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미 속 동화 *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더운 여름이었다. 해는 내리쬐고, 바람은 선선하지만 습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도련님, 그만 들어가실 시간이에요.”
“벌써? 조금만 더 있고 싶은데.”
“날이 더워요. 도련님이 쓰러지시면 또 저희가 혼나니까….”
“그만 괴롭히라고 말해 둘까? 알았어, 갈게. 준비해줘.”
“예, 도련님.”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한껏 여름의 향을 즐기던 남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화려한 머리색과 빛나는 금안. 그리고 정원에 가득 핀 장미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외모. 머리가 멍하게 뜰 정도로 가득한 장미 향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남자는 아름다웠다.
검은색의 레이스로 장식된 양산을 햇빛에 빛나고 있는 남자의 머리 위로 가져갔다. 남자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니, 그의 시종을 들고 있는 수명의 하인들이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얼마 걷지 않아도 보이는 저택은 남자의 부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고 사치스러웠다.
저택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눈이 아릴 정도로 내부의 웅장함과 화려함이 돋보인다. 남자는 하인이 가져다준 금색의 종을 받아들곤 흔들었다. 짤랑, 짤랑. 울린 종소리에 맞춰 계단을 내려오는 누군가의 모습에 남자의 표정이 대번 밝아졌다. 화려한 외모에 웃음까지 드리워지니, 익숙하게 주변에서 남자를 보조하던 하인들 또한 넋을 놓았다.
“태원아.”
“돌아오셨습니까, 도련님.”
계단을 내려와 남자의 눈앞에 선 송태원은 익숙하게 곁에 선 하인에게서 상태를 보고받았다. 산책하는 동안의 남자의 호흡수, 그리고 몸의 상태, 안색까지. 철저하게 모든 것을 보고받은 송태원이 시선을 돌려 남자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들은 내용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남자의 상태를 확인한 송태원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서 있던 하인들 또한 드디어 마음이 놓인 듯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흩어지라는 신호를 보낸 송태원이 이젠 아무도 서 있지 않은 남자의 곁에 다가갔다. 따뜻한 물에 적셔둔 수건으로 남자의 손을 가져와 부드럽게 닦아냈다. 그 행위의 흐름을 바라만 보던 남자는 시선을 올려 집중하고 있는 듯한 송태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챈 송태원이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아니? 그냥 봤어. 잘생겼길래.”
“…방으로 돌아가시면 탁자에 놓인 약부터 챙겨 드십시오. 그리고 오늘같이 햇빛이 강한 날에는 밖에 나가지 말라고 말씀을 드렸을 텐데요.”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마, 태원아. 안에만 있으면 숨이 막힌다고. 오늘 몸 상태는 괜찮았어. 내가 더 잘 알아.”
“…….”
송태원은 별말 없이 남자의 손을 마저 닦아냈다. 적당한 김이 올라오는 수건으로 길고 얄쌍하게 뻗은 손가락을 하나씩 천천히 문지른다. 단정하게 정리된 손톱과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 무심코 입을 맞추고 싶어진다.
“끝났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하고 싶으면 해도 되는데.”
“뭘 말입니까.”
“글쎄, 난 모르지.”
남자의 깊은 눈이 다시 한번 송태원의 얼굴을 훑었다. 항상 이렇다. 남자의 앞에서는 무엇 하나 감출 수 없이 들켜버리고 만다. 제 속을 마구잡이로 뭉쳐두었던 공간을 남자는 한순간에 벗겨버린다. 송태원은 갈라지는 목소리를 애써 다듬으며 남자를 방으로 이끌었다.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린 말의 끝은 이어두지 않는다. 남자는 그것이 퍽 못마땅한 모양이었지만, 굳이 거두었던 화제를 다시금 끌어내진 않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온통 새하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침대를 비롯한 모든 가구가 모두 새하얗다. 이것은 남자의 취향이자 고집이었다. 바로 침대에 몸을 누이려던 남자는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송태원의 눈빛에 애써 탁자로 걸음을 옮겼다. 투명한 유리컵에 담겨있는 물과, 그 옆에 놓인 다섯 가지의 다양한 알약들. 크기도 색깔도 제각각인 그것들을 한 손에 움켜쥔 뒤 물과 함께 삼켜낸다. 식도를 타고 거쳐 가는 알약들이 소름 끼치게 역겨웠다. 남자는 무의식중에 인상을 찌푸렸다.
“다 드셨습니까.”
