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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벼락, 정원

그리고 한 송이 *

네리아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유독 흐드러진 장미의 향이 언뜻 독하게도 바람을 타고 남자의 코끝을 간질였다. 담벼락에 피어난 새하얀 장미들이 새벽녘의 어스름한 물기를 머금고 햇빛에 찬란하게 빛났다. 보통은 붉은 장미를 심는 일이 많을 텐데, 특이하기도 했다. 그 자태가 문득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 송태원은 무심코 장미꽃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금방이라도 닿으면 부서질까, 나비 날갯짓처럼 가벼운 손길에는 꽃잎에 맺혔던 아침 이슬이 차가운 기운을 옮기며 굴러떨어졌다. 눈길을 사로잡으며, 잊지 못하게 잔향을 남기는 것까지 그 사람을 꼭 닮았고, 생각이 흐름이 장미에 파묻힌 모습까지도 상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장미가 저물 때까지 출근길을 바꾸기로 했다.

 

 출근길에 성현제 생각이나 했다는 것에 금방 그 기억을 한구석에 처박아버린 것이 무색하게도, 며칠 뒤 오후에 직접 꽃다발을 들고 온 성현제의 손에는 그간의 붉은 장미와 달리 흰 장미 다발이 들려있었다. 하얀 장미의 향은 머리 아프도록 진했고, 성현제의 물 빠진 머리카락 색과 금빛 눈동자와 맞물려 별처럼 빛이 나는 듯했다. 그것은 아침에 담벼락을 지나며 그를 상기했던 송태원이 상상했던 모습만큼이나 잘 어울렸기에, 인상부터 찌푸리던 그동안과는 달리 무심코 묻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오늘은 붉은 장미가 아니군요.”

 

 자신이 질문을 던졌다는 것을 성현제가 눈을 반짝이며 웃음 짓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아 입가를 손으로 가렸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더 후회하는 대신 대답을 듣기로 하고 가만히 꽃과 성현제를 훑듯이 응시했을 뿐이다.

 

 “붉은 장미가 더 좋았나, 송 실장? 내 마음을 알아채 줬다면 진즉에 좀 받아주지 그랬어.”

 “대답을 안 하셨습니다.”

 “하얀 장미가 향이 좋거든. 송 실장이 질릴까 싶어 특별히 세심하게 바꿔왔다네. 봐.”

 

 꽃다발이 훅하고 송태원의 눈앞에 다가왔고, 향기가 그 움직임에 터져 나오듯이 퍼뜨려졌다. 물기를 머금은 생생한 장미꽃의 향은 눈앞의 사람처럼 외면하기도 어렵게 그 존재를 외쳐댔다. 송태원은 미묘해진 표정으로 꽃을 내려다보고, 다시 성현제를 쳐다보았다. 생글생글 웃는 낯짝이 참으로 얄밉다는 생각을 해, 그도 괜히 짜증 섞인 심술이 올라왔다. 그는 꽃다발의 장미 한 송이를 뽑아냈다. 줄기를 툭 부러뜨리는 손길은 망설임이 없었고, 꽃을 성현제의 귓가에 꽂는 것에는 더 거침이 없었다. 송태원이 드문 반응을 보이는 것에, 마치 흥미가 돋은 고양이처럼 상대를 응시하던 성현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항시 저를 놀리기만 했던 표정에 다른 감정이 떠오르니, 송태원은 만족감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쪽이 잘 어울리시겠군요. 세성 길드장님의 장신구로 쓰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송태원은 받은 장미 다발을 내밀었다. 잠시 꽃을 꽂은 방향의 머리칼을 정돈한 성현제가 금방 눈매를 초승달처럼 휘며 말했다.

 

 “꽃다발보다 이게 보기 좋다면, 앞으로 그렇게 해주지.”

 “그리고 제 취향이라고 온갖 곳에 소문을 내실 작정이시겠지요, 안됩니다.”

 

 슬쩍 기울인 고개를 가까이하는 성현제의 모습에 송태원은 상체를 조금 뒤로 물렸다. 놀라는 눈동자를 조금 더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과 좀처럼 말려들지 않는 상대의 면모를 새삼 확인하니 다시 심사가 뒤틀렸을까. 이대로 두었다가는 꽃을 그대로 달고 나가겠구나 싶은 직감에 귓가의 꽃을 빼 성현제의 가슴팍에 있는 웰트 포켓에 꽂았다.

 

 흥미만 돋아있던 성현제의 눈은 이내 그를 한껏 곤란하게 할 때의 표정으로 눈웃음을 지었기 때문에 송태원은 불에 덴 듯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성현제는 제 정장에 꽂힌 하얀 장미를 한 번 만지작거리더니 느긋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송 실장은, 선물한 꽃다발에서 꽃을 꺼내 포켓에 꽂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나?”

 “모릅….”

 “데이트하자는 의미지.”

 

 대답을 기다릴 생각은 없다는 듯, 말을 끊어버리며 숨결이 닿을 듯이 가까이 다가간 성현제는 나직이 목소리를 낮추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장미향과 향수가 뒤섞여 송태원의 머리를 어지러뜨리는 것이, 자칫하면 말려든다는 생각에 인상을 구긴 채로 마지못해 몸을 뒤로 물렸다.

 

 “몰랐으니 무효입니다.”

 “이런. 세성 길드장과의 데이트 기회를 그렇게 걷어차는 사람도 희귀한데 말이야.”

 “유감스럽게 됐습니다.”

 “송 실장은 참 부정하는 말을 잘한단 말이지, 오늘은 곤란한 얼굴을 실컷 구경하였으니 이 정도로 해두겠지만, 이걸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꽃 한 송이를 손끝으로 빙그르 돌리며, 여상스럽게 말하는 것에 송태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고는, 원래 용건을 말해달라는 것으로 화제를 넘겼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하얀 장미 꽃다발을 어느 틈엔가 제 책상에 올려두고 갔다는 걸 깨닫고 그는 꽃을 돌려주려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송태원은 장미 다발을 한숨을 쉬며 가방 틈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충동적인 일이었다. 성현제는 제가 이 장미를 버렸으리라 여겼겠지만. 이 날은 그저 일상의 한구석에 불과한 사건으로 그렇게 묻혔다. 그 순간이 아니었다면 둘 중 아무도 기억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송태원의 마지막 순간에.

 

 “그때, 담벼락에 하얀 장미가 있었습니다.”

 “실없는 소리를….”

 “그게 당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성현제는 말문이 막힌 것인지, 기가 막힌 것인지 드물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것이 불만이 가득한 듯, 고집스럽게 보여, 송태원은 어렵사리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한 번은 당신의 억지스러운 말에 그러겠노라 해 보는 것도 좋았겠지요.”

 

 성현제의 일그러진 얼굴이라니 희귀하군요. 가는 숨을 뱉으며 희미한 눈웃음을 지어 보인 송태원은 성현제의 달싹이는 입술을 보았으나, 끝내 그가 어떤 답을 하였는지 듣지 못했다.

 

 그 뒤에도, 성현제의 삶은 이어졌다.

 

 장미라는 식물은 참으로 손이 많이 가고 연약한 존재라 제대로 관리해주지 않으면, 다른 풀들에 밀려 꽃 한 송이 제대로 피우기 어려웠다. 성현제는 그런 성가신 것들도 즐겼으므로, 작게나마 여유가 남아있을 시절에는 정성껏 가꾸었다. 수없이 제게 장미꽃다발을 받은 이는 그게 제가 키워낸 것인지, 꽃집에서 사들인 것인지 구별할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다지만. 그러므로 자신이 관리를 포기한 이 저택 한쪽에 있던 장미 덤불은 이리저리 벌레에 갉아 먹혀서 작은 꽃송이나마 피우면 다행히요, 그 볼품없는 꽃송이도 결국에는 열매도 없이 금방 지고 말 것이었다.

 

 성현제는 단단한 이였고, 해외로 나와 제 할 일을 하면서 조금 변한 점이라고는 거주지의 정원을 방치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틈바구니에서도, 한 송이 정도는 꽃을 피워 기어코 그의 마음을 한없이 어지러뜨려 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손아귀에 볼품없이 작은 하얀 장미가 향만큼은 강렬하게 퍼뜨리고 있는 것에 충동적으로 꽃줄기를 끊어버릴지를 고민하며 눈을 깜빡였다. 성현제 자신에게 마지막 말로 그런 것이나 남기고 숨을 거둔 탓에, 이런 것 하나에 휘둘리게 된 꼴이라니. 그런데도 성현제는 차마, 그 꽃을 꺾어내지 못했다. 일찍이 제 손으로 송태원의 숨을 거둬주지 못하였듯이.

 

 그에게 직접 가져다준 꽃다발은 1년에 두 번이나 있을까 한 일로, 성현제가 직접 가꾼 정원의 장미로 손수 만든 것이었다. 변덕을 부려 그 해는 하얀 장미를 잔뜩 심었었고, 그래서 평소랑 다르게 붉은 장미가 아니었건만. 송태원의 반응이 평소와는 달랐기에, 다음에는 또 하얀 장미를 심어서 반응을 한 번 더 볼까 싶었다. 기회는 앞으로 영영 오지 않겠지만.

 

 차라리 그에게는 송태원이 흰 장미가 잘 어울릴 것이었다. 담백한 인상을 주는 색을 가지고서, 향으로 뭇 존재들을 끌리게 하는 것을. 이리 말하며 그에게 타박이라도 하고 싶은데도 여의치가 않으니 성현제는 나직이 한숨을 쉰다. 그리고 이내 떨쳐내고서, 다시는 구석에 핀 장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모든 것은 파편이 되어 사라져 갔다. 그리고 올해, 성현제는 알 수 없는 마음에 하얀 장미들을 심었으며, 그 흐드러진 장미를 송태원에게 내밀었고, 그가 한소리를 하기 전에 선수라도 치겠다는 듯이 한 송이 장미를 그 귀에 꽂았다. 와락 일그러지는 송태원의 표정에 성현제는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데이트나 할까, 송태원.

 

 선뜻 수락의 답이 돌아와, 눈을 크게 뜬 성현제를 보고 송태원이 만족스럽게 웃기까지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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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0-37_A던전의 저주 *

노루

 

 320-37_A던전의 저주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그의 피를 머금은 붉디붉은 꽃밭은 그 줄기마저 붉었다. 간헐적으로 숨을 내뱉는 입가로 핏줄기가 흘러내려 흰 목을 붉게 물들였다. 고통스러운지 찡그린 미간 너머 만개한 꽃은 그와 제힘에 의해 뭉개지고 찢어져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조여오는 사슬에 짐승이 울음소리를 내며 손아귀에 힘을 주자 짧게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미형의 목소리가 괴로움을 토로하는 그 짧은 단말마는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다웠다.
제 손아귀에 잡혀있는 그는. 검은 짐승인 제 모습과 반대되는 그는, 정말 빛나는 존재라고 송태원은 문득 생각했다.

 영종도에 갑작스럽게 던전이 생겼다는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메라를 바라본 채로 빠르게 문장을 뱉어내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긴장이 섞여 있었다.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고속도로 진입도로에 급작스럽게 생긴 던전으로 인해 7중 추돌의 교통사고가 발생하였으며. 부상자는 급히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도로에서 발생한 특이사항과 높은 급의 던전에 불과 3시간만에 도로는 통제되었고. 경찰과 각성자관리실 인원들이 투입되어 현장 정리 중인 상황입니다. 아직 병원으로 이송된 부상자 중 사망자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이야..이제는 도로에도 던전이 생기고, 여기 도로 우회하면 국비 낭비일 텐데. 위에서 또 뭐라고 하게 생겼네."
 "던전 근처는 반경 몇 킬로미터는 진입 금지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도로잖아. 세금 없다 난리를 치는 와중에 그거 지키겠어. 그냥 3.4킬로  떨어진 곳에 그냥 도로 돌려버리고 말지."
 "아, 거들 그만 떠들고 가서 던전이나 확인해!"
 누군가 고함치는 소리에 뉴스를 보며 수다를 떨던 이들이 급히 몸을 움직였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항상 있는 일이었다. 각성자관리실 직원들의 만성피로를 모르는 이들은 없었으니.

