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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것 인듯,

내 것 아닌 장미에게. *

jebi

 

1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장미라니. 태원은 고개를 잠시 떨구고 말았다. 낯간지러울 정도로 어울리지 않지만, 꽃으로 비유하자면 어느 무엇보다도 어울리지 않는가. 그런데 왜 그의 고개는 아래로 떨어졌는가. 그것은 자책이자 경각심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비유의 대상이 누구던가. 괴물의 정점, 괴물 중의 괴물인 세성 길드장 이었다. 그러니까, ‘성현제’ 말이다. 구두 끝이 한참을 망설였다. 
 누구누구라고 하기도 그렇고…. 다들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송태원, 즉 각성자 관리실 송태원 실장의 작고 소중한 경차는 이미 부서지고 없었다. 앞서 말한 성 모 씨 덕분이다. 원래도 변덕스럽고 종을 잡을 수 없는 존재긴 하였으나…. 갑자기 그런 식으로 들이받을 줄은 몰랐다. 태원은 놀라지 않았다. 처음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그는 어떻게 이동하고 있는가. 역까지는 동료의 차를 타고, 내려서는 ‘뚜벅이’ 상태로 자신의 오래된 아파트로 향하던 길이었다. 사정이 생겨 평소보다 도심에 가까운 곳에 내리게 되었다. 죄송해요, 실장님. 아닙니다. 가벼운 작별인사를 마치고 옮긴 걸음은 어느새…. 꽃집에 닿아버렸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이다지도 충동적인 인간이었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송태원은 ‘그날’의 특별함을 잊은 지 오래였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전부터 축하해줄 이들이 일찍부터 빈자리로 남았던 탓이었다. 그런데 저 자신의 날도 아니고 왜 하필 ‘그’의 날에 이 앞을 서성이고 마는 걸까. 하얀 장미였다. 탐스럽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봉우리가 컸다. 다 핀 것인지 원래 저런 모양인지 장미치곤 크고 동그란 형태라서 다른 꽃을 닮아 보이기도 했다. 잎에는 물든 듯 여러 색의 흔적이 있었다. 노랑과 분홍, 등나무 꽃을 닮은 보라색에 가까운 선홍. 태원은 눈을 세게 감아보았다. 
 이대로 지나쳐야 한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때마침 휴대전화가 울리고야 말았다. 발신인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짙은 눈썹이 여전히 구겨진 채였다. 드디어 구두 끝이 위치를 옮겼다. 그리고 결국, 커다란 손이 꽃집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문이 열렸다.

2

 뜬금없이 내밀어 진 꽃다발은 상투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좋은 말로 표현하자면 고전적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너무 고전적이라 촌스러울 지경이었다. 송태원은 꽃을 사본 적이 거의 없었다. 무슨 죄를 짓는 것도 아닌데 딱딱하게 굳어있는 모양이 누가 봐도 어색했다. 성현제가 봤다면…. 은근히 뻔뻔하다 싶었더니, 여지없군그래. 라고 평가했을 것이다. 기껏 힘겹게 말을 꺼내놓고 장미는 고작 한 송이를 샀다. 이유는 단순했다. 송이 당 만원이 넘어갈 줄 몰랐다. 어디 그뿐인가. 장미만 달랑 넣을 수도 없었다. 
 송태원을 알아본 꽃집의 사장이 눈치 빠르게 ...어, 3만 원 넘지 않는 선에서 하더라도 한 송이만 하는 것보단 다른 것도 좀 넣어야 볼 만 할 텐데요. 하고 조언해 준 덕분에 그런 감각이라곤 털 한 올만큼도 없는 송태원도 나름대로 노력이란 걸 해봤다. 그러나…. 뛰어봤자 벼룩이라는 말은 이런 상황에 써도 좋은 것일까. 그럼…. 안개꽃을 넣어주십시오. 
 변명하자면, 꽃집의 사장님은 전문가였다. 문화센터에서 플로리스트 수업을 맡고 있고, 손재주가 좋은 이가 운영한다며 SNS에서도 다름대로 명성도 있다. 하지만 누가 각성자 관리실 실장, 송태원에게 저기요, 센스 없으시네요.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의 직위나 각성 등급 때문은 아니었다. ‘S급 중에 나와 같이 밤을 새워주는 건 오직 송태원뿐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안다. 그 노고를 알기에 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보편적인 하얀색이 아닌 색 안개꽃을 끼워준 것은, 사장의 필사적인 프로 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긴 사연을 다 말하진 못했다. 할 생각도 없었지만.
 「...각관실에서 보내는 거론 부족하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물음은 없었다. 이게 웬 거냐, 장미라니 무슨 고백이라도 하러 왔느냐…. 그런 말 따위는 한마디도 없었다. 태원이 먼저 뱉은 것이었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으나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미리 말하지만, 그에게 수전증은 없다. 그렇다면 왜, 유달리 큰 송이를 자랑하는 장미와 그 주변을 감싼 가느다란 안개꽃이 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일까. 포장지가 자꾸만 바스락 소리를 냈다. 부동자세인 것은 눈동자뿐이었다. 꽃다발을 든 송태원을 바라본 채로 입을 다문 성현제에게 향한, 그대로였다.