“그래. 안 먹으면 네가 또 화낼 테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송태원이 남자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탁자에 반쯤 걸터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턱선에 손을 올려 치켜들었다. 엄지로 붉은빛의 입술을 눌러 억지로 입을 벌려냈다. 입안으로 들어온 손이 가지런한 이와 얌전히 놓인 혀를 손끝으로 쓸었다. 입천장과 혀 아래, 그리고 볼 안쪽을 세세하게 훑고 지나쳤다. 미끌미끌한 입안에 뜨거운 손가락이 생살을 헤집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등에서부터 올라오는 짜릿한 감각에 남자는 그런 손가락을 깨물어볼까 생각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송태원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얌전히 입을 벌린다. 축축한 혀에 닿는 손가락을 깨무는 대신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남자의 행동에 송태원이 잠시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곤 태연한 것처럼 손가락을 빼내었다.
“다 드셨군요. 확인했습니다.”
“먹었다고 했잖아.”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하는 겁니다.”
몇 달 전 약을 삼키는 것이 곤혹스러워 먹는 척하며 빼돌린 적이 있었다. 매일 매일 챙겨 먹는 약을 단 하루만 빼먹었을 뿐이다. 단 하루. 이틀도, 삼일도 아닌 단 하루. 그리고 남자는 쓰러졌다. 다섯 개의 알약을 빼돌린 대가로 남자는 사흘 동안 눈도 뜨지 못했다. 고열이나 경련, 다른 병증이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그저 죽은 것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맥박 수도, 호흡도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그저 눈만 뜨지 못했다. 시체처럼 잠들어버린 남자의 손을 감싸 쥔 채 송태원은 단 하루도 잠들지 못했다. 사흘이 지난 후 남자가 간신히 무거운 두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시야에 비친 송태원의 모습은 처참했다. 남자가 쓰러진 이후 단 한 시간의 숙면도 이루지 못한 탓에 눈 밑은 거무죽죽했고 눈빛은 탁해져 평소에도 검던 눈이 더욱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물 한 모금조차 입에 대지 않은 상태였는지 입술을 버석하게 말라 갈라진 틈새에 핏덩어리가 고여 있었다. 성현제는 흐릿해진 시야로 송태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 얼굴을 본 송태원은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었지. 그 이후로 송태원은 심한 집착이라고 느껴질 만큼 매일같이 남자의 입 안을 살폈다. 빼먹은 약은 없는지, 제대로 넘겨 삼켰는지. 남자는 그것이 귀찮으면서도 내치지는 않았다. 그만큼 그날의 송태원이 흔들렸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귀찮은 기색을 지우지 않은 채로 침대에 던지듯 몸을 눕혔다. 푹하고 감싸오는 이불의 촉감에 어리광부리듯 뺨을 문질렀다. 반쯤 졸린 듯한 기색으로 입술을 열었다.
“같이 잘래?”
“나가보겠습니다.”
“태원아.”
“예, 도련님.”
“내 방이 왜 하얀 줄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하얀 방 안에 까만 늑대 한 마리가 들어와 있으면 보기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꾸며두라고 얘기해놨었거든.”
“…그렇습니까.”
“다시 한번 물을게. 내 옆에, 누울래?”
“쉬십시오. 몸이 피곤하실 겁니다. 대신, 곁에 남아있도록 하겠습니다.”
“재미없는 놈.”
남자는 흥이 떨어진 듯 송태원에게서 등을 돌렸다. 짜증 나는 기분을 담아 발치에 걸리적거리는 베개를 발로 툭 밀어 떨어트렸다. 그러면서 다시 몸을 뒤척여 송태원을 바라봤다. 떨어진 베개를 줍기 위해 숙인 몸의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발끝으로 송태원의 어깨를 짓눌렀다. 떨치려면 얼마든지 떨칠 힘이었다. 송태원은 그런 남자의 행동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저 검은 눈동자로 남자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손바닥 위로 올려.”
손바닥을 펼쳐 남자의 발을 조심스럽게 위로 올렸다. 손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의 구미를 당기는 모습이다.
“키스해.”
“…….”
곤혹스러움을 담아 남자에게 호소하듯 빌었다. 머뭇거리는 제 행동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침대 위의 남자는 고고한 자태를 보일 뿐이다.
“뭐해? 주인의 말은 그것이 무엇이든 전부 수행해야 한다. 네가 그랬었잖아.”
“…이런 장난은 곤란합니다.”
“장난, 아닌데? 키스해. 어서.”