 떠들던 근무 태만인 직원들을 자리로 보낸 사람이 부서진 도로 파편 속에 세워진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
 혹시 모를 유해물질과 피해 규모를 확인하기 위한 임시 부스가 세워진 참이었다. 길게 세워진 천막에는 접이식 테이블 4개가 붙어있었고, 얼기설기 연결된 컴퓨터와 모니터가 책상을 점령하고 있었다.
 제게 경례를 하는 경찰에게 마주 경례를 하고 천막으로 다가온 이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아주 제대로인데요? 무려 S급 던전에다, 도로 한복판이라니. 안 그래도 지금 위에서 피해 인원 확인하라고 난리도 아닙니다."
 "환자들은 모두 제대로 이송 조치된 것은 맞습니까? 필요하면 구조작업에 인력을 더 보태죠."
 여성의 말에 그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무뚝뚝한 남성이 질문했다.
 그의 말에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이미 던전 근처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모두 정리된 참입니다. 일단 급하게 인천카톨릭병원으로 모두 이송되었고요. 보호자로 추정되는 이들에게도 연락이 실시간으로 되고 있습니다."
 "피해 차량은요?"
 "그쪽은 경찰에 넘겼습니다. 급하게 민간 쪽에도 손을 빌려 이동한 덕분이 지금, 던전입구 근처는 제어작업 중입니다. 4시간 안으로 완료 예정인데..."
말끝을 흐리더니 혀를 차고 다시금 한숨을 쉰 여성은 마지못한 말투로 물었다.
 "정말 실장님께서 들어가셔야 합니까?"
 여성의 말에 남성이 대답했다.
 "특이한 상황 때문에 위에서도 빠른 처리를 필요로 하는 상황입니다. 그게 최선의 판단입니다."
 "하여튼 현장은 1도 모르면서 명령만 하는..."
 "하 팀장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하 팀장이라 불린 이는 제 상관의 지적에 입을 다물었다. 새파랗게 젊은 상관이지만 그는 국가기관의 거의 유일한 S급 헌터였고. 본인은 그저 그런 C급 헌터였다.
그가 상대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좀 더 오래 나랏일을 했다는 점이었으나, 바뀐 세상에는 경력보다는 등급이었다.
 주위에서 불편한 기색으로 저를 보는 이들에 하 팀장은 죄송합니다.라 덧붙였다.
던전이 생성되면 현장 정리와 던전보고를 목적으로 경찰과 각성자관리실이 가장 먼저 달려오지만. 해당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공무원들도 의무적으로 배치하기는 했다.
 평범한 공무원으로 보이는 이들은 척 봐도 말단 중의 말단이었지만. 어쨌든 제 편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하 팀장에게 송태원이 말했다.
 "이번에 지원하는 헌터들은 지역구하청 헌터들입니다. 대쉬라는 이름의 소규모 길드로 활동하고 있으며, 빠른 스피드가 장점이라고 하더군요."
 "아, 네 저도 전해 들었습니다. 최대 A급으로 이루어진 팀이라고 합니다. 이전에 A급 던전을 공략하고 나온 적 있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면 괜찮겠군요."
 "안 그래도 던전 생성부터 인명피해가 발생한 시점에서 거대 길드들은 발을 빼고 싶어 하는 눈치입니다. 던전이야 확실하게 처리하겠지만. 잘해도 눈치. 혹여나 조그만 불상사가 생기는 경우에는 그야말로 불나방처럼 달려들 언론을 생각한 거겠죠."
하 팀장은 마저 말을 이었다.
 "정부도 어지간하면 그 피해를 길드에 넘겨 최소화하니, 싫을 법합니다만. 좀 크다 하는 길드들에서 러브콜은 죄다 끊긴 상황이라 오롯이 피해는 우리가 입게 생겼습니다."
한숨 섞인 한탄에 송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빠른 시일 안에 공략하고 나오면 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실장님께서 가신다니 한숨 놓은 상황이지만, 뭐.. 몸 건강히만 다녀오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멀어지는 이는, 비록 공무원이라 던전을 자주 다녔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S급이었으며, 괴수 대신 헌터를 많이 잡아본 이었다.
 멀리서 발악하는 블랙 길드들을 처리하는 그를 보아왔던 하 팀장은 상사를 향한 걱정이 반, 일이 빨리 처리되겠다는 안심 반으로 꽤 심란한 상태였다.
 경찰 쪽 출신이며, 낙하산으로 행정업무를 맡게 된 그에게 미운털이 박힌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제게 주어진 일이 저 어린 상사를 데리고 제대로 된 시설을 운영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하 팀장은 불쾌한 감정을 금방 정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폭탄처럼 쏟아지는 업무량을 꿋꿋이 해내는 상사는 조금 안타깝기도 했다.
 '제 운명인 거겠지.' 갑자기 드는 옛 생각에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자세를 고친 하 팀장은 다시금 뉴스에 집중했다.

 던전 입구 근처에 진입을 허락받은 기자가 주위를 가리키며 도로 상황을 소개하고 있었다. 고속도로는 폐쇄 조치가 떨어졌고 우회도로를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졌다.
 그 이후 후속적인 조치는 모두 선발팀의 던전 공략이 끝나는 대로 시작될 예정이었다.
기자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이 그들이 얼마나 급한지를 보여줬다.
 다가오는 기자의 모습에 같이 걷고 있던 경찰이 찍지 마세요! 라고 소리치며 카메라를 가려대고 있었지만. 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이를 가리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심지어 앞에서 빠르게 걷고 있는 송태원의 뒤를 따르는 개인 길드원들은 카메라를 흘낏거리며 점점 발걸음을 늦추고 있었다. 어떻게든 카메라에 실려 저들 길드를 알리고 싶어 하는 행동에 길드원의 뒤에서 걷던 이가 서두르라며 재촉했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피해 급하게 던전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이들은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던전으로 들고 갈 물건을 챙기던 대쉬의 길드 장이 겨우 B급 짜리 장갑하나만 낀 채로 직원과 얘기하는 송태원을 보고 넌지시 말을 걸었다. 본인은 A급이었지만 장비도 최대 A급 정도를 쓰고 있었기에 송태원도 어느 정도 규모가 큰 장비를 쓸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그... 혹시 챙길 장비 같은 거는?"
 말끝을 흐리며 두 사람을 가르고 묻는 말에 송태원과 각성자관리실 직원이 길드 장을 쳐다보았다. 송태원처럼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차림인 직원이 먼저 대답했다
 "짐 정리는 끝났습니까?"
 길드원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정리한 짐을 살피며 무언가를 작성한 이는 송태원을 보며 말했다.
 "최대 A급 장비로 대부분 강화 쪽 계열입니다. 무기 장비는 11개 정도로 보입니다."
 "아 네, 맞아요. 포션은 20병에.."
 "그건 개인 재량이니 굳이 말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길드원 하나가 멍청히 대답하자 송태원이 말을 잘랐다. 짐 검사가 끝나자 각성자관리실 직원은 송태원에게 잘 다녀오세요. 라고 인사를 하더니 길드원들에게도 눈인사 정도 하고는 던전문을 정비하고 있던 이들을 물렸다.

 멀어지는 이들을 바라보던 송태원은 그들이 철제펜스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제 발밑에 놓인 가방을 들었다. 간단한 보호구는 이미 착용한 것으로 대체하고 가방에는 그저 물과 같은 식품과 포션 몇 병이 다였다.
 던전용치고는 매우 가벼운 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그가 말했다.
 "앞으로 대쉬 길드 분들과 저는 따로 움직입니다. 많이는 안 바랄 테니 중소형 몬스터들 위주로 처리해주시면 됩니다."
 "..네?"
 송태원의 말에 길드원 하나가 벙찐 얼굴을 했다. 길드 장으로 보이는 이는 감정이 상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오래도록 합을 맞춰온 길드일수록 갑작스럽게 타인이 참가한 채로 움직이는 게 약점이 됩니다. 되도록 떨어져서 행동하도록 하죠."
 "그렇지만, 그럼 보스는 어쩌고..."
 "보스의 경우에는 협업이 필요하겠지만. 되도록 적정거리를 유지한 채로 보스 괴수의 시선을 끌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처리하는 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되나요?"
 송태원의 말에 황당한 길드원 하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다 길드 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됐고!, 알아서 한다잖아. 그냥 적당히 몬스터나 처리하다 우리는 돈 되는 거나 주우러 다니자고."
 "던전 부산물의 경우, 모두 회수한 뒤 안전검사를 거친 후에 돌려드릴 방침입니다. 최소 일주일에서 길면 한 달까지..."
 송태원의 말에 길드 장이 확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아니 당기려 했다. 굳건히 발붙이고 서 있는 송태원에 길드 장인 이가 되레 매달린 꼴이 되었지만 그는 꿋꿋하게 송태원의 말을 잘라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아니 그럼 그동안 우리는 굶어 죽으라고? 장난해? 목숨 걸고 나랏일 도와주는데 변변한 대가도 없다고?"
 남자의 말에도 송태원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상대의 손을 잡아 억지로 제가 떨어트렸다.
 힘의 차이를 느끼고, 두려움을 느꼈는지 상대는 씩씩거리면서도 더 덤비지는 않았다.
 "안전검사 이전에 빼돌린 던전 부산물들은 모두 압수되겠지만. 기간만 잘 기다리신다면 길드 쪽에서 찾은 부산물은 모두 당신들 몫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뭐, 기간이 너무...!"
 "또, 이미 계약금은 지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흥정이 가능한 일개 길드원이 아니니. 마음에 안 드신다면 절차대로 신고하시길 바랍니다."
 씩씩거리는 길드 장을 대신해 외친 이의 말을 자르며 송태원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기색을 보였다.
 단단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길드원들이 노려봤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부터 불필요한 소모전은 좋지 않았지만, 단위가 작은 길드일수록 욕심에 눈이 멀기 쉬웠다.
 재차 확답을 듣기 위해 송태원이 물었다.
 "계약대로 하실 겁니까, 파기 하실 겁니까. 던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파기가 가능합니다."
 그의 말에 길드 장이 마지못한 말투로 퉁명스레 말했다. 돈 받았으니 일은 해야지. 그의 말을 필두로 길드원 중에서 정찰 임무를 담당하는 이가 던전속으로 빠르게 진입했다. 송태원을 흘겨본 이들이 모두 던전속으로 들어가자 던전입구를 보호하고 있는 철제문을 걸어 잠근 송태원이 던전안으로 들어갔다. 던전 활성화를 나타내는 센서에 불이 들어오고 벽에는 입구의 흔적이 흐릿하게 지워져 갔다.

