
송태원은 성현제의 대답을 듣자마자 냉막한 표정으로 얼굴을 한차례 쓸어내고 일어섰다.
"사죄는 다음에 꼭 하겠습니다.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송태원은 그대로 주저앉은 성현제의 어깨를 잡아들어 올려 책상에 앉혀놓더니 착실하게도 남은 둘에게 인사까지 꾸벅 올리고 나가버렸다. 아직까지도 얼이 빠져있는 성현제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척 볼 건 다 본 강소영과 한유진만이 정적 속에 남았다. 한계까지 붉어진 얼굴을 돌린 한유진이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침묵을 깼다.
"거, 뭐냐. 파트너씨의 자업자득이라고 말하지는 않을게요. 옆에 있는 저희를 신경써주셨다면 정말, 정말, 정말 좋았겠지만?"
소파 뒤에 숨은 척 했던 강소영이 말을 이었다.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씀하신 건 길드장님이지만요."
"하아, 그것 참 배려심 가득 한 말들이군."
성현제는 잠시 혼자 내버려달라고 말할까 하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당장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고작 S급의 체면에 맞지 않게도, 풀려버린 다리로 일어서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거다.
한편 송태원은 극심한 공황상태에 빠졌다. 당장 이 저주를 풀어야했다. 미확인몬스터가 다 뭐란 말인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끔찍하기만 했다. 건물을 나와 차가운 벽에 이마를 대고 열을 식히는데 자꾸만 눈앞을 아른거리는 성현제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말랑한 혀와, 그걸 짓씹자 터져 나오던 야릇한 신음이.. 그만, 그만 생각해야 했다. 조금 전 상황을 곱씹자마자 송태원은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상태이상을 해결하는 아이템은 왜 안 듣는 거고 성현제는 왜 거기서 얼굴을 들이밀지? 그렇게도 저를 놀리고 싶은가. 성현제가 자신을 심심풀이 땅콩처럼 생각하는 거야 늘 있었던 일인데 그것이 이토록 가슴이 아팠다. 송태원은 아무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주위를 살폈다. 한차례 숨을 몰아쉰 그는 신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인 상태창을 보면서 송태원은 절망했다. 그는 설명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차마 곧이곧대로 이것을 알려 줄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상태창이 가리키는 것은 명확했으나 송태원은 애꿎은 벽만 붙잡은 채 그것을 외면했다. 그렇잖은가. 자신이 사랑을, 그것도 세성 길드장에게? 꽃가루의 웃기는 효과만큼이나 지독한 농담이다. 애초에 응원이랍시고 자신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을 줄줄 하게 만든 것부터가 이것이 저주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주었다. 아주 조금, 정말 스쳐가듯 한 생각일 뿐이었다. 그게 이렇게 구체화되어 강제로 떠들게 될 줄 누가 아냔 말이다. 해서 송태원은 마음먹었다. 최대한 성현제를 피해야했다.
성현제를 피하기로 결심한지 한 달째, 송태원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결심을 이행할 수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비를 걸어오던 성현제의 발길이 뚝 끊긴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공무 중에 마주칠 때도 먼저 시선을 돌리는 것은 성현제였다. 당장에 쳐들어와 그 사죄란 걸 들어보도록 하지, 라며 그를 닦달할 줄 알았는데 그것에 대해 일언반구도 꺼내오지 않는다. 여전히 그를 보면 미친 듯이 두근대는 심장 때문에 숨이 가빠오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니 제법 살 만 했다.
"송실장님, 여기 처리하실 서류가, 헙."
"예, 이리 주시죠."
서류를 건넨 직원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한참이나 송태원의 눈치를 봤다. 송태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제야 조심스레 입을 연다.
"저, 실장님? 요즘 일이 너무 많으셨죠.. 연차라도 쓰시는 게 어떠세요..?"
직원의 말에 그는 어리둥절했다. 물론 일이야 언제나 넘쳐나지만 그건 딱히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요즘에는 세성 길드장도 조용하여 업무는 줄었으면 줄었지 늘어나지는 않았다.
"특별히 업무가 많아지진 않았습니다만."
"그게 실장님 얼굴이...음."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직원이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 송태원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1년은 연속으로 철야를 해야 나올까 말까한 피곤함이 그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송태원은 깊은 한숨과 함께 괜찮다는 말로 직원을 다독이고 돌려보냈다. 그는 요즘 정말 살만 했다. 일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성현제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일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잠을 잘 때도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미칠 지경이라는 거다. 어쩌다 공무 중에 스치듯 성현제를 보게 되면 닿고 싶고 끌어 안고 싶고 온갖 좋은 말을 속삭여주고 싶었다. 그걸 참아내는 건 고문이 따로 없었다. 무엇보다 매일같이 찾아와 치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외하는 그가 신경 쓰여 죽을 것 같았다.