매끄러운 눈썹 사이에 짙은 주름이 팬다. 또다시 한숨을 내쉰 송태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남자의 발등 위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댔다. 닿은 듯, 닿지 않은 듯. 그렇게 조심스러운 키스였다.
“태원아.”
남자는 항상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된 것 마냥 애정을 가득 담아서.
“대답해야지. 태원아.”
“……네.”
“너를 어쩌면 좋을까. 내가.”
“무엇이든,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나가봐. 이제 됐어. 혼자 있고 싶으니까.”
불을 꺼달라는 말과 함께 남자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송태원은 그런 남자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 후 방 안의 불을 내렸다. 그리곤 조용히 방안을 나섰다.
미묘한 거리. 그리고 애매한 관계. 송태원과 남자의 모든 것이었다.
우중충한 날이었다. 새벽부터 쏟아지던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름의 끝자락에 이렇게 많은 비가 내리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음에 들었던 장미 정원 또한 오늘은 가보지 못했다. 이런 날씨면 더욱 외출이 엄격히 제한된다. 남자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섬세하게 세공된 유리 작품을 남들 손에 타지 않도록 장식장에 가둬둔 것처럼 송태원은 남자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하얀색의 커튼을 쥔 채 쏟아지는 비를 보이는 창문을 감춰버린다. 꺼둔 전등 탓에 방안이 온통 검게 물들었다. 성현제는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을 보냈을까. 내리는 빗소리가 지겨워졌을 무렵 남자는 탁자에 놓인 금색의 종을 흔들었다. 짤랑, 짤랑. 두 번의 소리와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들어가겠습니다. 간결한 움직임과 함께 문이 열린다. 틈새로 보이는 송태원의 모습에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심심해.”
“놀만 한 것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런 거 말고.”
“말씀하십시오.”
“이리 와.”
“예.”
다가오는 손목을 낚아채 제 위로 잡아당긴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손길에 흔들린 몸이 휘청거리며 쓰러진다. 단단한 팔목이 제 머리 옆으로 받쳐지며 송태원의 얼굴이 유독 가깝게 다가왔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송태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태원아.”
“…곤란합니다. 도련님.”
“태원아.”
“……도련님.”
한 손에 잡히지 않는 팔뚝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닿아오는 손길에 경직되는 몸이 퍽 재미있다. 팔을 타고 내려간 손이 허리에 닿았다. 송태원은 그제야 남자의 손을 잡아 침대 위로 눌렀다. 곤란합니다. 억누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열이 아쉬웠다. 받아낼 수 있는데. 받아줄 수 있는데. 멍청한 송태원. 안 그래도 예민한 신경이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척 하지 마. 이미 알고 있잖아.”
“저는… 모르겠습니다.”
“난 영원하지 않을 거야.”
“그런 말씀, 마십시오.”
“확실히 정해. 계속 그렇게 도망칠 건지, 다가올 건지.”
“…….”
“선택해 태원아. 마지막일 거야.”
“전, 저는… 모르겠, 습니다.”
“눈 돌리지마. 날 봐, 나를 봐.”
“도련님…….”
마주친 두 시선이 애절하게 녹아내린다. 송태원이 고개를 숙이고, 남자는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남자가 비스듬히 고개를 튼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송태원이 결국 움직임을 멈췄다. 한 뼘 미만의 거리. 송태원은 결국 내딛지 못했다. 비틀어진 고개를 남자의 옆에 파묻었다. 폭신하게 얼굴을 감싸오는 침구에서는 은은한 남자의 향이 났다. 언제나처럼 사람의 목을 마르게 하는, 갈증이 날 정도로 단 장미 향이었다.
“비겁한 새끼.”
“…맞습니다.”
“하….”
“…….”
“놓친 건 너야. 돌아오지 않아.”
남자가 송태원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더욱 가까워진 거리에 송태원은 결국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베개 옆 시트가 무참히 어그러졌다.
“…됐어. 다른 사람을 불러줘. 넌 그만 들어가.”
“그래도―,”
“가.”
“도련님….”
“송태원.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마.”
“……네, 도련님.”
송태원이 몸을 일으켰다. 멀어지는 거리가 아쉽게 느껴지기도 전에 송태원이 몸을 돌렸다. 뻣뻣하게 치켜세운 어깨에선 미련이 뚝뚝 흘러넘쳤다. 방안을 채워나가는 감정에 남자는 웃지 못했다. 눈꺼풀이 무겁다. 약을 버려버린 그때와는 다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말씀대로 다른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도련님. …도련님? 그래. 알겠어. 따위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의문을 가진 송태원이 남자를 바라봤다. 잠이 든 것처럼 두 눈을 감은 남자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도련님.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송태원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도련님. 발을 끈끈하게 죄어오던 미련을 떨쳐낸 송태원이 다급하게 남자의 어깨를 흔들었다.