 

3

 세운 청각이 무색하리만치 조용했다. 송 실장, 자네 당이라도 떨어졌나? 저런, 젊은 나이에 안됐군. 그런 식으로 놀릴 만도 한데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태원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러나 그도 목소리를 내는 일은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 만에 손이 뻗어 왔다. 빛바랜 노란색 종이와 얇고 반짝이는 비닐에 기다란 손가락이 감겼다. 
 「꼭 자기 같은 걸 주는군그래. 안개꽃이라니, 자네 한 10년 전 사람 같은 거 알고 있나?」
 이래야 성현제지. 안 그래도 굳어있건만 평소보다 더 딱딱해졌던 하관이 조금 느슨해졌다. ...저런식의 비아냥에 긴장이 풀리다니, 어딘가 억울해졌다. 그러면 어쩌겠는가, 대상이 대상인 것을. 커다란 손바닥이 꽃다발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한 송이가 향이 진하면 얼마나 진하겠는가. 그런데도 영화, 드라마에선 의례 받은 꽃에 코를 박고 향기를 맡는 장면이 상투적으로 나오곤 했다. 그의 반응은 어떨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황금색의 눈동자가 가늘게 변했을 뿐이었다. 
 「...장미가 있잖습니까. 싫으면 돌려주시던가요.」 
 「정없긴, 줬다 뺏는 게 제일 치사한 거라네.」
 손끝이 더듬는 것은 안개꽃이었다. 그러고 보니, 꼭 자기 같은 걸 준다고 했던가. 그럼…. 송태원이 미간을 구겼다. 지금 누굴 꽃으로 비유하는 겁니까. 하고 쏘아주려던 입술이 멈췄다. ...지금 남 말 할 때가 아니군. 뒤늦은 통찰이었다. 살이 치아 밑으로 말려들어 가려다 말았다. 찰나의 사색은 그의 근육을 그리 많이 움직이게 하진 않았다. 그러나 계속 말하지만, 상대가 상대이지 않은가. 아무리 미세하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숨길 이에게 숨겼어야 했다.
 「그래도 칭찬해줘야겠지. 자네 치곤 제법 로맨틱한 선택이야. 이 장미의 어디가 날 닮았나?」
 휘청이진 않았다. 이마를 구긴 것도 아니었다. 정곡을 찔려서 할 말이 없기는 했다. 왜, 눈치도 번개같이 빠른 건지, 새삼 원망스러운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그 말이 꼭, 네가 이렇게 말랑한 ‘인간’이었느냐고 되묻는 문장으로 들렸다. 송태원에게 ‘생일’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자신의 것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것은…. 언급했듯이 딱히 챙길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과거의 말이 되었다.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묵비권이라. 눈매가 휘었다. 의도한 것일까. 그럴 리가. 송태원은 성현제가 알고 있는 이 중에 가장 지루하고 고루하다가도 한번 방향을 틀면 자신이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는 채 질주하곤 하는, 판에 박힌 부분과 의외성이 가장 크게 양립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저건, 무자각이다. 부정이 없었다. 
 불쾌하기보단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몰랐다. 저도 모르는 것을 어떻게 남에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발길이 멈췄는지, 왜 꽃집 문을 열고야 말았는지, 왜 3만 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꽃다발을 들고 나왔는지…. 자기 일인데도 알 수 있는 것이 단 한 가지가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오늘이 송태원과 성현제가 가끔 밤과 새벽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 이후에 처음 맞는 그의 생일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딱히 ‘연애’는 아니었다. 그런 간질간질한 것이 없어도 충분히 잠자리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만큼 꿈과 희망이 가득한 나잇대가 아니라서만도 아니고…. 나란히 선, 인간과 무언가의 걸쳐진 존재들의 상호 보완 같은 행위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송태원은 눈을 감았다. 눈동자가 다시 드러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저 변덕 같은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태원의 손가락은 주인을 닮아 조용하고 엄숙하게 다가왔다. 꽃다발의 묶인 부분에 감긴 현제의 손가락 위로 말이다. 현제의 웃는 낯은 변하지 않았다. 어쩔까. 송태원은 이럴 때 한없이 둔감해지지. 장미의 색감을 닮은 얇은 입술이 위로 끌어올려 졌다. 뭐, 관대하게 넘어가 줄까. 서늘한 손등에 다른 체온이 닿았다. 안개꽃이 하늘거리는 것과 닮은 동작임을, 그는 알고 있을까. 그럴 리가. 
 「뭐, 그렇다고 쳐 주겠네. 화병을 마련해야겠군.」
 뜻밖에 순순한 대답이었다. 다른 쪽 손바닥이 단단한 턱을 쓸었다. ‘대신,` 현제가 문장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렸다. 얼굴이 가까웠다. 송태원은 그 거리를 밀어내지 않았다. 인상을 쓰고 있긴 했지만…. 저도 모르게 굴복한 듯했다. 크고 단정한 입매가 뭉개졌다. 생일 축하가 제법 길어질 모양이었다.
 「온 김에, 자네를 기다린 장미에 물 좀 주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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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SE D'HIMALAYA *