세성 길드장은 왜 송태원을 괴롭히지 않는가. 저주 때문에 먼저 들이대게 되니 관심이 식은 건가. 송태원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조금, 아니 꽤나 화가 났고 화를 내는 자신에게 다시 화가 났다. 세성 길드장이 건드리지 않으면 편안해해야지 왜 그에 대해 이토록 짜증을 낸단 말인가. 역시 이건 만나도 만나지 않아도 그를 괴롭게 하는 성현제가 문제다. 마음대로 결론을 내버린 송태원은 애초에 모든 원흉이었던 몬스터를 머릿속에서 몇 십번이나 도륙 내는 상상을 했다. 물론 두 손은 얌전히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으므로 겉으로만 보기에 그는 여전히 성실한 S급 공무원이다.
그를 지나가던 한 직원이 문득 옆자리의 서류뭉치들을 보고 말했다.
"이 자료는 뭐야?"
"아, 그거 세성길드 측 자룐데 내일 돌려줄 거예요."
직원들에게서 세성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오자마자 송태원의 입이 멋대로 열렸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를 피하겠다는 다짐은 이미 저 멀리 우주 속 먼지가 되어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음날, 결국 그는 세성길드의 건물 앞에 섰다. 길드장이란 사람이 항상 길드 내에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안에 계시는데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현제는 그 곳에 있었다. 송태원은 세성 길드원의 말에 바보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는 걸 느꼈다. 길드원의 안내에 따라 올라가면서도 송태원은 몇 번이나 이 미친 짓을 자초한 자신을 책망했다. 벌써부터 얼굴에 열이 올라 괴로운데 만나서 뭘 어쩌겠다고.
성현제는 넓은 길드장실에 홀로 앉아있었다. 업무 중이었는지 한 손에 펜과 서류를 들고 있었다. 안내를 마친 길드원이 돌아가고 둘 만 남을 때 까지도 성현제는 그에게 아무런 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내쫒는 것도 아니다. 송태원은 여전히 시선을 서류에 고정한 채 말이 없는 성현제에게 울컥했으나 그로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수억 분 같은 몇 분이 흘러가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이후로 제대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세성길드에 발을 들일 때까지만 해도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연한 금빛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장 그의 머릿속에는 눈앞의 남자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망할 상태이상. 송태원이 제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동안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성현제였다.
"멋대로 찾아와놓고 그렇게 보고만 있을 건가?"
한숨과 함께 성현제는 들고 있던 서류를 탁 내려놓았다.
"지금 자네 얼굴이 얼마나 붉은지 아나? 호흡도 흐트러졌군. 자네랑 단 둘이 있기에는 아직 위험한 상태인거 같은데. 사죄라면 저주가 풀린 후에 해도 되네만."
다시금 고개를 돌린 얼굴에서 언뜻 서늘한 눈빛이 보였다. 성현제는 정말로 송태원에게 관심이 식어버린 것 같았다. 귀찮은 파리를 대하는 듯한 그의 태도가 송태원의 안쪽을 쿡 건드렸다.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풍선이 펑 하고 터져나가듯이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흘러내린다.
"송실장?"
당황한 성현제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송태원은 흘러내리는 것이 자신의 눈물임을 깨달았다. 황급하게 닦아보았지만 이미 내보인 눈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곧은 선처럼 무감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차피 이럴 거라면 왜 그렇게 자신에게 관심을 쏟았는지 서러움이 그치질 않았다. 모든 것이 원망의 대상이다. 저주도, 당신도. 그 중에 가장 원망스러운 것을 꼽으라면 역시 송태원 자신이었다.
"왜 눈을 마주쳐주지 않습니까?"
긁어내는 듯한 소리로 송태원은 말했다. 꼴사납기 짝이 없었지만 멋대로 열려버린 입은 한번 토해낸 서러움을 주워 담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차곡차곡 적립해온 불안함을 죄다 끄집어낸다.
"그렇게나 먼저 치댈 땐 언제고 내가 먼저 다가가게 되니 싫증났습니까? 나는 역시 당신의 심심풀이 장난감일 뿐인가요."