도련님. 흔들어도 남자는 눈을 뜨지 않았다.
간절해진 손이 남자의 뺨을 감쌌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것에 잠시 안도감을 느꼈으나, 그것뿐이었다. 송태원이 그 이후로 남자의 두 눈동자를 보게 될 날은 돌아오지 않았다. 빛을 머금은 금안. 장미와 함께 어우러지던 남자.
송태원은 다시 한번 무너져 내렸다. 태원아. 남자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태원아, 태원아.
영원히 물을 머금을 것 같았던 비는 그쳐 사라졌다. 남자가 그렇게 아껴 하고, 마음에 들어 하던 정원의 장미 또한 전부 흩어져 사라졌다. 내린 비에 고인 웅덩이 속 장미 잎이 춤추듯 물 위를 떠다녔다. 붉은색은 사라지고, 초록 만이 남은 정원. 송태원은 그런 정원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채 남자가 주로 앉아있었던 의자를 바라봤다. 의사가 왔다. 송태원은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의사는 대답했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송태원이 다시 물었다. 깨어날 가능성은 있는 겁니까. 의사가 다시 대답했다. 환자분의 의지에 달린 것 같습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해가 저물어가고 있는 시간이었다. 남자가 앉아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천천히 쓸어본다. 차갑고, 축축하다. 송태원은 다시 남자가 잠들어있는 저택의 방으로 향했다. 그날의 남자는 마치 자신의 끝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무덤덤했다. 자신에게 했던 질문도 그것을 예상한 채 건넨 것이었을까. 이제는 알 수 없었다. 답해줄 남자는 눈을 뜨지 않았고, 송태원은 그런 남자의 눈을 뜨게 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끼익. 방문이 열렸다. 남자는 고요하게 잠든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장미는 져버렸다. 그리고 남자 또한. 습한 여름날 품었던 아지랑이 같은 감정의 이름을 자각하기도 전에 허망하게 끝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송태원의 모든 것.
송태원은 침대에 몸을 앉히며 남자의 손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그날 남자가 명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손등에 입을 맞췄다. 따뜻했다. 코끝을 맴도는 은은한 장미 향에 가슴 언저리가 먹먹하게 차올랐다.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이 감정을, 이 마음을, 이 혼란을. 남자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까. 송태원은 그런 생각을 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야 하는데, 대답해줄 입은 열리지 않는다.
“도련님, 도련님…….”
남자는 눈을 뜨지 않는다. 영원히.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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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함께 잠들어버린 남자. 물레에 손이 찔려 잠들어버린 동화 속 주인공처럼 남자는 무엇에 손이 찔려 잠들어버렸을까. 깨어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들 알고 있어. 아주 단순하고 쉬운 방법이지. 그게 무엇인지는, 스스로 깨달아야 해. 남자가 그걸 원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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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한쪽에 위치한 저택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그 집 도련님이 글쎄 묘한 병에 걸렸대. 깨어나지 못하는 병이라던데? 벌써 한 해가 지나도록 잠들어만 있다던데… 대체 그게 무슨 병이래? 그걸 내가 알겠나. 그 도련님 곁에 있는 시커먼 남자 있잖아. 크고, 무서워 보이는 그 남자. 그 남자가 잠든 도련님의 수발을 전부 챙기고 있다던데. 그 남자는 거기서 왜 그러고 있는 거래? 글쎄. 그 집 도련님을 그만큼 아끼고 있다는 거 아니겠어? 아니면 재산을 노리고 있다든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속사정을 다 알겠나. 그래도 참 이상하단 말이지. 그 집에 있는 하인이 몇인데, 그 도련님은 그 남자한테만 얌전해진다고들 하잖아. 제 부모한테도 그러질 않는다는데. 그래? 그 남자도 도련님 곁에서 떨어지는 걸 본 적이 없는데… 혹시 그 둘 그런 관계인 거 아냐? 이 사람아. 입 조심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소릴 입 밖으로 내뱉어. 아니 그래도, 저렇게까지 애지중지하는 이유가 그것 외에 더 있겠어? 에이 설마. 그런데 만약 그렇다고 치면, 대체 그게 뭐라고 생각하는데?
몰라서 묻는 거야? 그건 어딜 봐도―.