고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그 남자를 꽃에 빗대는 것은 불경하게까지 느껴졌다. 아름답고 강하고 선명해서 세상이 멸망한 후에도 영구히 존재할 것 같은 그 남자더러 며칠 만에 덧없이 지고 마는 연약한 꽃이라니. 사물의 본질을 흐리는 데에도 정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사여구를 늘어 놓는 데에는 재능도 취미도 없는 송태원이 그 남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그보다 더 나은 말은 찾지 못했다. 사실은 그것밖에 몰랐다. 

 그의 미소는 만개한 장미처럼 아름답고 목소리는 재스민처럼 향기롭고 머리카락은 장미 꽃잎처럼 부드럽고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는 피어나는 작약처럼 화려했다. 그 모든 게 모여 송태원의 팔 안에 안길 때면 작은 은방울꽃처럼 사랑스러웠다. 그는 송태원의 어두운 인생에 꽃 같았던 단 한 사람이었다. 

 처연하게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서는 독을 품은 가시덤불 안에 고고하게 피어 있는 그 남자를 욕망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송태원은 아니었다. 송태원이 온몸에 약탈의 그림자를 두르고도 피투성이가 되어 겨우 손에 넣은 것은 피다 만 자그맣고 새하얀 꽃 한송이었다. 제 손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에 얼룩져 더럽혀진 새하얀 장미 꽃송이를 보고 웃었던가, 울었던가. 

 송태원은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뜸과 동시에 손을 뻗은 커다란 침대의 절반, 그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옆자리 뿐 아니라 방 안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이 없어서 송태원은 구르듯 침대에서 내려와 그대로 뛰쳐 나갔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며 들여다 본 방 안에도, 거의 부서질 듯 열어 젖힌 현관문 너머 정원에도 없다.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간 온실 유리 너머로 비치는 인영을 눈에 담고 나서야 송태원은 겨우 숨을 쉬었다. 갑자기 산소를 들이키자 피가 도는지 손끝부터 저릿했다. 핑 도는 머리와 후들거리는 다리로 온실에 들어서자 포근한 공기에 그의 향이 실려왔다. 

 송태원은 속에서 불쑥 치밀어 오르는 것을 삼키고 소리 죽인 발걸음으로 다가가 폭신한 그의 머리카락 위로 입술을 눌렀다. 웃음 같은 숨소리가 희미했다. 일어나 보니 당신이 없어서 놀랐다고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는데 입을 열기도 전에 부러질 듯 가녀린 손목이 올라와 송태원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의 손길 하나면 송태원은 온순한 개가 되었다. 뭐라 말하려던 것도 잊고 송태원은 그의 연약한 부름에  무릎을 굽혀 그의 뺨에 입 맞췄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고 발치에 떨어져 있는 담요를 가져와 그의 무릎 위에 덮어 꼼꼼히 여미고 있는데 그가 송태원의 손을 잡아왔다. 