송태원의 잔뜩 가라앉은 말투에 성현제는 할 말을 잃었다. 왜 눈을 마주쳐주지 않냐니 자기가 먼저 피하려고 한 걸 모른다고 생각하나? 애초에 이 건에 대해서는 성현제도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 우선 그와 달리 성현제는 자신이 송태원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것을 이미 인정한 상태였다. 다만 송태원이라는 남자가 자신에게 호감을 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단 1밀리그램조차도 고려하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 그는 자신을 대상으로 한 타인의 감정을 기민하게 알아차렸지만 송태원의 경우는 달랐다.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작은 감정까지 살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송태원이 자신을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헤아려보면서도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다. 주고 싶은 것을 주고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거절당하는 것은 익숙하니, 송태원을 휘두를 수 있는 자신에게 만족할 따름이다. 그렇기에 성현제의 사랑은 잡음 없이 늘 깔끔하고 분명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어떻게 그런게 사랑일 수 있느냐 묻겠지만 그는 괜찮았다. 송태원이 묘한 상태이상에 걸리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평소 같지 않은 송태원을 놀려먹을 수 있어 흥미로웠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과, 손짓, 자신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태도에 그는 흔들리고 말았다. 늘 한발 물러서서 자신의 감정을 지켜볼 수 있었던 그에게 욕심이 생겨버렸다. 조급해지고, 서툴어지고, 애원하고 싶어진다. 그 모든 것이 단순한 상태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건 생각보다 더 비참한 일이었다. 더 이상 괜찮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피했더니 왜 피하냐고. 이것도 저것도 죄다 몬스터 부산물의 효과인 주제에.
"사라질 호감에 잔뜩 기대고 나면 나한테 뭐가 남지?"
결국 성현제는 신경질적으로 내뱉고 말았다.
"가짜로 만들어진 호감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런 것은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네. 비참해질 뿐이잖나."
성현제는 자조하며 한 손을 이마에 댔다. 눈물로 취조하다니 비겁한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성현제는 꺼내버린 말을 끝맺었다.
"차라리 거절당하고 왜곡될지언정 자네의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기를 원하네."
송태원은 어쩐지 그 때 맛본 여린살을 떠올렸다. 무르고 부드러운 붉은 속살을. 성현제가 말하는 모든 단어의 의미를 하나하나 곱씹어놓고 도출된 결론을 또 다시 외면하며 그는 물었다.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건 꼭 고백 같지 않습니까."
"마음대로 생각해."
"원하는 대로 하라더니 이젠 마음대로 생각하라 이겁니까."
"자네는 대체 뭐가 불만이야?"
송태원은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변하고 싶지도 않았다. 인정하고 나서 다가올 것이 두려웠기에 그는 걸음을 뗄 줄 모르는 갓난아기처럼 제자리에만 서있었다. 우리가 서로의 가장 여린 부분을 내보이면 어떡하나. 당신도 나도 짐승의 이빨을 가진 괴물이거늘. 사랑하기 위해 벌린 입술로 서로를 도려내고 짓이기게 된다면 그런 비극도 없을 텐데. 그럼에도 당신과의 내일이 궁금해지면 나는 어떡해야하지?
"가짜가 아니면 어떻게 됩니까?"
새빨간 장미꽃다발과 당신의 눈동자를 닮은 보석, 흩날리는 벚꽃 잎이나 오후에 내리쬐는 노오란 햇살 한 줌처럼, 보드랍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당신 품에 안겨주고 싶다고 하면 당신은 비웃을까. 송태원은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속 안에 있는 것을 그 성현제에게 온전하게 전할 수 있는지 송태원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성현제는 그의 두서없는 말 속에 담긴 진실을 본다. 감히 거짓말을 했다 이거지. 괘씸함도 잠시, 성현제는 언제나처럼 관대하게 대답한다. 오로지 송태원을 위한 관대함이었다.
"가짜가 아니라면, 자네는 나를 얻고 나는 자네를 얻겠지. 고작 그것뿐이야."
이렇게나 흔들리고 길을 헤매며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 그것뿐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가 원하는 것 역시 고작 그것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이 충동이 상태이상의 효과인지 자신의 마음인지 헷갈리고 싶지 않았다. 송태원이 한 발자국 다가오자 성현제가 그의 넥타이를 잡아챘다.
"이번에도 도망치는 것은 용서하지 않겠네. 그래도 괜찮겠나?"
송태원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그의 입술을 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너무 멀리 돌아와 버렸지만 이제, 저주와 안녕을 고할 시간이다. 희미한 알림음이 울렸다. 조건은 달성되었으니 상태이상 역시 해제되었을 터다. 그러나 눈앞의 지고한 남자는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송태원은 더 이상 이 마음이 어디서 온 것인지 신경 쓰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지치는 몬스터보다 훨씬 안전하며 당신과 어울릴 장미꽃다발을 들고, 어느 날의 퇴근길을 달리는 송태원의 모습은 조금 훗날의 이야기.

* 장미 *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햇살이 부서져 내려앉은 붉음, 그 사이로 보이는 주황에 가까운 장미. 연한 색 포장지를 덧대어 풍성하나 거추장스럽지 않은 장식이었다. 생일에 어울리는 꽃다발을 안은 성현제는 마냥 웃었다. 당신의 생일이라 전해주고 싶었다며 얼떨떨하게 말을 뱉던 송태원의 얼굴이 어찌나 우습던지. 스스로 뱉어놓고 놀란 듯 몸을 굳히던 사내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평소처럼 검은색 정장을 입은 채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자니 퍽 새로웠던 거 같기도 했다.