 

 던전 입구를 찍고 있는 감시카메라 주위에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펜스가 처져 있었다. 헌터로 구성된 경비가 무리 지어, 걷는 풍경은 척 보기에도 살얼음판이었다.
 겨우 책상 4개를 붙이고 천막을 친 채 만들어졌던 임시부스 옆으로 본부라는 명판이 붙은 컨테이너 1대와 헐리우드 배우들이나 쓸 법한 커다란 트레일러 3대가 주차되어 있었으며 그 안팎으로 사람들이 부산히 돌아다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하 팀장은 제게 내민 머그잔에 얼굴을 찌푸렸다.
 "받으세요, 아메리카노예요."
 "세성은 원두도 직접 갑니까."
 마지못해 머그잔을 받으면서도 잔에 박혀있는 세성의 로고에 혀를 내두른 하 팀장은 커피에 절대 입을 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으니까요?"
 하 팀장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친 상대는 각성자관리실에서도 꽤 잘 알려진 강소영 헌터였다. 긴 머리를 하나로 정돈해서 묶은 채 가죽 재질의 재켓을 입은 그의 모습은 영화배우 아니면 연예인이었다. 그게 그거지만.
 접이식 의자를 끌고 와 하 팀장의 옆에 앉은 강소영은 연신 그의 얼굴을 살폈다. 모른 척 하려 했지만 아예 자리를 잡는 모습에 하 팀장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뭡니까."
 "아... 별거는 아니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네?"
 "송실..송태원 실장님께서 던전에 들어가신 지 벌써 16일째니까요. 걱정하실 것 같아서요."
 "하. 걱정보다는 왜 이제 와서야 세성이 개입하냐. 진즉에 개입하면 좋지 않냐, 같은 소리 기대하시고 오신 것 아니십니까?"
 "뭐- 세성에 안 좋은 소리 하는 이들을 달래는 것도 업무의 하나긴 하죠."
 강소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상대방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질린 얼굴로 바라본 하 팀장은 곧 평상시의 지친 얼굴로 돌아왔다.
 "괜찮습니다. 일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이런 경우를 예상하지 않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예상하셨다고요?"
 지친 기색이 섞인 하 팀장의 말에 강소영이 커피를 마시며 되물었다.
 "최대한 발생 가능한 변수를 생각해두어야 하니까요, 나랏일이라는 게 워낙 많은 사람을 생각해야 하는 거다 보니... 뭐, 덕분에 커피도 마시고 좋죠."
한숨을 쉬더니 강소영 헌터의 잔에 제 잔을 부딪친 하 팀장이 피식 웃었다. 제 눈앞에 있는 헌터는 저보다 훨씬 대단하고 능력이 출중한 이였지만 자신도 실장님 밑에서 하루 이틀있었던 건 아니었다. 세성 대 각성자관리실 팀장으로서의 대화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일주일 내내 못 자서 머리가 미쳤거나.'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는 다짐을 그새 잊어버린 하 팀장은 차가운 커피가 제 머리를 두드리는 느낌을 받았다. 잠시 아무 말 없는 강소영 헌터의 모습을 흘깃 보더니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던전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퍽 지쳐 보였다.
 "송태원 실장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상대를 바라보며 강소영 헌터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말없이 던전 쪽을 바라보던 상대가 입을 열었다.
 "...세성 길드장님도. 괜찮으실 겁니다. 잘은 모르지만 워낙 유명하신 분이시고....던전 안에는 실장님도 계실 테니까요."
 중얼중얼 내뱉는 말이었지만. 강소영 헌터에게는 한 글자 한 글자 빠지지 않고 잘 들렸다.
 7월. 가라앉는 해 위로 짙은 푸른색의 하늘이 깔려 있었다. 좀만 더 가면 갯벌이라더니 짠 바닷냄새가 나는 듯하여 강소영 헌터는 조금 웃었다.

 송태원 실장과 길드 대쉬가 들어간 던전은 예상 공략 기간 6일을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보통 하루, 이틀은 넘은 적이 있었기에 각성자관리실에서도 송 실장의 늦어지는 귀환을 기다릴 겸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사설 길드에 연락을 취해놓았다.
 이전처럼 최대한 많은 길드에 연락을 취해 놓는 게 아닌, 송태원 실장이 던전 공략에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 그 급에 맞는 길드에만 연락을 취해놓았다. 그 말인즉슨 각 길드 장들에게 연락을 취해놓은 것이었다.
 8일. 9일이 넘어가며 던전공략 실패 쪽으로 의견이 모이는 중이었고, 결국 하 팀장은 송태원 실장의 사망보고서를 미리 준비해놓을 수밖에 없었다. 후속 팀이 던전에 투입되어 시체라도 찾아주면 다행인 상황이었다.
 송태원 실장을 대신해 업무를 처리하던 하 팀장에게 연락이 온 길드는 세성, 한곳이었다.
 그 콧대 높기로 유명한 길드 장이 직접 인천 고속도로에 있는 임시부스를 방문해 준 것이었다.
 웃는 낯으로 이것저것 핀잔을 주더니, 세성 길드 장은 곧 세성에 한껏 유리한 제안을 내놓았고. 우두머리가 없는 각성자관리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세성에서 미리 손을 써두었는지, 아니면 S급이 실패한 S급 던전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지 타 길드에서는 끝내 연락이 오지 않았다.
 10일이 되는 날에 세성에서 투입된 현장 팀이 자리를 잡았으며. 11일에는 사라졌던 던전문이 출입이 가능한 상태임을 확인하게 되어 혹시 이전 팀이 공략을 마치고 나왔을지 몰라, 던전 주변에서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느라 꼬박 이틀이 지났다. 사람은커녕 던전에서 기어 나온 괴물의 꼬리 하나도 보이지 않자. 결국 14일에 두번째 던전 공략팀이 출발하게 되었다.
 세성 길드 장과 유명 헌터인 강소영헌터, 유도환 헌터. 그리고 몇 번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헌터들로 구성된 팀은 곧 와해되었는데, 던전을 살피기 위해 먼저 들어간 세성의 길드 장. 성현제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닫혀버린 던전 문 덕분이었다.
 뒤로 길드원 여럿을 남겨두고 혼자 던전에 들어가게 된 길드 장의 상태에 각성자관리실은 세성의 강압적인 조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각성자관리실 쪽에서도 몰랐던 사실임이 밝혀지고 공동 조사 체계로 돌아간 것이 바로 송태원 실장이 던전에 들어간 지 꼬박 16일째 되는 오늘 아침이었다.

 


 "길드 장님!!! 길드 장님!!!"
 "이게, 무슨!!! 길드장님 나오세요!!"
 몇 걸음 걷던 성현제는 저를 부르짖는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보통 선두주자가 들어가고 나서 몇 분 뒤에 들어오는 경우였기에 길드원들이 알아서 따라오리라 생각했던 성현제는 닫히는 던전문 밖에서 허우적거리는 여러 팔을 바라보았다.
 제가 들어오는 순간에 이미 닫히기 시작했는지, 던전 입구에는 급하게 길드원들이 던져놓은 비상식량 가방이 떨어져 있었다.
 경악에 찬 목소리는 제 옷조각을 잡으려 혈안이 되어있었기에, 급히 던전 문 쪽으로 다가가 팔을 뻗어보았지만. 저는 이미 던전 안으로 인식되었는지 딱딱하게 부딪히기만 할 뿐이었다. 닫히는 문 너머로 저를 향해 손을 뻗는 이들의 팔이 잘리지 않게 밀어주며 성현제는 한숨을 쉬었다.
 무려 그 송태원이 이 던전에서 사라진 것이다. 막연하게 제가 죽으면 그 터는 던전 안 일 것이라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워낙 현실감 없는 일이었기에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송태원의 터가 된 던전에 제가 들어와 있다.'
 성현제는 거세게 머리를 털어 생각을 지워냈다. 던전은 원래 상상도 못할 일들로 가득한 곳이다.
 닫힌 던전문을 한번 보고, 성현제는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들었다. 이미 제가 챙긴 포션과 비상식량만으로도 던전을 공략하기에는 충분했지만. 넘쳐서 부족할 상황은 아니었다
 검은색의 텐트 천으로 제작된 긴 가방에는 여러 무기가 들려있었다. 그중 유명우 헌터가 제작한 창을 찾은 성현제는 그것과 여분의 총기류만을 남긴 채 모조리 쏟아내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값비싼 무기들이 수북이 산을 이뤘지만. 성현제는 미련 없이 일어났다. S급 포션이 들어 있는 슈트케이스는 사슬로 멀찌감치 들어 올린 그는 던전 안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 던전은 거대한 식물로 휘감겨진 모양새였다. 반쯤 무너져내린 기둥 같은 모습에 성현제는 점점 제가 던전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밑동만 남은 기둥에서, 반쯤 거대 식물에 휘감겨진 벽. 등 무너진 건물 잔해를 보니 흡사 아포칼립스 세계로 들어온 듯 했다. 그렇게 제 앞을 막는 식물 줄기를 사슬로 잘라가며 이동하던 중에 성현제는 빠르게 움직이는 생명체를 느낄 수 있었다.
 워낙에 빨라 시야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살기를 가지고 제게 접근하고 있었기에,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던 성현제는 가방에서 창을 꺼내 들었다.
 이미 전 공략팀에 의해 시간은 많이 소비되었다. 게다가 각성자관리실의 판단오류로 던전에서 나온 생명체를 찾겠다는 명목으로 이틀이나 날려버렸다. 귀찮은 사건·사고가 덕지덕지 붙은 이번 던전은 최대한 빨리 공략해야 했다. 무엇보다 앞으로 어떤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몬스터 하나하나 잡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 치고는 타닥- 타닥- 하는 단조로운 소리만 나는 것을 보아, 고작 한 마리의 몬스터였다.
 이 빌어먹을 던전은 출입도 한 명만 가능하더니, 몬스터도 하나씩인가. 성현제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움직이는 몬스터를 응시하더니 빙글빙글 주위를 돌던 몬스터가 제게 달려들기 직전에 바로 창을 던졌다. 창을 던지고 사슬을 감아 저를 향해 쩍 벌린 입아귀에 관통하도록 힘을 주었다.
 둔탁하게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며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간헐적으로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보니, 죽지는 않았음에 성현제는 소리를 지르는 괴수를 미끼로 다른 몬스터들을 유인하려 했다.
 근처 풀숲에 크게 세워져 있는 벽 뒤로 몸을 숨기며 다른 생명체의 움직임에 기척을 세우고 있기를 약 10분. 쥐새끼도 지나다니는 기척이 없음에 몸을 일으킨 성현제는 푸르스름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약 5분간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니, 새는 고사하고 곤충 한 마리도 보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생명체가 없는 던전인건가...' 우거진 숲속을 노려보며 성현제는 생각했다. 이 정도로 울창한 숲속에 생명체가 없다는 것이 퍽 이상했던 성현제는 제가 잡은 몬스터가 있는 창에 연결된 사슬을 잡았다.
 생명체였으면 충분히 구워졌을 정도로 세게 번개를 내려친 성현제는 사슬을 따라 천천히 다가갔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점점 탄내가 진동을 해왔다.

 검게 그을린 생명체는 스핑크스를 연상시켰다. 그 크기가 작아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관과 날개가 발달한 모양새로 보아, 발자국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덩굴에 날개가 부딪쳐서 나는 소리였던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행이 주류인 생명체가 왜 이런 던전에 저렇게 불편하리만치 커다란 날개를 가졌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이 던전은 들어오는 순간부터 계속 이상함의 연속이었다.
성현제는 몬스터의 머리 부분을 사슬로 세게 묶었다. 곧이어 창에 연결된 사슬이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관통된 머리에서는 다시금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창을 물리자 성현제의 앞에 몬스터 처치 창이 떠올랐다.