 마른 자작나무 가지 같은 희고 예쁜 손가락에 반지가 겉돌았다. 언제부터인가 성현제는 반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그 손가락을 굽히고 있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러면 송태원은 익숙하게 그 가느다란 손에 깍지를 끼고 반지를 다시 밀어넣으며 흰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남자의 까슬한 입술에서 전해지는 애정이 귀여워서 성현제는 비밀 얘기라도 하듯 속삭였다. 

 "꿈을 꿨어."

 "어떤 꿈이요?"

 성현제는 빙긋 웃었다. 추궁해봤자 대답하지 않거나, 시덥잖은 농담밖에 흘러나오지 않을 때의 그 표정이라 송태원은 빠르게 단념했다. 몇 년이나 이 남자의 곁에 있으면 그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불가능한 일에 기력을 쏟느니 오랜만에 일찍 일어난 김에 한 끼라도 더 먹일 생각이었다. 프렌치토스트라도 만들까. 베이컨을 굽고 포도를 곁들이자. 일단 그의 두 손에 따뜻한 찻잔을 쥐어주고 싶었다. 

 "아침은 여기서 먹을까요."

 성현제는 대답 대신 두 팔을 뻗었고 송태원은 기다렸다는 듯 그 몸을 안아들었다. 한때 저와 비슷했던 남자의 몸집은 지금의 송태원도 무리 없이 안아들 수 있을 정도로 가늘고 가벼웠다. 가까이 품어 안자 희미하게 떠돌던 향이 짙어졌다. 성현제가 향이 짙은 물건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를 매일 씻기고 입혀 끼고 다니는 송태원이 제일 잘 알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성현제에게서는 늘 향이 났다. 찻잎에 희미하게 배어든 마른 장미향. 목덜미에 코를 묻고 그 어렴풋한 향기를 들이키는데 남자가 말했다. 

 "태원아."

 익숙한 목소리였다. 모든 스킬이 사라지고 단단했던 몸이 가늘어지고 오래 걷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쇠약해지는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은 그 남자의 단단한 영혼과 톤이 낮은 매끄럽고 잔잔한 목소리 뿐이었다. 나직하고 다정한 울림을 사랑한 건 언제부터였던가. 성현제는 송태원의 품에 고개를 기댔다. 그의 목소리는 공기가 아니라 송태원의 몸 안으로 직접 전해져왔다. 

 "태원아. 꽃이 피었어."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작은 꽃송이가 보였다. 나뭇가지에 둘러 싸여 피어난 하얗고 작은 꽃. 송태원의 꿈에서는 피로 물들었던 그 하얀 장미가 제철도 아닌데 하룻밤 새 곱게 피어 있었다. 순간 송태원의 심장 위에 덜컥 무겁게 얹힌 것은 공포였다.  

 평범한 장미였다. 던전 식물도 아니고 저주나 아이템도 아니다.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비현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은 송태원이 그토록 갈구했던 현실이다. 그러니 꽃이 피었다고 그가 스러질 리 없었다. 세계를 조종하던 자들과 벌인 목숨을 걸었던 치열했던 싸움 후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의 제자리로, 각성자도 던전도 없는 평범한 세계로 돌아왔다. 

 송태원이 경찰로 살아가고 성현제가 하루하루 죽어가던 날들로. 

 그런데도 불안하고 두려워서 저걸 없애버리면 이 쓸데없는 망상도 사라지겠지 싶었다. 송태원은 성현제를 안은 채로 나무로 다가갔다. 꽃을 향한 손이 가시 가득한 가지에 쉴 새 없이 긁혔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송태원이 무아지경으로 가시를 헤치고 잡아 꺾은 하얀 꽃송이 위에도 한 방울 피가 맺혔다.  

 평범한 꽃이었다. 송태원은 품 속의 남자에게 꽃을 건넸다. 흰 꽃, 그 꽃을 감싸쥔 송태원의 피투성이 손. 그 위에 성현제의 희고 가는 손이 가볍게 닿았다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의 손 끝을 따라 번진 핏자국 위에 투명한 액체가 툭툭 떨어져 꽃잎 아래로 흘러 내렸다. 송태원은 저가 오늘 아침 꿈 속에서도 이렇게 울고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저도 꿈을 꿨습니다."