본인이 와놓고 그리 당황하면 쓰나, 송 실장.
송태원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가까스로 눈을 마주했다. 성현제는 오늘의 주인공답게 찬란히 빛을 발하는 외모였다. 옅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몇 가닥만 이마 위에 흘러내렸고 둥근 이마를 타고 내려가면 짙으나 단정한 눈썹이 호를 그리고 있었다. 쌍꺼풀 아래 눈매는 반달처럼 둥글었다. 금안은 벼락을 담은 양 빛났다. 곧고 오뚝한 콧대에 농홍한 입술. 잡티 없이 새하얀 피부와 유려하게 뻗은 턱선은 조각 같았다. 어떤 사람이 꽃을 두고 혼자 빛날 수 있단 말인가. 몸을 감싼 쓰리피스 새하얀 슈트 또한 정말로 그만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찰나였지만 시야에 비치는 모든 광경을, 그의 모습을 주도면밀히 눈 안에 담았다. 흰 손끝이 아무렇지도 않게 장미 줄기를 집는 걸 보고 멈칫했으나, 가시는 S급을 상처 입히지 못한다는 걸 떠올렸다. 그래, 이 찬란한 괴물은 결코 상처 입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실을 자각하려 애쓰며 젖은 혀끝을 굴렸다. 최대한 담담한 음성을 내려 애썼다.
성현제 씨. 생신 축하드립니다.
나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S급의 청력으로 들었을 텐데도 시선은 한참 장미에 머물다가 자신을 향했다. 뜻밖의 말을 들은 것처럼 휘어진 눈매는 웃고 있었다. 숙였던 상체를 바로 세우며 성현제는 고개를 기울였다.
송 실장이 내 생일을 축하해줄 줄은 몰랐는데.
이번에는 만년필 세트였던가? 각성자 관리실에서 보낸 선물이. 흥얼이듯 가벼운 어조로 말을 잇는 성현제를 보며 주먹을 쥐었다가 펴는 걸 반복했다. 자신도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 성현제는 본인의 생일 파티를 나가기 전이었고, 무작정 찾아온 건 제 쪽이었으니까. 하지만 뭐라 더 말할 수 있겠는가. 문득 길을 가다 당신을 닮은 꽃이 있었고, 그 잔상이 스쳐 가 사게 되었다고. 차마 담지도 못할 문장을 씹어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이미 따로 선물은 주지 않았었나?
장미를 품에 안으며 그는 물었다. 갸름하고 흰 손가락이 장미를 헤집는다. 감각이 연결된 것처럼 제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걸 아는 눈을 했으면서도 웃는 얼굴은 천진했다.
그건 명분 삼아 드린 겁니다.
그럼 이건 자네의 사심인가?
고른 치열이 드러나며 곱게 웃는다. 저건 명백히 의도된 미소였다. 질식하듯 권태에 짓눌러진 금안이 빛나는 걸 마주했다. 호기심에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동시에 송태원은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고 판단했다. 꽃을 보고 당신 생각이 났다니. 소설에 나올법한 대사를 저 스스로 떠올렸다는 것도 놀랄 지경이다. 허나 알고 있었다. 굴레 같은 삶에서 누군가 박혀 나오지 않고 있다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란 걸. 송태원은 높다란 벽이 무너져 내림을 실감한다. 또한 호기심 어린 눈빛 속에 애정을 느끼며 휘어진 눈매가 사랑스럽다 여긴다. 심장이 차갑게 굳어 느리게 고동친다. 눈을 깜박이는 일련의 행위도 아주 천천히, 시간 속에 갇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알고 있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걸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손바닥이 질릴 만치로 주먹을 쥐어 등 뒤로 차렷 자세를 했다. 이 어리석을 만큼 우직한 남자는 한 마디의 진심에도 많은 정성을 쏟아야 하는군. 그 과정을 본 성현제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하면, 어쩌실 겁니까. 성현제 씨.
여전히 딱딱히 굳은 얼굴이었다.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는 남자는 다 이런 표정을 짓던가. 성현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보면 내가 강제로 받아낸 줄 알겠어. 타박하는 어투로 말했으나 달래듯 상냥한 음성이었다. 어쩐지 순수하게 들뜬 거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즐거운 기색 같았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송태원은 이 순간이 몹시 낯설면서도 놓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점유하고 싶었다. 찰나를 유예하고픈 욕망이 자꾸 속을 헤집고, 기이한 본능이 부추기는 걸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자신을 억제하던 이성을 놓는 순간, 양을 가장한 늑대가 아니라 진실로 늑대가 돼버릴 테니까. 차라리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지독할 만큼 장미가 어울리는 남자에게 굳이 장미를 안겨주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을까. 후회를 반복하게 되는 까닭이 결국 그였는데도 불구하고.