시스템1.png

 세글자의 이름과 함께 보상으로 떨어진 것은 성현제가 사는 세계에 쉽게 볼 수 있는 가방이었다. 뒤틀린 불안함이 제 몸 안에서부터 휘몰아쳤다.
 굳은 얼굴로 성현제는 가방을 툭 쳤다. 반쯤 열려있었는지 A급 자리 포션이 데굴데굴 굴러 발치에서 멈췄다.
 익숙한 포션의 인공적인 붉은색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검은색의 반질반질한 구두 앞코에 비친 포션 병에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로고가 박혀있었다.
한국 각성자관리실의 인증마크가 자리하고 있는 포션은 유명 길드에서 제작한 포션이었다.
 성현제는 포션 병을 밟았다. 강한 S급의 힘에 포션 병은 포삭하며 힘없이 부셔져 내렸다. 두근거리는 북소리가 귓가에 크게 메아리쳤다. 성현제를 감싼 사슬이 위협적으로 일렁였다.
 "하-..."
 짧게 한탄 서린 목소리를 내뱉은 성현제는 다시금 처치 창을 바라보았다. 어딜 봐도 익숙한 소품들이 마치 저를 놀리는 듯했다. B등급 헌터. 웃기지도 않는 던전 이름 아래로, 붉게 빛나는 사망 글귀가 저를 놀리는 듯 했다.
 성현제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가라앉은 시선으로 땅에 무릎 꿇고 앉아 급하게 포션 병을 뒤적거렸다. 제 손에 잡히는 모든 포션 병을 뚜껑조차 열지 않은 채로 손아귀에서 부셔버렸다. 이미 검게 탄 시체는 포션을 부으면 부울수록 점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입부터 머리 뒤쪽이 관통된 채 상반신이 다 불태워진 이는 아마 고통은 짧았을지도 몰랐다.
 시체의 벌어진 입안으로 깨트린 포션을 들이붓는 성현제는 무언가에 쫓기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이미 숨이 멎은 이는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가방을 뒤적거리던 성현제는 빈 가방에 퍼뜩 꿈에서 깬 표정을 지었다. 제가 뒤적거린 가방은 보상으로 나온 가방이었다. 아마 못해도 10일 치의 포션을 시체에 쏟아버린 것이었다.
 "포션을 들고 있던 것 봐서는 수집조였고. 그래서 손과 발이 빠른 이였을 테고, 던전에서 생성된 생명체가 아니라 강제로 변형된 생명체이니... 그래서 이런 덩굴 안에서 커다란 날개를, 가진 형태로..."
 시체를 바라보며 성현제는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가장 먼저 나온 건 등급이...B라서겠지."
 한참을 그렇게 시체를 바라보던 성현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 주위를 둘러보니 덩굴에 먹힌 기둥과 벽들이 보였다. 그 모양새를 바라보던 성현제는 급기야 무작정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사슬이 빠르게 정면의 덤불을 자르고 치워냈다.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간 성현제의 앞으로 높다란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천천히 속도를 줄여 낭떠러지의 앞에 선 성현제의 앞으로 거대한 도시가 보였다. 아니, 식물에 잡아먹힌 도시의 모습은 퍽 익숙한 모양새였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전에까지 제가 서서 던전으로 들어왔던.
 인천의 한 고속도로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고속도로의 끝으로 계속해서 긴 도로가 연결되어있었고. 그 주위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들도 모두 그대로였다. 그저 식물에 잡아먹혔을 뿐.
 성현제는 눈앞의 광경을 끔뻑끔뻑 바라보았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던전안의 세계는 마치 멸망한 대한민국의 모습과 같았으므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이를 악물며 성현제는 제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았다. 벌써 12명째였다. 일대 길드 하나를 전부 처치한 격이었다.
 제 사슬에 묶여 푸드덕거리는 몬스터를 향해 권총의 탄창 부분을 휘두르자 퍽- 하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기절했다. 이미 두 명을 죽음으로 보낸 후였다, 처음이야 몰라서 그랬다 쳐도 두 번째 존재를 생포한 후에 처치 창이 뜰 때까지 (상대가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는 것은 아무리 성현제라고 해도 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고문당하는 이 앞에서 고통을 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웃긴 일이었다.
 두 번째로 생포한 B급 헌터를 전기로, 사슬로 고문하며 알아낸 정보는 겨우 두 가지였다.
 죽기 직전, 혹은 상태가 죽는다고 생각할 정도까지 공격을 해야 처치로 인정된다는 것. 그마저도 몬스터로 변한 이와는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아 상대의 상태를 살피며 적당한 공격을 해야 한다는 것. 점점 높아지는 등급에 A급 헌터의 살기를 전면으로 받은 채로 적당한 공격을 한다는 것은 거의 50대 50의 도박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지만 성현제는 해내었다. 특유의 예민함으로 상대를 어떻게든 속박해 천천히 공격을 해대다 보면 들려오는 비명이 괴물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아득해지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알게 된 것은, 죽기 직전에 헌터가 알려준 정보였다. 급소를 피해 찔렀으나 출혈이 너무 심해. 결국, 사람으로 돌아오고 포션을 뿌린지 20분 이내에 사망해버린 헌터의 유언이었다. 살고 싶다고 매달리는 이와 제 가족과 애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상대를 달래고 얼러 겨우 알아낸 정보로는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식물 형태의 보스 몬스터와 마주쳤다는 점이었다. S급과 A급 헌터가 있었음에도 당한 걸 봐서는 아예 던전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무리 뛰어난 헌터들이라고는 해도 시스템에 전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무리였다.
 죽어가는 이에 제 목숨과 앞으로 만나게 될 이들의 목숨을 저울질하며 포션을 손에 쥔 성현제는 이를 악물었다. 제가 멍청이처럼 이미 죽은 시체위에 포션을 들이붓지 않았더라면 죽어가는 헌터를 위해서 쓸 수 있는 포션이 조금 더 남아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고, 성현제는 두 번째 시체를 정돈하고는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유독 비행형 몬스터가 많아 활동반경이 넓은 것도 꽤 걸리적거렸다. 공격을 하긴 하나 조금이라도 다치면 바로 저 멀리 도망가버리니 이번 상대는 꼬박 하루를 걸려 던전을 뒤지고 나서야 다시 잡을 수 있었다.
 덕분에 종일 던전을 뛰어다닌 꼴이 된 성현제는 기절한 몬스터 옆으로 몸을 기대었다. 차가운 시멘트벽의 한기가 오히려 반가운 정도였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던 성현제는 이번 몬스터는 부디 겁이 많아 몇 번 위협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죽었다고 인식하기를 바랐다.
 그게 저와 상대에게 가장 좋은 일이었다.

 이번에도 몬스터의 한쪽 날개를 부숴놓아야 처치 창이 떠올랐다. 몸에 가득 남은 상처 외에 날개 하나까지 못 쓸 정도였으니 분명히 다리 한쪽은 꽤 오랫동안 못 쓸지도 몰랐다. 몬스터로 변하면서 생각하는 것도 몬스터로 변했는지 그들은 목숨이 붙어있는 한 꽤 질기게 공격하곤 했다.
 몸이 지치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지치는 게 어떤 건지 확실히 느끼며 성현제는 처치 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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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색으로 깜빡이는 생존 글귀에 한숨을 쉬며 성현제는 제 사슬을 잘라내었다. 단단히 묶은 사슬 채로 몬스터를 버려둔 채로 그의 주위에 B급 포션 병 하나를 내려놓았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올 터였다. 그렇다고 해도 저 정도의 부상으로는 제대로 걷지도 먹지도 못할 테니 성현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최대한 빨리 던전을 깨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던전에 진입한 13명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는 몬스터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규모도 작고, 매우 특이한 유형이라는 것만 빼면 거의 A급에 가까운, S급 던전인 점이 대단히 기꺼운 상황이었다.


 성현제는 정신적인 피로함을 느끼며 폐건물에서 멀어졌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은 영양바 하나를 입에 털어 넣은 그는 어두워지는 하늘에 어제부터 머무르고 있던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제가 S급이어도 24시간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다. 최소한의 희생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현재로서는 제일 멀쩡할 자신이 제정신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13번째 몬스터. 아마.. S급인 각성자관리실 송태원 실장일 몬스터를 해치우게 되면 보스가 나타날 터였다. 어쩌면, 보스보다 송태원 실장과 싸우는 전투가 더욱더 힘들지도 몰랐다. 그래도, 끝까지 제가 해치워야 던전에 버리듯 놓고 온 이들을 현실로 돌려 내보낼 수 있었다.
 새삼 무겁게 짓누르는 세상의 무게에 성현제는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매번 웃고 있던 얼굴이 자동으로 입꼬리를 올렸지만, 그다지 오래가지는 못했다.

 던전에서 혈혈단신으로 야영한다는 것은 꽤 많은 두려움을 야기했다. 감정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보다는 지쳐 방심하게 될 자신을 향한 두려움이었다.
 성현제는 은거지로 삼기 시작한 건물의 1층 로비의 사슬로 지은 해먹 위로 뛰어올랐다. 흔들리는 해먹에 앉아 두 다리를 흔들며 가만 생각에 잠겼다. 그의 은거지는 그가 들어오자마자 온통 사슬로 감겨있었다. 얼기설기 섞여 있는 사슬은 누군가가 들어오면 소음을 낼 것이 분명했다.
 소음 외에도 어차피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한다면 바로 잠에서 깰 것이 분명했다.
 '몬스터 두 개…. 아니, 사람 한 명과 몬스터 한 마리. 금방 끝나겠어.' 해먹 위로 털썩 누우며 성현제는 생각했다. 쉽사리 오지 않는 잠에 억지로 잠을 청하며 성현제는 밖에서 저를 기 다리를 이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제가 구해줄 것이 분명한 이에게 무엇을 달라고 할지도 깊게 생각했다.

 성현제가 4층짜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안 지나서 검고 커다란 존재가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흔적이 전혀 남지 않는 존재는 흰 동공만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 소리 없이 건물 근처까지 다다른 네발짐승은 곧 벽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건물 위에서 바닥을 한참 바라보던 짐승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다시금 아래로 벽을 타고 내려갔다.
 마치 쥐가 벽을 갉아먹는 듯한 소리에 성현제는 눈을 떴다. '쥐가 있을 리가.'
해먹을 손으로 쥐며 성현제는 상체를 일으켰다. 갉는듯한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벽인지, 천장인지 천천히 주위를 살피는 행동이 소리가 멈추자 따라 멈췄다.
소리가 멈춘 지점은 바로 옆 벽이었다. 숨소리조차 죽인 채 벽을 바라보고 있던 성현제는 곧바로 사슬로 제 몸을 감쌌다.
 쿵- 하며 콘크리트가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귓가에 때렸다. 저를 향해 날아오는 파편들을 사슬로 어떻게든 막아내며 성현제는 달렸다. 제 뒤를 쫓아 달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뒤돌아볼새 없이 그저 감각만으로 뒤를 향해 사슬 끝을 휘둘러대었지만, 허공만 휘저을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식물에 잠식당한 건물이 무너진 벽으로 인해 이상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 쿠르릉- 거리며 거대 괴물이 소화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유리문들이 위에서 누르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조각나고 있었다. 입구 쪽을 봉쇄해놓은 사슬을 풀며 제 뒤쪽을 방비하며 달리던 성현제는 해먹 쪽에 있던 가방을 생각해내고 사슬을 뻗었다.
정확한 위치를 알기 위해 뒤로 돈 순간 커다란 몸뚱이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부딪힐 것을 알고 있었으나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가방을 잡기 위해서는 어둑한 시야 너며 형체라도 바라봐야 했으니.
 큰 충격과 함께 작은 몸집이 건물 밖으로 튕겨 나갔다. 맞은편에 있던 건물의 유리창을 깨트리고 매장의 진열대에 부딪힌 다음에야 멈춘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제 쪽으로 끌어당긴 사슬 끝에는 겨우 무기가 방이 달려있었다.
 낭패감에 성현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쪽 어깨를 희생해 얻은 것이 애초 목표였던 포션 가방이 아닌, 무기가 방이었다. 처음 세성 길드원들이 던져준 수트케이스에 들려있던 고급 포션들. 그게 없으면 S급이나 되는 몬스터를 죽지 않을 정도로 생포하는 게 어려운 예정이었다.
 제 앞으로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렸고, 성현제는 어둑한 어둠 속에서 저를 노리는 몸집을 피하고자 힘껏 뒤로 멀어졌다. 뒤에 있던 벽에 등을 부딪치자 금세 좌측으로 달렸고, 바로 뒤로 금이 간 벽이 큰 소리와 함께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구역을 나뉘기 위한 벽이었는지 건물이 휘청이지는 않았으나 계속 이렇게 건물 안에서 싸우는 것은 제게 좋지 않았다. 콘크리트에 몸을 부딪쳐버리는 정도라면 저를 공격하는 존재보다 제 몸뚱이가 먼저 고장 날 것이 뻔했다.