 송태원은 울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당신도 같은 꿈을 꿨나요. 그래서 나를 두고 나온 겁니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눈물에 먹혀 나오지가 않는다. 남자는 송태원의 젖은 얼굴을 마주보고 곤란한 듯 웃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울면 어쩌나, 우리 태원이. 그렇게 말할 때의 표정인 걸 송태원은 알았다. 수십 번이나 들어와서 어조와 액센트까지 귀에 생생했다. 그때마다 송태원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지금도.

 "사랑합니다."

 저를 두고 가지 말라는 애원을 삼키고 토해낸 사랑 고백에 매끄럽게 휘어지는 입술이 꽃잎 같았다. 

 "성현제씨."

 천천히 감기는 금빛 속눈썹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꽃술 같았다. 

 "사랑합니다."

 꽃이 졌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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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 *

그냥

기다림

W.그냥 @seong_right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유독 맑은 날씨는 눈앞에 있는 장미의 색을 화사하게 만들었다. 송태원의 발걸음은 꽃집 앞에 멈춰 섰다. 한가득 담긴 장미 다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갈 길을 잃은 사람처럼 장미만 보았다.

 “장미가 예쁘게 피었죠?”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노란 장미와 흰 장미가 송태원의 감정을 어그러트렸다.

 “예, 예쁘게 피었군요.”

 “연인이 장미를 좋아해요?”

 “글쎄요. 선물로 자주 들고 왔지만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충동적이긴 했지만 송태원은 눈앞에 있는 장미를 사고 싶었다.

 “일단 주십시오.”

 말 그대로 충동적인 구매.

 송태원의 품에는 노란색과 흰색을 지닌 장미가 섞인 꽃다발이 안겨졌다. 품에 가득한 장미향은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품 한 가득 장미의 향을 품고 그의 발걸음이 옮겨진 곳은 병원이었다.

 “실장님! 오셨습니까?”

 “어? 실장님, 웬 장미입니까?”

 “성현제씨는?”

 “어제와 같습니다.”

 “그렇군. 알았다. 오늘은 내가 지킬 테니 들어가 보도록.”

 “오늘 쉬는 날 아니셨습니까?”

 “둘이서 대신 쉬어.”

 “앗, 그래도 됩니까?”

 “그래.”

 송태원은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일을 했다. 송태원 아래에 있는 팀원 둘은 이게 뭔 일이야? 라는 표정으로 송태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서 돌아섰다. 그 전에 송태원의 품에 있는 꽃다발에 시선을 계속 주기는 했지만 답을 하지 않는 모습에 더 묻지는 않았다.

송태원의 시선도 제 품에 있는 장미 꽃다발로 향했다. 어쩌자고 사온 것일까. 그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결론은 성현제였다. 그가 떠올라서, 그의 곁에 두면 좋을 것 같아서. 송태원은 팀원들이 모두 가자 그제야 병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급스러운 병실에 있는 유일한 침대위에는 성현제가 있었다.

 장미 꽃다발을 든 채로 침대 옆으로 온 송태원은 깨어나지 않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랬는지 묻고 싶습니다.”

 답이 들리지 않는 질문을 송태원은 내뱉었다. 그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방호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잖습니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장미꽃다발을 포장한 비닐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냈다.

 “왜 그랬습니까.”

 경찰은 조직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능력이 좋은 송태원은 그 전쟁에서 전방에 위치한 상태였다. 위험했지만 내부의 분열을 위해 성현제의 신임을 받으며 공조를 얻어냈다. 그렇게 성현제의 조직은 경찰과 공조해 다른 조직을 치기 시작했다. 세성은 이번 일을 계기로 어둠에서 빛으로 오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제게 빚을 만들고 싶었습니까. 무슨 좋은 꿈을 꾸기에 깨어나지 않는 겁니까.”

답을 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송태원의 시선은 성현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성현제를 보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근처에 있는 꽃병에 장미 꽃다발을 담았다. 흐드러지게 핀 꽃다발을 성현제가 누워있는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렸다.

 “당신이 떠올라 샀습니다. 답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항상 당신이 사왔는데 제가 사오니 어색합니다.”

 장미 꽃 송이를 만지던 송태원이 말을 이었다.

 “벌써 장미가 피는 계절입니다. 성현제씨, 언제까지 잠꾸러기처럼 잠을 자고 있을 겁니까. 이제는 정말 깨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향기로운 장미의 향이 은근하게 병실을 채워갔다. 송태원은 장미와 성현제를 제 시선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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