주황 장미의 꽃말을 아십니까.
휘어진 눈매가 가늘게 뜨인다. 천진한 얼굴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진하게 지워진다. 마치 원하는 답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성현제 씨, 저는 그 장미를 빌미로 생신을 축하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에게 어울리는 장미를 선물하기에 최적의 날이었다. 새까만 눈이 줄곧 그를 향했고, 때마침 멀리서 시작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들렸다.

* 제안 *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그날 아침, 아파트 화단 앞에서 송태원은 그런 생각을 했었다. 바쁜 출근길에서 멍하니 화단을 바라본 이유는 그 장미가 성현제와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직 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 연둣빛 봉오리들 사이에서 홀로 빨갛게 꽃을 틔운 그 장미는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고고하게 홀로 피어있는 장미가 주변의 정경에 이질적이면서도 색깔부터 모양까지 탐스러웠다. 성현제를 볼 때면 떠오르는 감상을 고대로 빼다 박은 화려한 녀석에 시야를 빼앗긴 송태원은 손아귀에 느껴지는 핸드폰 진동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곧 지하철이 도착한다는 승차 알림이었다. 송태원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스킬로 무게는 줄일 수 있어도 체격은 줄일 수 없었기에, 송태원은 최대한 지하철 구석에 자리 잡고 섰다. 출근 시간대 지하철은 빡빡하게 사람들로 들어차 있었다. 송태원은 팔꿈치가 사람들 정수리를 찍지 않도록 손잡이를 잡은 팔에 힘을 줬다. 주변을 둘러싸고 선 시민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을 느꼈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송태원도 굳이 아는 체 하지 않았다. 지이잉. 순간 자켓 안쪽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사람들 사이에 끼어 도무지 핸드폰을 꺼낼 수가 없었다. 송태원은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핸드폰을 꺼냈다. 기다리던 연락은 아니었다. 송태원은 도로 안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괜한 기대에 기운이 조금 빠지는 듯했다.
그러나 송태원이 아쉬워할 새도 없이 정신없는 오전이었다. 출근과 동시에 헌터 협회에 불려 갔다 오자 오전 회의가 이어졌다. 각성 센터에 대한 자료가 오가며 회의가 끝날 무렵 송태원은 또다시 보고서 더미를 떠안아야 했다. 송태원의 검토를 거친 서류는 헌터 협회로, 행정안전부 차관에게로 올라갔다가 다시 송태원 손에 돌아왔다. 송태원을 비롯한 각관실 직원들이 한숨을 돌릴 만 해졌을 땐 점심시간이 다 돼서였다.
“실장님. 점심 안 드세요? 저희 요 밑에 새로 생긴 샤브샤브 집 갈 건데.”
“먼저 드시고 오세요. 저는 남은 거 정리하고 따로 먹겠습니다.”
대답과 달리 송태원은 점심 따위 먹을 생각도, 여유도 없어 보였다. 실장실 문밖에서 고개만 내민 직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알겠다 대답하곤 사라졌다. 인기척이 옅어지자 송태원은 다른 서류 판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직원들이 실장실로 몰려들었다. 송태원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샤브샤브 집에 앉아 앞치마를 두른 상태였다. 국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가게 내부를 둘러보는 직원들을 앞에 두고 송태원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만질만질한 천의 감촉만 느껴졌다. 정신없이 끌려 나오던 탓에 핸드폰을 두고 나온 것 같았다. 이래서야 또 연락을 못 하게 생겼다.
“저 잠시...”
“고기부터 넣을까요?”
“완자도 넣어주세요.”
“저는 팽이버섯.”
사무실에 다녀오려던 송태원은 결국 자리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붉은 소고기가 국물에 들어가자 선홍빛을 내며 익어갔다. 송태원은 하는 수 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실장님 더 드세요, 하는 직원들의 재촉에 입안에 꾸역꾸역 고기와 채소를 넣으면서도 송태원의 젓가락은 움직임이 굼떴다.
“여기 괜찮은 거 같아요. 다음에도 가요.”
“사장님이 실장님 알아보고 서비스도 줬고. 소고기 서비스면 또 와보는 것도...”
“근데 그거 3만 원 넘었어요?”
송태원의 뒤로 직원들의 말소리가 따라붙었다. 두고 나온 핸드폰이 마음에 걸린 송태원은 다른 직원들보다 서너 걸음은 앞서 걷고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던 송태원은 어느 가게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유리창에 로즈데이 기념 할인이라고 붙은 꽃집에서는 장미 향이 강하게 풍겨왔다. 아침에 아파트 화단에서 봤던 장미의 잔상이 송태원의 발을 붙들었다. 그런 송태원의 곁으로 직원들이 다가왔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향이었다.