 건물 입구 쪽을 향해 달리며 괴물을 붙잡기 위해 트랩을 설치하듯 사술을 둘렀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 뒤로 무언가 육중한 힘에 의해 사슬이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대충 설치한 것으로는 턱도 없다. 이건가 S급은 S급이다 이거지.' 성현제는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제가 왔던 길을 더듬어 최소한 벼락이라도 내려칠 수 있는 넓은 평지로 가야 했다. 건물들이 많은 대도시에 숨어서 밤을 보낼 생각이었으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폐허가 된 도시는 너무나 어두웠다. 같은 S급끼리의 싸움에 시각을 잃은 점은 꽤나 불편했다. 게다가 건물 안에서 벼락을 치기에는 벼락을 흐트러트리는 방해물이 너무나도 많았다.
건물 입구로 뛰어가자마자 바로 옆 골목으로 들어간 성현제는 다급한 손짓으로 무기 가방을 뒤적거렸다. 부딪힌 어깨가 걸리적거렸으나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가방 안에서 기다란 창만을 꺼낸 채 가방을 버려두고는 사슬 위로 뛰어올랐다.

 사슬에서 벗어나 한발 늦게 건물 밖으로 튀어나온 존재는 거대했다. 생김새는 고양잇과의 모습이었으나 그 크기는 사자나 호랑이를 훨씬 뛰어넘었다. 온통 검은 피부에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존재는 다시금 흰 동공을 뒤룩뒤룩 굴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작게 으르렁거리며 먹잇감을 찾던 괴물은 땅바닥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사슬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온통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는 달빛이 유일한 안식이었으나 사슬은 스스로 연약하고 포근한 빛을 내고 있었다.
 괴물은 홀린 듯 빛을 두꺼운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반짝였다 사라지는 사슬을 한참 바라보던 괴물은 곧 사슬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먼저 평야에 자리를 잡아 괴물을.. 아니 송태원을 붙잡아야 했다. 성현제는 저 멀리 보이는 괴물의 온통 검은 모습을 보고는 그가 송태원이 맞음을 직감적으로 눈치채고 있었다. 송태원이야 고지식하게 맞서 싸워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붙잡는 순간 바로 저나 송태원, 둘 중 하나가 큰 부상을 당할 터였다. 제가 부상이 덜해야 다친 송태원을 고쳐줄 테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넓은 광장 한가운데에서 사슬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공간의 정 중앙에 창을 세게 박아 넣었다. 가운데로 유인해 벼락을 내려쳐 잡을 예정이었으나, 그가 가지고 있는 스킬이 유독 걸렸다. 제 벼락을 어느 정도 무효화시킬 수 있을지 몰라 그 강도를 결정하는데 꽤나 고심해야 했다.
 창의 끝에 발을 올린 채 서 있던 성현제는 저 멀리 늘어뜨려 놓은 사슬의 빛에 어둑한 형체가 붙은 것을 확인했다.
 벼락으로 안되면. 한가운데로 몰릴 송태원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사슬로 붙드는 수밖에 없었다. 거세게 저항한다면 다리 정도는 부러뜨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성현제는 늘어뜨려 놓은 사슬에 전류를 세게 흐르게 했다. 번쩍하며 도시를 밝히는 빛줄기에 괴물은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밝은 데서 보는 그 모습은 새삼 거대했다.

 곧 멀리 떨어져 있는 성현제를 발견한 괴물이 건물들 속으로 몸을 숨긴 채 달려왔다. 사슬을 다시 거두며 성현제는 타이밍을 재었다. 괴물이 창에 다가오는 순간 저는 물러나며 벼락을 내리칠 예정이었다.
 바로 뒤쪽에서 튀어나오는 공격에 성현제는 오른쪽으로 급히 몸을 움직였다. 크게 휘둘러진 발톱에 귓불이 찢겨 떨어져 나갔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다시금 제 쪽으로 몸을 트는 상대를 향해 벼락을 내려쳤다. 창을 피뢰침 삼아 직선으로 곧게 떨어진 벼락은 한순간 시야를 점멸시킬 정도였다. 하얗게 번지는 시야 너머 저를 향한 공격에 성현제는 다른 사슬로 급히 몸을 움직였다. 창이 박혀있던 땅이 검게 타버린 채 곳곳에 불꽃이 필 정도의 벼락이었으나 송태원에게는 제대로 먹혀들어 가지 않은 상황인 듯 했다.
 저를 따라 사슬에 올라타 발톱으로 사슬을 마구 잡아당기며 다가오는 괴물의 모습은 야차와 다름없었다.

 최대한 거리를 두며 아슬아슬한 곡예를 이어가던 성현제는 송태원을 향해 두껍게 사슬을 휘감았다. 부지불식간에 공격하는 사슬의 모양새에 균형을 잃은 송태원은 곧 땅으로 떨어졌다. 사슬에 걸려 제대로 착지하지 못한 채 등을 크게 부딪침 이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었다.
 비명 지르는 괴물의 다리를 사슬로 묶으며 성현제는 송태원의 다리 한쪽의 힘줄을 공격했다. 세게 살갗을 뚫고 들어가는 사슬에 송태원이 휘청거리며 넘어졌고 사슬을 당기는 힘에 성현제가 쳐놓은 거미줄 사슬마저 뜯겨나갔다. 급하게 사슬을 늘려보았지만,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성현제도 땅 쪽으로 추락했다. 제 손목에 사슬을 감고 떨어지지 않도록 했지만, 사슬을 박아놓은 건물의 외벽이 뜯어지면서 커다란 시멘트가 그를 덮쳤다. 다시금 급하게 몸을 빼다 말고 상반신에 제대로 부딪힌 성현제는 큰 비명을 입안으로 삼켰다. 상처를 입은 어깨에 또다시 시큰거리는 고통이 느껴지며 팔을 움직이는 게 힘들어졌다. 급하게 사슬로 벽을 부숴 잔해에 깔리는 불상사는 없었으나 매캐하게 올라오는 시멘트 가루에 콜록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송태원을 붙잡은 사슬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다잡았으나, 세게 누르는 압력에 밀려 점점 제 쪽으로 향하는 발톱은 금방이라도 눈앞을 할퀼 지경이었다. 신체의 한쪽이 잘려 나가지 않으면 다행일 상황에 성현제는 뒤쪽으로 몸을 피하며 괴물의 발을 향해 사슬을 움직였다. 짐승의 발 정중앙을 관통한 사슬에 비명을 지르는 괴물이 제대로 스킬을 쓰지 급기야 관통된 발로 주변 건물을 부수는 송태원에 성현제의 주위로 다시금 크고 작은 돌덩어리들이 떨어졌다.
 큰 덩어리들을 향해 사슬을 휘두르던 성현제는 다시금 저를 공격하는 움직임에 급하게 몸을 틀었다.
 거짓 없이 계속해서 부딪히는 공격을 미리 알고 막아도 제가 할 수 있는 공격의 범위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애초에 괴물로 변한 이와 인간인 저의 체격 차가 큰 탓일지도 몰랐다.
 사슬을 끊고 몸을 일으키는 송태원을 새로운 사슬로 붙잡으면서 어쩔 수 없이 송태원의 목에 사슬을 둘렀다. 죽지 않을 만큼만. 딱 숨이 막혀 기절할 정도로만 힘을 주며 성현제는 땅에 발을 딛고 섰다.
 숨이 막히는지 혀를 내밀은 채로 컥컥거리며 바닥을 긁던 송태원은 급기야 발악하며 몸을 일으켰고, 성현제는 몸을 구속하던 사슬은 내팽개친 채 목을 조이고 있는 사슬을 추가했다. 저를 향해 크게 휘두르는 발톱을 피해 뒤로 몸을 물리던 성현제는 뾰족한 철근 콘크리트에 부딪히기 직전에야 멈출 수 있었다. 일부러 이쪽으로 유인한 건지 아닌 건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 학습은 되는지 송태원은 성현제를 공격하기 위해 건물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건물 잔재 등으로 인한 부상은 전투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본인의 부주의였기에 가능한 상처였다. 날카롭게 잘린 철근의 바로 앞에 서서 사슬을 더욱더 조이듯 움직이자 송태원이 발악하듯 몸을 벌떡 일으켜버렸다. 순간적으로 세게 조여지는 사슬에 급하게 힘을 풀은 성현제는 제 쪽으로 주둥이를 내밀며 날카로운 이로 물어뜯으려는 송태원을 피해 다시 뒤로 몸을 움직였고 제 옆구리를 후벼파는 철근에 이를 악물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는 곳곳이 창이 되어 그들을 공격했다.
 몸을 크게 움직이며 발악하는 송태원을 향해 두 앞발을 다시 사슬로 고정하자 날카로운 이빨이 금세 사슬을 물어뜯어 버렸다. 천천히 철근에서 몸을 물리며 상처를 손으로 붙잡은 성현제는 송태원의 입가를 세게 사슬로 고정했다.

 사슬을 풀기 위래 발톱을 세우는 발이 사슬과 함께 스스로의 주둥이를 긁어내렸고, 자신을 상처 내는데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태도에 질린 성현제는 급히 몸을 물렸다.
 최상의 상태로 싸워도 이길까말까 한 상대를 지금 이 상태로 공격하는 것은 버거웠다.
멀리 떨어져 정비한 후에 공격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에 성현제는 상처를 막던 손까지 들어 올려 사슬을 손에 쥐었다. 송태원의 주둥이를 붙잡고 있던 사슬을 끌어다 발악하는 송태원을 그대로 건물에 꽂은 성현제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땅에 박혀있는 창을 사슬로 챙겨 든 채로 무너진 건물 잔해 위를 넘어 도시에서 벗어나는 방면으로 달렸다. 밤의 도시는 제게 너무나 장애물이 많았다. 괴물은 콘크리트에 박혀도 멀쩡한 방면 저는 자잘한 부상이 계속 느는 꼴이었다.

 뒤에서, 건물을 빠져나와 입을 막고 있는 사슬을 뜯어낸 송태원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정신을 차린 송태원에 성현제는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건물 위를 건너다니던 사슬을 아래로 내려 저와는 반대쪽으로 사슬을 늘려 전류를 흘렸다. 불빛에 홀린 송태원이 사슬을 따라 움직이도록.

 점점 동이 터오며 성현제는 다급한 걸음으로 적당한 자리를 찾으려 돌아다녔다. 건물이 우거진 도시에서 벗어나 거대한 식물들이 가득한 평원 쪽에 다다랐다. 옆구리를 후벼판 상처를 세게 누르며 지혈하던 성현제는 덤불 속으로 숨어 들으며 코트의 허리띠를 잡아당겼다. 허리띠로 상처 부위를 동여매며 주위를 살피던 그의 근처에 괴물이 나타나 헤집고 있었다.
 꼬박 반나절을 쫓긴 추격전에 날이 밝아오자 사슬의 빛은 더는 송태원을 교란하지 못했다.
 급기야 사슬에서 떨어져 성현제를 찾던 송태원은 그 큰 몸으로 건물을 부수며 성현제를 찾아다녔고 대략 한 시간 전쯤에는 뒤가 밟혀 다시 쫓기는 신세였다.
 발톱에 찢기었던 귀는 어느 정도 아물었지만, 어깨와 옆구리는 큰 부상이어서 그런지 회복 속도가 생각보다 더뎠다.
 급히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낸 성현제는 절반을 비워내었다. 조금씩 상처에 살이 오르자 몸을 일으킨 그는 송태원이 하는 짓을 살폈다.
 온갖 꽃과 덤불로 우거진 평야에서 송태원은 숨은 쥐를 찾듯이 이곳저곳을 헤집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덤불을 헤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성현제는 창을 세게 쥐었다. 전류가 안 통한다면 결국 꿰뚫는 수밖에 없었다. 스킬보다는 물리적인 공격만 먹히는 듯하여 성현제는 기척을 숨긴 채 덤불에서 나왔다.
 송태원의 뒤에서 멀찍이 선 성현제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창끝에 사슬을 매단 채로 저를 눈치챈 송태원이 몸을 뒤돌자마자 있는 힘껏 던졌다. 사슬이 이끄는 방향대로 날아간 창은 송태원의 복부에 세게 박혔다. 비명을 지르는 괴물을 향해 성현제는 다시금 사슬로 공격했다.
 네 다리를 관통한 사슬이 땅에 박히며 송태원을 고정했다. 목을 졸렸던 상처에 다시금 사슬을 두르자 괴로운지 괴물이 끔찍한 소리를 내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성현제는 다리에 박힌 상처에 다시금 벼락을 쳤다. 미친 듯이 벼락을 내리치면, 언젠가는 제대로 구워지겠지.