* 내일은 좀 더 로맨틱한 얼굴로 꽃을 가져와 줘. *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고위공무원단 나급, 각성자관리실장 송태원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얼굴 근육을 무뚝뚝하게 긴장시킨 채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올라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남의 집 현관문을 땄다.
그러면 다음은 포털 정면에서 영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팔짱을 낀 이 집의 주인이 나올 차례다.
"주거침입일세, 공무원 양반."
"집주인이 준 키를 사용한 경우에도 주거침입죄가 성립됩니까?"
성현제는 예고없이 들이닥친 무례한 방문객에게 차와 자리를 낼 만큼 물러빠진 인사가 아니었다. 물론 인벤토리에 사택 포털 키가 들어있다는 시점에서 송태원은 성현제의 '보통'에 해당한 적이 더 드물기는 한 남자였지만. 그렇다한들 편애를 양껏 받고 있는 송태원이가 거실로 들어오기는 커녕 구두조차 벗을 생각이 없다면야 성현제로서도 딱히 이보다 더 다정한 대접을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그는 드물게 떨떠름한 얼굴로 상대를 아래위로 훑었다. 한 달 째 똑같이 (성현제는 단어 사용에 있어 늘 솔직했다.) 거지같은 꼬락서니다. 물론 객관적 시각으로 송태원은 당장 어디 프러포즈를 하러 간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차림새였으니 가차없는 여덟 글자는 송태원의 외면 묘사보다는 주관적 감상, 그러니까 성현제 본인의 내적 심리 서술에 가까웠다.
“송태원 실장. 아무래도,”
“말씀드리는데 저는 지극히 제정신입니다.”
이게 크레이지 송, 크레이지 송 하더니 정말로 돌아버렸나? 오늘도 변함없이 파괴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이목구비가 딱 그런 얼굴을 했으나 송태원은 개의치않고 여태 소중히 안고 온 것을 상대의 품에 억지로 안겼다. 이번에야말로 성현제의 표정이 정말로 일그러졌다.
말을 중간에 뚝 잘라먹는 걸로도 모자라 딱 제 용건이 끝나자마자 더 이상 말을 섞을 이유가 없다는 듯 정중히 인사한 송태원은 미련없이 뒤돌아 그대로 사택을 나가버렸다. 오늘도 넓은 현관에는 서른 송이짜리 새빨간 장미 꽃다발을 얼결에 품에 안은 채 뒤늦게 이를 바드득 가는 성현제만 덩그러니 남았다. 오냐오냐 예뻐했더니 간덩이가 붓다못해 터져버린 모양이지, 응? 송태원.
한 달 째 어김없이 이어지는 광경이었다.
내일은 좀 더 로맨틱한 얼굴로 꽃을 가져와 줘.
[내스급/송태원x성현제]
TMI 하나. 성현제는 모 앙케이트 조사에서 <장미꽃이 가장 어울리는 남자 1위>를 당당히 차지한 바 있다. 그야 S급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으로 화려하고, 폭력적일만큼 아름다운 남자니 댓글창을 가득 메운 열렬한 팬심과 수많은 응답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송태원은 생각한다. 그 남자에게 ‘가장’ 어울린다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성현제라면 장미가 아닌 길가의 노랗고 수수한 들꽃을 꽂아도 눈이 멀어버릴텐데.
장미가 성현제 빨 받았네ㅋㅋㅋ
성현제 화보 댓글 하나에 송태원은 격렬한 내적 헤드뱅잉으로 동의했다. 카메라 앵글을 돌아보느라 유연하게 뒤튼 골반에서부터 곧은 척추선, 어깨와 팔을 타고 흘러내려 흰 손등뼈에서 완성되는 선은 더할나위없이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결코 가냘프지 않고, 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풍성한 속눈썹 아래 폭발하는 벼락과 뇌운을 고스란히 담아 한층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구석이 있었다.
사진작가는 장미의 붉은 색감으로 모델이 입은 무채색 옷을 살리고 분위기를 연출하려 했던 모양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모델은 성현제였다. 송태원은 한참 화보를 들여다보다 스크롤을 내려 댓글을 보고서야 그 화보에 장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모 영화에서 배우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씬에서 관객들에게 감독이 넣지도 않은 종소리 음향효과가 그렇게 들렸다던데. 화보에 장미가 있는지도 몰랐다는 둥 이럴 거면 현제오빠(오빠?) 얼굴이나 더 가까이 잡아달라는 둥 온갖 주접이란 주접은 다 떨어대던 댓글창에 나타난 당일 현장스탭 증언은 마지막 화룡점정을 찍었다.