“향 너무 좋다. 오늘 로즈데이인가 봐요.”
“그런 것 같습니다.”
송태원의 대답에 그의 등 뒤에 있던 어느 직원이 의아한 듯 말했다.
“어? 근데 오늘은 안 오지 않았어요?”
“뭐가?”
“세성 길드장님 꽃바구니요. 이런 날 놓칠 리가 없는 분인데.”
“모르지. 사무실 가면 있을지도? 그 양반이 이런 날 안 보낼 리가.”
“실장님, 오늘도 받으시는 거 아녜요?”
“아닙니다.”
송태원은 직원의 농담에 단호히 대답하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그동안 성현제의 행적을 봤을 때 꽃바구니를 보내고도 남을 터였다. 한 때 성현제의 꽃다발 세례가 피곤할 정도로 지겹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일 년 전부터 성현제와의 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보통 때라면 송태원의 손가락이 기대감으로 간질거렸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송태원은 조금 조급했다.
사무실에 돌아온 송태원은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핸드폰부터 들었다. 성현제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전화를 걸까 고민하던 송태원은 투박한 손가락으로 자그마한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어제저녁 일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었다. 전화를 거절 당하는 것보다는 문자를 남기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좋은 점심입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보고 싶습니다.] 한 문장도 진심이 담기지 않은 것이 없었다. 송태원은 문자를 전송하고 망설이다 한 문장을 더 써 내려갔다. [오늘 찾아뵙겠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계획은 어그러지기 마련이었다. 송태원이 오전 중에 처리한 일인데도 오만가지 트집이 여기저기서 잡혀 왔다. 업무는 또 늘어났고 송태원은 저녁도 굶어가며 일에 매달려야 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게다가 꽃바구니는커녕 성현제의 답신도 없었다. 성현제는 화가 나도 연락을 무시하기보다는 받아서 신경을 긁는 쪽이 다반사였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다시 연락을 시도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역시나 어제 일이 문제인 듯싶었다. 꽃잎 한 장도 각관실로 들어오는 게 없자 웬일이시래요, 하는 직원들의 말도 거슬렸다. 송태원이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을 즈음엔 밤 9시 반을 막 넘긴 무렵이었다.
어제도 야근으로 성현제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사실상 송태원 쪽에서 성현제를 퇴짜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일 중으로 성현제가 던전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으니 성현제를 만나려면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송태원의 연인은 종일 연락을 받지 않았다. 내일 처리해도 될 일은 전부 내려놓은 채 송태원은 사무실을 나섰다.
급히 건물 아래로 내려간 송태원은 막 가게 문을 잠그는 꽃집 주인과 맞닥뜨렸다. 꽃집 주인은 송태원을 알아보곤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송태원은 실례지만, 하고 운을 떼었다. 그리고 몇 분 뒤 꽃집 주인과 함께 가게를 나선 송태원은 그에게 거듭 감사하다고 말했다.
“근데 정말 괜찮으세요? 오늘 장미가 많이 나가서 딱 그 한 송이밖에 안 남아서 어떡해요.”
“괜찮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맞다. 오늘은 꽃바구니 받으셨어요?”
꽃집 주인의 물음에 송태원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바라보자, 주인은 말을 덧붙였다.
“아, 성현제 씨요. 오늘 로즈데이인데, 어제 주문하러 안 오셨거든요. 이번에는 다른 데서 하셨나 해서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성현제 씨가 여길 오십니까?”
“어? 모르셨어요? 성현제 씨가 가게 단골이신데. 매번 오셔서 꽃도 직접 고르시고.”
송태원이 의뭉스럽다는 시선을 보내자 꽃집 주인은 황급히 변명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아, 그, 카드를 봤어요. 가끔 가게에서 바로 쓰기도 하셨거든요. 매번 송 실장님한테 쓰시길래 그만...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아닙니다. 저, 그런데 혹시 성현제 씨가 직접 오기 시작했던 게 언제부터인지 기억하십니까.”
“한 일 년쯤 됐을까요? 요맘때쯤인 거 같기도 하네요. 로즈데이라고 장미로만 한 바구니 만드셨던 게 기억나요.”
“그렇군요. 퇴근하시는 길에 붙잡아서 죄송했습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꽃집 주인과 반대 방향으로 갈라져 뚜벅뚜벅 걷던 송태원은 가던 길을 멈추어 섰다. 꽃집 주인의 말에 의하면 성현제와 송태원의 관계가 변할 즈음부터 세성에서 보내왔다는 꽃바구니는 죄다 성현제의 손을 거친 거였다. 그 성현제가 송태원을 위해 꽃을 하나하나 골랐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송태원은 제 손에 쥐어진 장미 한 송이를 빤히 바라봤다. 아침에 봤던 그를 빼닮은 화려한 장미가 겹쳐 보였다.