 평지에 내리꽂히는 벼락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다. 스스로가 지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벼락을 내려치던 성현제는 다급히 손을 멈추었다. 검은 괴물에게서 비릿한 내음과 함께 탄내가 섞이기 시작했다. 성현제는 다급히 괴물의 배에 꽂힌 창에 다시 벼락을 내려쳤다. 큰 소리 내며 떨어지는 벼락에 다가가며 제가 반쯤 패놓은 상대를 살피기 위해 다가갔다. S급이니 어지간해서는 죽지야 않겠지마는 그를 이런 상태로 만들어 놓은 것은 자신이었다.
 간질거리는 기분에 얼굴을 구기며 아파트 4층 높이는 될법한 괴물에게 다가가며 성현제는 인벤에서 남은 포션을 꺼냈다.
 죽기 직전 꼴딱꼴딱하는 상태라면 급하게 포션을 부어야 했다. 비록 살아난 송태원이 다시금 저를 공격할지라도.


 굳어 서 있는 괴물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나마 사슬에 꿰어져 있어 넘어가지 않은 듯했다. 가장 상처가 클 배 아래로 다가간 성현제는 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힘을 주어 창을 잡아당기기 무섭게 크르릉- 거리며 저를 향해 주둥이를 들이미는 송태원을 피하기 위해 움직였다.
 꼬리도 달려있었는지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꼬리가 저를 향해 휘둘려졌다. 성현제는 늦은 밤에 저를 공격한 송태원의 발이 어쩌면 저 꼬리였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제 팔을 거세게 붙잡는 꼬리를 뿌리쳤지만 손목 부분이 붙잡혔다. 가시를 제 손바닥에 박아넣는 느낌에 성현제는 비명을 지르며 포션 병을 세게 쥐었다. 파삭하며 유리병이 깨지고 제 손에 남은 액체를 꼬리가 박힌 손바닥에 가져다 댔다. 가시가 박혀있는 상태로 살이 차오르는 느낌은 끔찍했다.
 가시를 붙잡고 제 손바닥에서 끄집어내다 휙- 하니 몸이 들렸다. 근처 땅에 패대기쳐 단단한 덤불에 세게 부딪힌 성현제는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어 시선을 맞추려 노력했다.
 머리가 세게 부딪혔는지 윙윙거리는 이명이 들렸다. 깊게 팬 덩굴로 보아 멀리도 던져진 듯 했다.

 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사슬을 끊으려는 듯 움직이는 괴물의 아래로 피가 한 뭉텅이 떨어졌다.
 인벤토리에 들어있던 포션들도 대부분 사용한 뒤였다. 송태원에게 자잘한 상처가 늘면 늘수록 그를 구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나뭇가지인지 덤불인지에 긁혔는지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옷으로 대충 피를 닦아내며 성현제는 다시금 괴물을 노려보았다.
마지막 공격으로 세게 두들겨 눕히고 포션을 붓는 수밖에 없었다. 이다음의 보스라면 보자마자 바로 구워버리는 될 일이었다. 오히려 시간을 끌수록 제게 불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송태원 쪽을 향해 달렸다. 송태원은 사슬을 반이나 뜯은 채로 성현제를 향해 꼬리와 이빨을 내보였다. 꼬리의 움직임을 피해 사슬로 꼬리를 붙잡아 땅에 처박아 두고 저를 향해 크게 벌리는 주둥이를 사슬로 감싸며 입 위로 뛰어올랐다. 가까이 다가간 송태원은 반질반질한 검은 털로 뒤덮인 상태였다. 윤기 나는 검은 코 위에 올라선 성현제는 송태원의 흰 동공을 빤히 바라보았다. 크르르- 거리며 저를 노려보는 시선은 꽤 거대했다.
 성현제는 사슬을 들어 올렸다.
 정확히 송태원의 두 눈. 그리고 심장 부군을 사슬로 겨냥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나 그나 꼴이 참 우스웠다.
 "한 번에 끝내지, 송태원."
 심술궂은 기분이었다. 저를 이렇게나 귀찮게 한 존재를 평소처럼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를 들어낸 만큼 저도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름을 불린 송태원의 시선이 흔들렸다. 거세게 사슬을 꽂던 성현제는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눈동자 바로 앞에서 사슬을 멈춘 성현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송태원을 불렀다.
 "송...태원? 송 실장? 알아듣나!"
 성현제는 그의 커다란 눈동자를 살피려 가까이 다가갔다. 이전과는 다른 희열과 함께 묘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잠시 자신을 바라보던 괴물이 다시금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이빨을 드러내자 툭-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급격하게 추락한 기분에 성현제는 입술을 세게 다물었다. 짓씹듯 물은 입술에 이빨 자국이 남도록 깨물은 그는 몸부림치는 송태원을 향해 다시금 사슬을 휘둘렀다.
 두 눈동자에 박히고, 수많은 혈관을 헤쳐 들어간 사슬에 괴물의 몸부림은 거세졌다.
금방 몸을 물려 땅에 착지한 성현제는 다시 괴물의 목을 조였다. 어지간히 말을 못 알아듣는 듯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몸뚱이라도 끌고 가면 다행인 상황인데.'
 괴물의 목을 감싼 사슬을 당겨 땅에 머리를 대도록 힘을 주었다. 시뻘건 피가 성현제의 발목을 적셨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값비싼 구두는 조금 낡아져 그 끝이 탁해져 있었으며. 던전 부산물로 만든 코트를 제외한 정장은 끝단이 조금씩 찢겨있었다.
 땅에 처박힌 대가리에 다가가며 성현제는 송태원을 향해 손을 들었다. 주둥이 아래 부근의 털을 손으로 문질러 주며 성현제가 달래듯 말했다. "쉬- 착하지." 그의 말에 몸부림치며 반항하는 송태원을 향해 몇 번 더 사슬을 내리꽂은 성현제는 자욱한 핏덩이 안에서 포션 뚜껑을 열었다.
 처치 창이 뜰 때까지 기다리며 점점 숨이 멎어가는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지쳐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가 죽기 직전에 상태 창이 뜨고 바로 포션을 부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었다.
 움찔거리는 기색조차 줄어든 상대를 보며 초조하게 기다리던 성현제는 저도 모르게 포션을 조금 기울였다. 다급하게 쏟아지는 포션을 손바닥으로 막은 성현제는 비틀린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그가 죽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제가 알던 이의 숨을 스스로 거두어 간다는 것은 꽤나 정신적으로 지치게 만들었다.
 '10분. 10분만 기다리자.' 속으로 생각하며 성현제는 털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고 푸른 하늘을 반으로 쪼갠 듯 빛을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10분이 넘도록 기다린 처치 창은 푸른빛이었다. 송태원. 이름 석 자를 확인한 성현제는 다급히 포션을 부었다.
 "송 실장, 정신 차려보게. 송태원!"
 끊어져 가는 숨이 멎을세라 천천히 사슬을 거두며 피딱지가 앉은 눈가에 포션을 붓던 그는 괴물의 작은 신음에 금방이라도 깨질듯한 표정을 지었다. 비틀려 웃는 입가로 헛웃음을 짓던 성현제는 빠른 손놀림으로 포션 다섯 병을 연거푸 부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포션을 모두 쓰러진 상대에게 사용한 성현제는 천천히 상대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점점 작아져 2~3m는 될까 말까 한 크기가 된 송태원은 여전히 짐승의 모습이었다. 침을 삼키며 고요한 적막 속에 꿈틀거리는 그를 바라보던 와중 성현제는 급히 사슬로 저를 공격하는 힘을 막아내었다.
 끼긱- 거리며 사슬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리고 육중한 힘을 견디지 못한 사슬이 조각나 부서졌다. 처치 창이 뜬 후로 사람의 형태로 변했어야 했던 송태원은 여전히 괴물의 모습을 한 채로 성현제를 공격했다.
 그가 움직이자 가슴의 상처가 아직 제대로 아물지 않아 후드득- 피가 떨어졌다.
 “송태원!”
 성현제가 버럭 소리를 치며 급하게 괴물의 가슴을 지혈하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가 죽도록 놔둘 생각은 없었다.
 사슬을 거두며 상대에게 손을 갖다 대기 무섭게, 푹-하고 등 뒤에서 날카로운 것이 꽂혔다. 저를 향해 매섭게 다가온 날카로운 꼬리를 막기 위한 사슬은 연약하게 부서졌다.
크게 뜬 눈으로 뒤를 바라본 성현제는 덥수룩한 검은 털을 손에 쥔 채로 제 몸을 관통한 꼬리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꼬리 끝 가시가 다시금 저를 향해 움직이고 성현제는 떨리는 손으로 꼬리를 붙잡았다. 휙휙 움직이는 꼬리가 손안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급하게 송태원의 앞발을 사슬로 휘감은 성현제는 직접 제 손으로 꼬리를 몸에서 빼내었다. 움직이느라 반쯤 벗겨져 있던 코트 사이로 공격한 꼬리는 어깨 위쪽으로 빼내 졌다. 성현제의 허벅지를 바로 위에서 멈춰진 앞발의 날카로운 발톱이 성현제의 사슬에 의해서 닳아졌다.
 그러나 둘은 너무 가까웠으며, 성현제는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곧 성현제를 향해 앞발을 휘두르는 송태원의 힘에 밀려 그는 풀숲에 넘어졌다.

 울퉁불퉁한 던전 식물에 눌린 등이 아려왔다. 손을 움직여 저를 붙잡은 괴물의 발을 떨어트리려 바르작거렸다. 어느새 성현제의 표정에 웃음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꽃이 만발해 있는 식물 위로 성현제의 피가 스며들었다. 성현제는 사슬을 움직여 송태원을 최대한 제게서 멀리 떨어트리려 했다. 기껏 치료된 몸에 또다시 상처를 낼 수 없어 머뭇거리는 움직임으로 사슬이 송태원의 몸을 붙들었다.
 칭칭 감겨오는 사슬이 몸을 조이자 송태원은 다시금 손아귀에 붙잡힌 이를 세게 붙잡았다.