나 그날 촬영스탭 보조였음ㅋㅋㅋ 원래 장미 저렇게까지 들이붓는 컨셉도 아니었는데 콘티컷 앞에서 총감독님이 한 30분 머리 뜯으시더니 결국 근처 꽃집에서 장미 쓸더라;
대리석 바닥을 온통 뒤덮은 빨간 꽃잎과 그 위로 사뿐하게 내려앉은 흰 발을 물들인 붉은 꽃물, 흐드러진 장미넝쿨 아래 비스듬히 걸터앉은 종아리를 감싼 폭이 좁고 단정한 까만 바지 위에서 송태원은 차마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한참 시선을 허우적거릴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현타가 밀려들어 손깍지로 미간을 꾸욱 눌렀다. 도대체 왜 사무실에서 19금 딱지가 붙은 비디오를 보는 파렴치한이 된 기분을 전체 연령가 화보를 보며 느껴야 한단 말인가.
아니 근데.
무릇 한국인이라면 억하심정이 차오를 때 본능적으로 내뱉곤 하는 네 글자다. 송태원도 예외는 없었다. 아니, 전국민이 보라고 인터넷에 실린 세성 길드장 화보를 각관실장이 좀 봤다고 해서 이렇게 죄짓는 기분을 느낄 일인가? 얼굴 구경 정도는 좀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성현제가 성현제하는 바람에 나날이 눈밑이 시커멓게 변하는 각관실 직원들조차 성현제 특집 기사에 실린 사진을 보며 진짜 얼굴만큼은 인정한다 시X…. 하고 이를 득득 갈며, 최고의 직원복지 운운하며 현충원 근처 길드빌딩 사면에 초고화질 화보 현수막을 내걸어 길드장 덕질에 열을 올리는 세성 헌터들도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 백 명을 붙잡고 물어봐라. 갓 딴 싱싱한 장미를 가져온다한들 1366x768 해상도 픽셀 쪼가리의 성현제에 댈 수 있겠느냔 말이다.
한마디로, 작금의 이 사태는 송태원의 갈 곳 없는 억울함과…본인도 미처 인식하지 못한 덕심에 기인한다.
"…와, 세성 길드장도 진짜 부지런하다. 아니… 꼭두새벽부터 꽃 배송을 보냈어요?"
오전 8:50. 마지막으로 출근한 직원이 실장님 책상 위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탄식한 순간, 여태 말은 못하고 저마다 눈치만 보고 있었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송태원에게 꽂혔다. 그 순간 흠칫 얼어버린 송태원은 그만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문제는 충성심 높기로 유명한 각관실의 직원들이 상사의 방어적인 반응을 인내심 넘치는 우리 실장님도 드디어 성현제놈이 각관실을 꽃다발로 초토화시키는데 리얼 빡친 것으로 이해했다는 데 있었다. 성현제 우리 실장님 좀 그만 괴롭혀라! 일치단결한 캐치프레이즈 앞에서 분노한 직원들이 A급에서 F급, 비각성자까지 분기탱천의 기세로 분연히 일어섰다.
야~ 진짜 세성길드장 인성질 하루이틀은 아닌데 진짜 해도해도 너무한다. 꽃 못 받아서 환장한 귀신이라도 붙었대? 그걸 또 실장님 손에 굳이 들려보냈어요? 아니, 눈치가 없는 인간도 아닌데 왜 그래? 성현제가 각관실 엿먹이는 거 좋아하는 거 대한민국에 모르는 사람? 어, 그래도 이번엔 하나만 보냈네? 아니 이 사무관님, 지금 갯수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기다렸다는 듯 한 무더기로 우르르 쏟아지는 성가놈 욕 사이에서 송태원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츠러든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느 때처럼 딱딱한 표정을 한 (그렇게 보이는) 상사의 눈치를 살살 보던 주무관은 센스있는 부하직원의 꿈을 품고선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실장님, 제가 그냥 버리고 올게요. 주세요.”
“―아뇨! 아닙니다.”
시장바닥마냥 시끄럽던 사무실을 다급하고 힘찬 목소리가 뚝 갈랐다. 한순간 거짓말처럼 확 고요해진 사무실 가운데서 당연스럽게 꽃다발을 받아들려던 주무관이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송태원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각관실 직원들이 해낸 지극히 합리적이고도 타당한 추측의 맹점은 딱 한 가지 경우를 간과했다는 데 있다. 송태원이 들고 나타난 싱그럽고 향기로운 장미꽃은 지하철역에서 출구로 나오는 통로에 있는 꽃집에서, 무려 직접 값을 지불하고 사 온 물건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쯤에서 본인의 해명과 앞뒤 정황도 들을 필요가 있겠다.