송태원은 잠시간 입술을 꾹 다물고 밤거리를 바라봤다. 차를 세워두고 그 앞에 기대선 어떤 남자가 핸드폰을 보다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자동차 바로 앞에 있는 건물 입구에서 한 여자가 급하게 뛰어나오고 있었다. 여자가 숨을 고르며 무어라 말하자 남자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웃었다. 빛에 반사된 두 사람의 반지가 반짝거렸다.
숨이 잠시 멈추고, 송태원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송태원은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성현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연달아 울린다. 종일 연결되지 않았던 신호음이 길어지자 송태원의 걸음이 자연히 빨라졌다. 또다시 신호음은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당장 성현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송태원은 무작정 세성 길드 쪽으로 향했다. 한 송이 뿐인 장미가 구겨지지 않게 손에 꼭 쥐고서.
세성 길드 건물 1층은 고요했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으니 퇴근할 사람들은 벌써 퇴근하고도 남을 때였다. 송태원은 건물 1층의 가드를 발견하고는 장미꽃을 슬쩍 등 뒤로 감추었다. 방문자가 송태원 실장임을 확인한 가드는 어딘가로 전화를 건 뒤 별다른 제지 없이 송태원을 통과시켜주며 말했다.
“길드장님은 7층에 계십니다. 아직 회의 중이세요.”
송태원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회의실로 올라갔다. 회의 중이라는 말과 달리 회의실의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문 너머로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기에 송태원은 소리가 나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성현제가 눈치챌 게 뻔했으나 송태원은 등 뒤로 감춘 장미를 바짝 제 쪽으로 붙였다. 훤한 유리창이 나 있는 커다란 회의실 안에 놓인 타원형 테이블 끝에 성현제가 홀로 앉아있었다. 셔츠 소매를 걷은 채 서류 판을 보고 있는 성현제는 송태원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느꼈을 터인데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온종일 연락을 받지 않았던 성현제에 조금 서운할 뻔도 했을 터인데 성현제를 보는 순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네가 일찍 퇴근할 때도 있군.”
“이른 시각은 아닙니다만.”
조용한 회의실에는 성현제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났다. 송태원이 성현제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서는데도 성현제의 시선은 송태원에게 닿지 않았다. 성현제에게 가까이 갈수록 장미 향이 짙어지는 것 같았다. 송태원은 성현제 바로 앞에 섰다. 성현제 뒤에 놓인 선반 위로 장미 꽃다발이 쌓여 있었다. 화려하게 핀 장미가 수십 송이였다. 송태원은 제 뒤에 감춰진 장미 한 송이를 꾹 쥐었다.
“장미가 많군요.”
“어쩌다 보니. 별거 아니네.”
송태원은 가만히 성현제를 바라봤다. 제 머리칼보다 한참은 옅은 색이 달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별거 아니라니. 점잖은 목소리에 불퉁함이 담겼다. 어쩐지 가볍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송태원은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했다.
“오늘 연락이 안돼서 걱정했습니다.”
“그랬나? 미안하네.”
손쉽게 사과하는 성현제에 송태원은 확신했다. 이건 심술이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렇네.”
“어제, 저녁 약속 못 지켜서 죄송합니다.”
“뭘 그러나. 한두 번도 아니고.”
“성현제 씨.”
“송 실장. 할 말은 끝났나? 오늘 너무 바빠서 말일세. 송 실장이 아무리 오랜만에 길드로 찾아왔다고 하더라도...”
“현제 씨.”
성현제의 말이 멎었다. 송태원이 회의실에 들어온 이후로 성현제가 처음으로 송태원의 말에 제대로 된 반응을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약하게 어깨가 굳었다. 뻔한 핑계를 대는 것이 성현제 답지 않았다. 그래서 송태원은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했다. 할 줄 아는 방법이 그것 뿐이기도 했고, 성현제에게 먹히는 방법이 그것 뿐이기도 했다.
송태원은 한쪽 엉덩이를 책상에 걸친 채 성현제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제대로 얼굴 보여주시면 안 됩니까. 보고 싶습니다.”
송태원은 성현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성현제보다 시선을 위에 두고 있어서 그의 표정까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송태원은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을 했다. 꾸준히, 기다리는 것. 얼마간 멈추어 있던 성현제의 시선이 천천히 송태원 쪽으로 옮겨왔다. 달빛에 그늘진 단단한 얼굴이 부드러운 시선을 담고 성현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현제는 다소 급히 입을 뗐다.
“송 실장.”
“성현제 씨 말대로 별거 아니지만.”