 괴로운 신음이 성현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짧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시선이 흐릿했다.
 기민하게 움직이며 공격했던 것과는 다르게 송태원은 가만히 있었다. 조이는 사슬을 풀기 위해 몸을 뒤틀지도, 드디어 손아귀에 잡힌 이를 공격하기 위해 이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물끄러미 성현제를 바라보던 송태원을 마주 바라보며 성현제는 수마에 빠져들었다. 제대로 자지 못한 몸이 한계까지 끌어올려 져 툭- 하고 정신이 끊어졌다.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진 상대의 모습에 송태원은 파드득 몸을 물렸다. 급히 뒤로 높이 뛰어오른 송태원을 감싸고 있던 사슬이 변변히 힘도 못 쓰고 풀어졌다. 흐리게 사라지는 사슬을 건드리던 송태원이 다시금 성현제의 목에 위협적으로 발톱을 가져다 댔다. 제가 공격하기도 전에 알아채고 방어를 해야 하는 이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송태원은 발톱을 숨긴 앞발로 성현제를 툭툭 쳤다. 팔이 그의 발 위에 올려졌다. 도로 떨어졌다.
 성현제를 살피던 그의 시선이 만발한 꽃으로 옮겨졌다.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새빨간 꽃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질식할 듯 풍겨오는 혈 향을 바라보던 송태원은 문뜩 제 발아래 뭉개져 있는 꽃을 바라보았다. 꽃잎이 뜯겼거나 줄기가 꺾여 아수라장으로 피어있었다. 조심히 발을 내려놓자 또다시 발아래에 식물이 뭉개지는 소리가 났다. 송태원은 다시 들어 올린 앞발을 어쩌지 못하고 주위를 살피다 제가 붙잡고 있는 가장 큰 꽃을 바라보았다. 꽃을 붉게 물들인 그 꽃은 이미 크게 다친 후였다. 꺾인 꽃과 성현제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송태원은 성현제의 얼굴 가까이 머리를 가져다 댔다.
작은 숨소리가 들렸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께가 오르락거렸으니 숨을 붙어있는 모양이었다. 저를 공격하지 않고 잠에 빠진 성현제를 바라보다 송태원은 그 주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았다. 조금 먼지가 묻은 그의 볼을 혀로 핥은 송태원은 주위를 흘깃거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성현제는 깜빡깜빡 눈썹을 들어 올렸다. 빛이 부서진 듯 화려한 눈동자가 주위를 살폈다.
 검고 윤기가 흐르는 털이 시야에 보이자 성현제는 급히 몸을 일으키고 털을 붙잡았다. 깜짝 놀라 움직이는 것은 본인만이 아닌지 송태원이 벌떡 일어나 몸을 뒤로 뺐다. 성현제의 손아귀에는 뽑힌 검은 털만 남아있었다. 물끄러미 털을 바라보고 있던 성현제를 향해 송태원이 꼬리를 휘둘렀다.
 사슬로 꼬리를 붙잡던 성현제는 곧바로 사슬을 물렸다. 꼬리가 그의 목에 길게 상처를 냈다. 성현제는 목에 난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피가 묻어나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던 성현제는 몸을 일으켰다. 뚫린 몸뚱아리에서 다시금 피가 흘렀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더이상의 전투가 없다면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송태원이 몸을 일으킨 성현제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사슬로 공격을 튕겨낸 성현제가 제 옷을 툭툭 털었다.
 더 공격할 것은 아니었는지 송태원은 순순히 몸을 물렸다. 더는 공격이 없자 성현제는 발걸음을 옮겼다.

 성현제가 눈을 뜨자마자 보였던 검은 짐승은 가만히 있었다. 죽은 듯 미동조차 없는 모습에 성현제는 급히 손을 뻗었던 참이었다. 움직이는 모습에 안도감과 함께 묵직한 무게가 가슴을 눌러왔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감정은 슬픔과 비슷했기에, 성현제는 애써 그 감정을 모른 체했다.

 그가 걷는 거리마다 피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점점 크기가 작아지는 것에 S급의 회복력으로는 하루가 지나면 다 나을 상처였다. 저를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죽였을 거라 생각한 성현제는 처치 창이 뜨고도 여전히 괴물의 모습인 송태원을 방치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이 빌어먹을 던전에서 보스를 찾아 죽이면 끝이었다.
 지독한 던전임이 분명했기에 성현제는 제 몸을 치료해야 한다 느꼈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보스를 찾기도, 처치하는데도 시간이 꽤 오래 걸릴 터였다.
 너덧 시간을 잤는지 해는 여전히 머리 위에서 쨍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문득 뒤에서 코트를 잡아당기는 느낌에 성현제는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제 코트를 앞발로 붙잡은 이는 송태원이었다. 훤한 대낮에 그를 다시 보니 코 주위에 얼룩처럼 흰 부분이 두 개 있었다.
 성현제는 제 코트를 당겼다. 순순히 코트를 놓아준 송태원을 한번 쳐다본 뒤 성현제는 다시 걸었다. 더이상의 방해는 없었다. 성현제는 무너진 건물 잔해를 밟고 넘어섰다.
그의 뒤로 폴짝하고 뛰어넘은 존재로 인해 밟고 있던 시멘트벽이 흔들렸다. 다급히 몸을 바로 하며 사슬을 휘두르자 송태원이 사슬을 물어 당겼다. 무슨 마음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따라오는 송태원을 편치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성현제는 사슬을 물렸다. 어쩌면 눈앞에 움직이는 생명체를 처음 본 상태라서 호기심에 다가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젯밤의 전투로 무너진 건물들 사이, 성현제가 송태원과 처음 만났던 건물이 나타났다. 던전 부산물로 만들어진 가방일 테니 안에 든 포션이 깨지지는 않을 터였다.
잔해를 어떻게 치울까 봐 툭툭 건드리던 성현제는 제 뒤에 얌전히 앉아있는 송태원을 흘낏 바라보았다. 어제는 괴수인 것처럼 덤벼들더니 오늘은 또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얌전했다.
 성현제는 송태원을 멀리 떨어트릴까 생각하다, 어차피 포션을 찾아 부으면 된다는 생각에 굳이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건물 옥상 부분은 똑 떨어진 듯 원래 형체를 유지한 채로 제일 위에 올려져 있었다. 커다란 덩어리를 사슬로 휘감아 옆으로 치우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쌓여있던 건물 잔해가 큰 진동에 우르르 떨어지자 성현제는 여상히 뒤로 한 발짝 움직였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송태원이 급하게 그의 앞으로 달려들어 건물 잔해를 몸으로 막아대고 있었다. 공격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음에 성현제도 송태원을 향해 사슬을 휘두르지는 않았으나 저를 보호하려는 듯 보이려는 기색이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허- 하고 짧게 웃은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송태원의 털을 부드럽게 쓸었다.
 "송태원."
 의사소통은 되지 않지만 정말 애완견처럼 저를 부르는 호칭인지는 아는 듯 송태원이 성현제를 돌아보았다.
 성현제가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웃었다. 위험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주제넘게 굴지 마."
 어차피 지금의 모습으로는 송 실장이라고 불러 봤자였다. 오히려 익숙할 본명을 부르는 쪽이 좀 더 괴물이 알아듣기 변할 거라 생각한 행동이었다.
여전히 제 앞에서 우뚝 선체로 가만히 바라보는 송태원을 마주 보며 성현제는 사슬을 휘둘렸다.
 시멘트로 가득한 건물 잔해를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려 던졌다. 또다시 무너지는 잔해에 송태원이 힘으로 건물잔해를 받쳐 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현제는 빠르게 작업할 뿐이었다.


 그의 주위로 잔해가 수북이 쌓이자 성현제는 송태원의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넘실거리는 사슬 위로 서자 송태원이 몸을 움직였다. 바닥에 앉아 먼지가 묻은 몸을 한번 털고 고양이 마냥 털을 정리하는 모습을 쓰게 바라보며 성현제는 사슬로 바닥을 쓱 쓸었다. 자잘자잘한 자해들 사이로 툭 하고 부딪히는 가방을 사슬로 들어 올리자 털정리를 하다 말고 송태원이 사슬을 툭툭 건드렸다.
 송태원이 건드릴때마다 일렁이며 움직이는 사슬이 신기한지 계속 쳐다보는 모습에 성현제는 다른 사슬을 그의 앞에 휙휙 움직였다. 송태원의 손아귀에 사슬이 잡히자 미련 없이 사슬을 사라지게 한 성현제를 송태원이 실망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사슬에 찔려가며 성현제가 사슬을 움직이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원망하듯 바라보는 시선에 웃는 낯으로 땅에 선 성현제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가방을 열었다.

 제 몫의 포션을 마시고 포션 하나는 인벤토리에 넣어놓고. 성현제는 송태원을 향해 포션을 내밀었다. 친절하게 직접 뚜껑까지 따준 포션 병을 들이밀자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이는 곧 뒤로 물러섰다.
 스스로 마실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성현제는 제 한쪽 손을 모아 포션을 따라내었다. 손바닥에 한가득 담긴 포션을 내밀자 송태원이 혀를 내밀었다. 바닥에 떨어지는 게 반. 마시는 게 반인 모양새에 흔치 않게 사치를 부린다며 병을 거두었다.
던전을 나가서 마셔도 될 일이었다.

 송태원은 여전히 성현제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서서 주위를 살피는 그를 따라 서 있기도, 가만히 있는 손을 툭 건드리기도 했으며. 다리 쪽을 꼬리로 감기도 했다.
 여전히 괴물의 모습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던전을 훤히 안다는 듯 구는 송태원이었다. 가지 말라는 듯 붙잡는 모양새가 잦아지자 성현제는 제가 보스에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온통 풀로 뒤덮여있던 보스는 성현제의 예상을 한치도 빗겨나지 않았다. 귀찮은 물질을 뿜어낼 뿐 변변찮은 공격을 할 줄 아는 몬스터도 아니었다. 이리저리 뻗어 나가는 줄기를 사슬로 붙잡으며 성현제는 낙뢰를 내려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옆에서 울어대기만 하던 이가 몬스터에 달려가 자 망설이고 말았다. 송태원은 가장 두꺼운 줄기를 물더니 손쉽게 반으로 꺾어버렸고, 녹색의 가스가 더 심해졌지만, 부들부들 대던 보스는 너무나도 쉽게 처치되고 말았다.
 완료된 처치 창을 보던 성현제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끝이었다. 보스를 잡기 위해 지나왔던 길목에 놔두었던 이들을 찾아 던전 입구 쪽으로만 나가면 되었다. 자잘한 몬스터조차 없는 조용하고 끔찍한 던전에서 유일하게 찾아온 평화였다. 그는 끝에 다다른 것이었다.

 성현제는 다시금 송태원에게 포션을 부어주려 했다. 아무래도 그냥 보스처치만으로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치료목적으로 포션을 부었던 것이었지만. 몸의 변형이 질병으로 인식되는지 어떤지, 인간으로 돌아오는 데는 포션이 제 몫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여전히 송태원은 물약을 극도로 거부했다. 오랜만에 보는 송태원의 날카로운 이빨에 성현제는 다음 기회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보스처치하고 나온 보상은 주로 물약 쪽이었다. 사람을 그렇게 지치게 하는 던전이저니 병 주고 약주 고였다.
 반짝이는 돌덩어리와 섞여 있는 보상에서 포션만 챙기던 성현제에게 송태원이 다가왔다. 일정 거리를 벌린 채 서 있던 이는 곧 조심히 병을 들어 성현제에게 내밀었다.
멍하니 그걸 받아든 성현제가 가볍게 웃었다. 어느새 그는 다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고맙네."
 저를 살피는 송태원의 모양새가 좀 더 집요해졌지만 성현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금 던전을 돌아 쓰러져있는 이들을 찾기 위해 둘은 걸음을 옮겼다.
 종종 성현제는 걷다 말고 멈출 때가 있었다. 아무런 말도, 교류도 없는 던전에서는 잡생각이 많아지곤 했기에, 그는 자신의 생각에 너무나 깊게 몰입한 나머지 하던 행동을 멈출 때가 있었다.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는 성현제를 옆에서 걷던 존재가 머리로 다리를 밀었다. 휘청이는 모양새에 퍼뜩 정신이 든 성현제는 저를 밀고 있는 존재를 바라보며 다시금 웃어 보였다.
 "잡생각이 많아졌군. 잡생각이 많아졌어."
 성현제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송태원은 성현제의 손목에 제 꼬리를 감고 걷고 있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으나 지친 듯, 그는 자주 멈출 때가 있었다. 저를 향해 웃어주고는 겨우 두 발짝 움직이고 다시 멈춘 그의 모습을 보고 말았을 때. 송태원은 성현제의 바로 옆에 가까이 서서 걸었다.
 부슬부슬한 털의 촉감이 그가 잡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제게 호의를 가진 존재의 온기를 느낀 지 꽤 오래되었기에 성현제는 자주 털을 엄지로 문질렀다.