판사님, 저는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한 시간 뒤에 어디 프러포즈라도 하러 가는 모양새로 사무실에 등장하게 되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치 못했습니다. 송태원은 그저 출근길 도중 꽃집 가판대의 싱그러운 장미 다발을 보고 성현제를 무심코 떠올린 게 다였으나 퍼뜩 정신을 차렸더니 이미 예쁘게 포장된 꽃다발을 받아들고 있었고, 죄가 있다면 이미 포장까지 해서 산 것을 환불할 수도 없어 길바닥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손에 든 것을 처분하기엔 출근까지 시간이 모자랐을 뿐이다.
물론 말솜씨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송태원의 세 치 혓바닥으로는 열렬히 성현제를 욕하고 있는 직원들 앞에서 앞뒤 상황을 구구절절 납득 가능하게 설명하는 것이 S급 던전 브레이크 수습보다 딱 세 배 정도 더 어려웠다.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괜찮습니다. 결국 딱딱한 사양의 말만 남긴 채 고집스럽게 서류더미만 뒤적거리는 그들의 보스가 대답이 궁해서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한 직원들은 알 법하다는 듯 끌끌 혀만 찼다. 우리 실장님 어떡해…. 자자, 우리도 일 시작합시다! 웅성대던 직원들이 각자 자리에 앉고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메울 때까지 송태원은 서류에 처박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니, 떼지 못했다.
그 뒤로 송태원의 출근길엔 매일 꽃 한 다발이 함께했다. 직원들은 현충원에 처박혀있을 누군가를 원망하며 안쓰럽다는 눈으로 제 상사를 보았으나… 화사하기 짝이 없는 꽃다발들은 아침에 현관문을 나서며 오늘은 기필코 돈 낭비를 하지 않으리라 되씹었던 다짐이 꽃집 앞에서 매번 무참히 짓밟히고, 이제는 체념해 제 손으로 직접 색을 고르고 잔잔한 꽃가지를 섞어 만든 송태원의 오리지널 백 퍼센트 작품이었다. 매번 꽃다발을 울적하게 품에 받아 안으면서 꽃을 살 이유가 없는 날엔 이 짓도 정말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되새겼으나,
……오늘은, 겹겹이 핀 흰 리시안셔스가 세성 길드장의 우아하게 깍지낀 손가락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송태원은 뻐근해져 오는 눈두덩을 꾹 누른다. 위협적으로 구겨진 미간과 어금니를 악물어 툭 튀어나온 턱근육을 한 채 품에는 화사한 꽃다발을 안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남자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성현제가 성현제인 이상, 그 남자가 생각나지 않아 꽃을 사는 걸 잊고 꽃집 앞을 지나치는 날이 올 일은 없었다.
물론 송태원이 산 꽃은 결코 성현제에게 전해지는 일 없이 딱 그 날 하루, 심지어 맨 첫 날 각관실 직원이 근처 편의점에서 1+1으로 사온 500ml짜리 생수통에 꽂혀있다 그대로 버려질 뿐이다. 액션도 아닌 스릴러 주인공이 되는 것만큼은 송태원으로서도 절대 사양인 탓이었다. 물론 송태원도 전혀 상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상대가 생각나 꽃을 산다는 지극히 로맨틱하고 달콤한 이벤트는 각관실 실장이 세성 길드장을 상대로 저지르는 순간 호러틱 이벤트가 되더라.
아주 오랜만에 각관실이 있는 층 복도 전체를 꽃으로 도배하다 못해, 헬기를 타고 나타난 성현제가 퇴근하기 위해 건물을 막 나서는 송태원 위로 수백개의 꽃잎을 흩날리는 장관을 연출하기 전까지 그 결심은 굳건했다. 안녕, 송태원 실장. 헬기에서 유유히 뛰어내려 가볍게 착지한 성현제는 사람 속도 모른 채 늘 그랬듯 금빛 눈동자를 어여삐 휜 채 생글 눈웃음을 쳤다.
"인터넷에서 그러던데 우리 송 실장님 꽃길만 걸으시라지 뭔가. 생각해보니 대한민국의 국민된 한 사람으로서 자택 가시는 길까지 금칠은 못하더라도 붉은 버진로드 정도는 깔아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서 말이야. 어때, 마음에 드나?"