송태원은 성현제 앞으로 장미 한 송이를 건넸다. 성현제 뒤로 놓인 수많은 것들에 비하면 너무나 작았다. 그러나 송태원은 꿋꿋이 성현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성현제 앞에서는 어떤 꽃이든 무슨 소용이랴 싶었다. 성현제는 그리 놀랍지 않다는 얼굴로 송태원에 손에 들린 장미를 바라봤다.
“사과의 의미로 가져온 게 별거 아니라 죄송합니다. 그래도, 드리고 싶었습니다.”
성현제는 송태원을 한 번 올려다보곤 꽃을 받아들었다. 성현제는 분명 놀라지는 않았으나 그의 눈썹이 조금 풀린 것으로 보아 꽃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송 실장은 가끔 귀여울 때가 있어.”
“가끔이라 아쉽군요.”
“저건 전부 치워도 되겠군.”
받을 사람한테 받았으니 말이네. 그 말과 함께 성현제가 가리킨 것은 선반 위에 쌓인 장미꽃들이었다. 성현제는 송태원에게 받은 장미를 손에 꼭 쥐었다. 송태원이 들었을 때는 색만으로도 화려한 장미 한 송이가 그 앞에서는 시시해 보였다.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성현제에게 갖다 대려면 한없이 부족해 보였다. 송태원은 그제야 한 송이가 아니라 백 송이쯤은 샀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매번 반송만 당하다가 직접 받으니 새롭군.”
“성현제 씨.”
“왜 그러나.”
송태원은 장미를 들고 있는 성현제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얘기하고 싶다고 생각한 말이 있었으나 머릿속으로 전혀 정리되질 않았다. 그러나 꽃을 들고 있는 성현제를 보고 있으니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생각이 입밖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송태원은 제 딴에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려 애쓰며 말했다.
“깊이 생각해 본 것은 아닙니다만.”
“무엇을 말인가.”
“사실 조금 충동적인 거 같기도 합니다. 아니, 꽤 많이 충동적입니다.”
“말해보게.”
“저는 성현제 씨를 보는 게 좋습니다.”
갑작스러운 고백 아닌 고백에 성현제가 흥미롭다는 듯 송태원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도리어 송태원이 멋쩍은 듯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 하며 이리저리 시선을 굴렸다.
“그렇지만... 의도하는 바는 아니지만, 저도, 성현제 씨도 시간을 만들기 어렵지 않습니까.”
이리저리 흩어지는 송태원의 말에 성현제는 웃으며 왼손 위로 턱을 얹으며 송태원을 살폈다. 그리고는 이미 사과받은 일을 다시 변명하려는 것 같은 사람에게 말했다.
“혹시 변명을 하려는 거면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이렇게 찾아와 사과까지 하지 않았나. 그 정도도 생각 안 하고 자네와 만나는 게 아니네만. 이번에는 내가 자네를 좀 골탕 먹이려고...”
“아뇨. 그런 말이 아닙니다.”
다급하게 덧붙이는 송태원에 성현제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송태원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산만 한 덩치를 한 사내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는 건 드문 일이었기에 성현제는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 송태원의 모습이 재밌기도 했고.
“당신 얼굴을 보는 것도 좋고, 당신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니 저도 어제처럼 약속을 깨는 일이 자꾸 벌어지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성현제 씨.”
송태원이 천천히 성현제와 시선을 맞추었다. 송태원의 시야 가득 성현제가 들어찼다. 성현제는 이어질 송태원의 말이 무엇일지 짐작되었다. 그러나 기다렸다. 그도 이 고지식한 사내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송태원은 숨을 끌어모아 성현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저희, 그만 같이 살까요?”
*
커다란 상자를 든 송태원은 아파트 화단을 지나가다 장미꽃 앞에 멈추어 섰다. 어느새 활짝 개화한 장미 나무는 눈이 시릴 만큼 화려했다. 딱 일주일 전 이 앞에서 시작된 하루의 기억이 생생했다. 송태원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발걸음을 옮겨 아파트 앞에 주차된 차 트렁크에 상자를 넣었다. 조수석에 오른 송태원이 안전벨트를 맸다.
“짐은 저게 다인가? 얼마 안되는군.”
“죄다 버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쓸만한 게 없으니 그런 거 아니겠나. 투정 부리지 말게.”
성현제가 아이를 달래듯 송태원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시동을 걸었다. 아파트를 부드럽게 빠져나간 차가 속도를 올렸다. 송태원 뒤에는 백 송이쯤 되어 보이는 커다란 장미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송태원은 그 꽃다발을 한 번, 운전하고 있는 성현제를 한 번 돌아봤다. 성현제가 의아한 듯 송태원을 바라보자 송태원이 그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역시 성현제 씨랑 잘 어울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