 첫 부상자는 덤불에 꽁꽁 감싸져 있었다. 성현제가 지나간 이후로 던전이 몬스터를 잡아먹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성현제와 송태원은 직접 손으로 덤불을 하나하나 헤쳐내었다. 송태원의 날카로운 앞발에 성현제가 굳이 사슬을 쓸 필요가 없었기도 했다.
 덤불 속에서 겨우 숨만 쉬고 있던 존재를 끄집어내고 성현제는 주둥아리를 벌려 포션을 부었다. 던전처치 완료 후 보상으로 나온 포션을 두개 쓰고나서야 몬스터는 점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이는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성현제는 대쉬의 헌터 하나를 사슬로 칭칭 감았다. 그리고 잠시 바닥에 앉았다.
 성현제가 앉자 송태원이 그의 뒤로 다가와 기대주었다. 다시금 낮게 웃는 미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송태원은 괴물에서 사람으로 변한 존재를 빤히 바라보았다.
성현제는 수마에 빠졌다. 분명 포션을 먹고 몸은 움직일 수 있을 터였고, 이렇다 할 전투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친 듯 눈을 감았고, 얕게 잠에 빠져들었다.
 제게 기댄 이에게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자 송태원은
 조심히 제 몸을 빼내었다.
 톡톡 주위에 널려져 있던 유리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고, 송태원은 제게 기댄 이가 땅에 반듯하게 눕도록 꿈틀꿈틀 몸을 움직여댔다.
 대쉬 길드원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고 포션을 얼마나 먹을지 몰랐기에 성현제는 모든 포션을 꺼내놓은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상태가 악화하는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위해 남겨두었던 세성에서 제조한 포션마저도 꺼낸 참이었다. 어차피 훔쳐 갈 이도 없겠다. 거리낄 상황은 아니었다.
 송태원은 조심히 움직이며 모여있는 포션 병을 앞발로 툭툭 쳤다. 두어 개의 포션이 또르르 굴러 저 멀리 떨어졌다.
 송태원은 성현제가 제게 먹이다 만 포션 병을 이빨로 물었다. 작아 몇 번 헛짓을 한 후에 입에 문 포션을 입안에 넣고 콰드득 씹었다. 제 커다란 발톱으로는 포션의 뚜껑을 열 수 없었다.

 유리 조각마저 곱게 갈아버리며 씹던 송태원은 꿀꺽하고 포션을 삼켰고 곧 그는 점점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눈을 감았다 뜨며 돌아온 제 모습을 바라보고 그는 손발을 꼼지락거렸다. 제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송태원은 잠든 성현제의 곁에 다가갔다. 모습은 변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감정은 그대로인 듯 했다. 가만히 숨을 쉬는 그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댄 송태원은 그의 맥박을 확인하고는 주섬주섬 포션을 챙긴 걸음을 옮겼다.
 실로 예상보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있었다.

 빛나는 사슬은 주인이 자는데도 불구하고 그 형체가 유지되었다. 손에 들고 있던 사슬로 마지막 시체를 묶은 송태원은 다시금 그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세성 길드 장의 사슬은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늘어뜨려졌다.
 잠에 빠진 주인을 품에 안고 송태원은 천천히 걸었다. 지친 기색의 그가 낯설었으나 공격하며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던 터라 거북하지는 않았다.
 축 늘어져 제게 기댄 이의 머리에 볼을 부볐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달라붙었다. 그는 어쩌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감정적인 사람일 수 있었다, 호불호가 명확한 인간이었으니... 무엇보다 감정에 솔직한 이였을 터였다. 죽음은 그와 어울리지는 않았으나. 피로는 송태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무너진 게 아닌 그저 바닥에 등을 대고 잠시 쉬는 중이었다. 더욱더 날뛰기 위해서.

 송태원은 던전 입구에 다다라 성현제의 이름을 불렀다. 조용히 몇 번 부르자 성현제는 눈을 떴고. 그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그는 세성의 길드 장이었다.


 '세성의 길드 장, 성현제가 홀로 공략에 성공한 던전은 두 명의 사상자를 내고 폐쇄조치가 떨어졌습니다. 각 성자 관리실의 위로금과 세성의 기부금이 유가족에게 전달 될 예정이며...'
 던전을 나서는 성현제의 발걸음 뒤로 송태원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사슬에 묶인 대쉬길드원들이 던전 입구에 차례차례 놓였다. CCTV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세성쪽에서 힐러를 급히 대동했으며 이미 사망한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곧 응급처치를 마치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하 팀장이 송태원에게 다가왔다.
 한사코 세성의 치료를 거부한 송태원은 의자에 앉아 하 팀장을 향해 묵례를 해 보였다.
 "다녀오셨습니까."
 걱정했다는 그 흔한 인삿말 없이 덤덤한 목소리로 하 팀장이 말했다.
실제 던전공략을 한 이는 세성길드장이었으므로, 10분 남짓한 브리핑을 기자들 앞에서 마친 성현제는 제 직원들을 데리고 차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 팀장을 바라보다 멀어지는 성현제를 바라보며 송태원이 말했다.
 "네, 다녀왔습니다."
 말을 마치고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송태원이 덧붙였다.
 "..밀린 서류가 많겠네요."


 세상은 다시금 빠르게 흘러갔다. 각성자관리실대표단은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일일이 찾아가 사과의 말을 전달했으며 세성은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모션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을 도와준 것은 세성 길드장이었지만,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나누기 위한 일종의 계산일 거라 하 팀장은 말했다.
 "피해가 큰 이상 각성자관리실만의 책임으로 돌려서 저희가 사라지게 된다면 이후의 거대길드의 움직임에도 제동이 걸릴 테니까요. 세성이야 나중에 끼어들었으니 직접적인 공격을 받을 일은 없고. 분노를 나눠주되, 저희 쪽에서는 세성에 빚을 지게 된 셈인 거죠."

 송태원은 제게 기댄 성현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던전에서 나온 이후로 그를 향한 감정이 조금씩 뒤틀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거대한 존재와 인간의 끝.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몰아쳤던 던전에서의 시간은 지독했었다.
 성현제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자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 손바닥만 한 머리에서는 정말 세성의 편의를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각성자관리실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S급 헌터가 공략에 실패한 던전에 혼자 떨어지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에도 세성을 생각하며 던전의 끝을 가늠하고 있었을까.
 "...송태원,"
 성현제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어둑한 방안에서 유일하게 켜져 있는 수면 램프의 붉은빛이 몸에 드리워져 있었다.
 "네, 성현제씨."
 송태원이 대답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주제넘게 굴지 마."
 성현제는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제 마음을 안다는 듯 말하는 모양새였다. 그는 자려는 듯 송태원의 품에서 빠져나와 침대에 누웠다.
 천천히 눈을 감은 성현제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송태원은 그의 얼굴에서 머리카락을 치워주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간질였다.
 "내일은 성현제씨에게 어울리는 꽃을 가져오겠습니다."
 송태원은 중얼거리듯 말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조심히 닫은 그는 곧 세성 길드 장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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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유착 *

담록반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성현제는 타인의 결혼식을 보고 있던 참이다. 정재계의 유명 인사가 결혼한 탓에 성현제와 송태원, 두 사람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모두가 단정하게 차려 입은 자리에서 싸구려 재질의 옷감을 걸친 남자는 송태원이 유일할 것이다. 그런 남자의 가슴 포켓에 꽂힌 장미 부토니에가 유독 이질적으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서류 처리에 고생 좀 했겠군.”

“별로 그렇진 않았습니다.”

 

 고지식한 대답이다. 하지만 이 남자가 이걸 위해 얼마나 많은 서류에 코를 박은 채 몇날며칠의 밤을 지새웠을지 이미 뻔히 알고 있었다. 성현제는 빙그레 웃으며 피로연 자리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장미인가.”

 “당신도 우습다고 하실 작정이십니까?”

 “내가?”

 

 미간이 약간 패인 게, 어디 가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라도 들은 모양이지.

성현제의 눈매가 얄팍해지는 것에 송태원이 아차 싶었는지 곧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실례했다며 짧게 말을 맺는 오만을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글쎄.”

 

 그새 흐트러진 그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면서 성현제는 골몰했다. 짧은 생각이었다. 일부러 송태원의 대각선 뒷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식 내내 그의 옆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더란다. 저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평범을 꿈꾸던 남자인 만큼 식을 구경하며 아주 평범한 가정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난 자네에게 자주 장미를 사 줬다고 생각한다만.”

 “……안 어울리는 선물이란 소릴 몇 번 들었죠.”

 “답지 않게 의기소침해선 뭔가. 송태원.”

 

 덩치 큰 남자가 또 이따위로 삽질하는 모습은 약간 귀엽긴 한데, 자신도 건드리지 않는 부분을 어디서 외간남자가 건드렸나 싶어 성현제의 기분이 약간 처지려던 참이다.

 

 “결혼식.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랬다. 웨딩 슈트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두 사람이 웨딩로드를 걷고, 주례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는 장면은 그린 듯이 완벽해 보였으니까. 답변이 없는 것을 긍정이라 생각했는지 송태원의 말소리가 더 느려졌다.

 

 “앞에 앉은 사람들이 당신의 결혼을 궁금해하더군요.”

 

 연애를 하고 있으나 공개적인 연애는 아니었다. 각성자 관리실과 세성 길드의 협력을 의심하는 무리가 생기면 골치 아픈 일이니 차라리 애초부터 이렇게 구는 게 현명한 선택이기는 했다. 그러나 비밀 연애를 하자던 송태원의 얼굴이 더없이 암울하던 것을 생각하면 모른 체 터뜨려야 했었나 싶다.

 

 “자네와 결혼했잖나. 혼인 신고서 두 장 잘 나눠 가지고선 왜 이래?”

 “당신의 앞날을 방해하고 있단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가슴 포켓에는 열정을 뜻하는 장미 부토니에를 꽂은 남자가 하는 말이 뭐 이렇게 쑥맥 같고 멋없는지. 남 좋은 날인 결혼식에 우두커니 앉아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앙큼하기 짝이 없다. 기괴하게 웃은 성현제가 송태원의 어깨를 쓸어 주며 슬그머니 무게를 기울였다. 피로연 때문에 사람들이 전부 이동한 탓에 식장에 남아 있는 사람은 식장 관계자들뿐이었다.

 

 “세성이 성공하는 이유가 뭔 줄 아나. 남들이 모르는 것들을 발굴하고 휘두르기 때문이야.”

 

 뜬금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이 유쾌하다. 빙그레 웃어 보인 성현제는 제 검지와 엄지를 비비며 짧은 고민을 마쳤다. 샴페인이 고팠다.

 

 “자네는 장미가 잘 어울려. 원래 검은색에는 붉은 색이 잘 받는 법이지.”

 

 무어라 말하려는 입술을 입술로 덮으며 속삭이는 목소리는 달큼하기 짝이 없다. 당혹감에 밀어내려는 송태원의 손에 깍지를 끼면서 성현제는 일말의 가능성 하나를 제거했다. 방금 전 잘려 나간 건 송태원이 다른 사람과 위장 소개팅을 볼 수도 있던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그딴 식으로 깜찍한 걱정은 그만 둬. 어차피 이제 곧 공개연애가 될 테니까.”

 

 제 허리를 끌어안아 오는 손길에 성현제는 유들유들하게 속삭였다. 이 뒤의 폭탄 크기에 대해 논하자면 자신보다 이 남자가 짊어질 게 훨씬 크다는 걸 안다. 그러나 꾸준히 자신을 감당해 온 남자라면 그런 사회적 폭탄도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 여차하면 세성의 힘을 통해 정경유착이 정말 무엇인지 보여 주면 되는 법이고.

 

 “당신이란 사람은…….”

 “왜, 결혼하고 싶어졌나 보지?”

 

 앓는 소리가 돌아오는 걸 보니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송태원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이제 이 남자가 짐승처럼 입 맞추기 3초 전. 3, 2, 1…… 옳지. 송태원. 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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