성현제는 송태원이 퇴근하는 노선의 지하철 지상 운행구간은 물론 지하철이 달리는 길을 따라 지상으로도 온갖 팡파레와 꽃가루를 뿌리고도 남을 인간이다. 그러나 정작 송태원이 지금 이 순간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세성길드장께서는 늘 각관실에 장미꽃을 배달시키셨죠. 특정 종류를 고르시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 그거야 자네랑은 붉은 장미가 가장 잘 어울리니 그렇지."
별 당연한 소리를 한다며 뻔뻔하게 핀잔까지 놓은 성현제는 보란듯 송태원이 흉부에 찬 까만 건홀더와 와이셔츠 사이로 장미꽃 한 송이를 쏙 끼워넣었다.
"거 봐, 보기 좋잖아?"
하고 웃는 얼굴은… 아, 왜 성현제는 성희롱으로 백번 고소당해도 쌀 늙은 변태 할아범 같은 소리를 해도 그림이 되지? 송태원은 자체적으로 성현제의 헛소리를 귀에서 차단시켰다. 저렇게 잘 웃다가도 느닷없이 돌변해 온갖 예민과 지랄을 떨어대는 남자를 3년간 상대하고 얻은 스킬이다. 원래는 그냥 이 시간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버티는데 쓰이는 게 고작이었는데 근래 성현제 화보를 너무 자주 구경했던 탓인지….
송태원의 기세가 급격하게 흉흉해졌다. 성현제는 되려 보란 듯 방긋 웃었다. 어차피 참는 게 일상인 송태원이 장난 좀 쳤다고 해서 제게 따지거나 화를 낼 것 같지도 않고, 흠, 오히려 화를 내면 좀 재밌겠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한 걸음 접근한 순간 송태원의 시선이 땅 위로 쏟아진 붉은 꽃잎을 밟아 뭉갠 구두코로 득달같이 쏟아졌다. 성현제가 확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러나 전투예지는 고요했으며 송태원 역시 그 외에 별다른 이상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방금 뭐였지? 이 정도로 송태원 실장이 뭔가 반응할 리가 없는데.
기실 송태원은 맨발은 아니지만 화보와 꼭 같은 모양새로 꽃잎을 밟고 선 성현제를 보며 며칠 전 점심시간에 했던 생각 위로 붉은 두 줄을 찍찍 그어 수정하고 있었을 뿐이다. 공중에서 흩날리는 수백개의 붉은 꽃잎 사이에 휩싸여 흑적색의 실레키아의 날개를 걸친 채 웃고 있는 성현제에게는 역시, 아무리 그래도 붉은 장미가 제일 잘 어울리는 거 같다는 쓸데없는 수정사항 말이다. 송태원은 생각한다. 그리고 예쁜 걸 보니 좀…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여기까지가 송태원이 근무시간 외 매일같이 성현제 사택으로 쳐들어가 품에 한 송이 천원짜리 장미 스물아홉 개, 덤 하나. 도합 서른 송이로 꾸려진 꽃다발을 안겨주기 시작한 사건의 전말이다.
거기에는 송태원이 연이은 야근에 정신이 반쯤 돌아버린 상태였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첫 날 피식피식 웃으며 송태원이가 무슨 바람이 불었대, 하고 느긋하게 반응했던 성현제는 일 주일째에는 아직도 안 끝났나? 하는 얼굴로 떨떠름히 미소지었으며 한 달이 넘어간 지금은 꼭 불청객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을 했다. 그러면서도 안겨주는 꽃다발을 거절하는 일 한 번 없이 매번 순순히 받아드는데 그게 제법 유쾌하더라. 늘 매끄러운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지는 순간에는 불쑥 앙갚음이 돌아올 걸 알면서도 위험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사실은 무엇보다 장미 사이에 파묻힌 성현제가 예뻤다. 송태원은 피곤할 때 귀여운 강아지 동영상을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성현제에게 꽃다발을 안겼다. 문현아나 노아가 들었으면 기함할 생각이었으나 송태원은 그게 자신이 그와 같은 S급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판단했다. 어쨌든 본인은 마냥 흡족했다.
* * *
오후 열 한시 십 칠분. 오늘도 어김없이 자정이 되기 전 포털이 열리는 기척에 성현제가 스르르 눈을 떴다. 집요한 면이 있다는 것쯤 일찍이 알고 있었으나 이런 식으로 발현될 줄은 정말로 몰랐다.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기분에 뻑뻑한 눈두덩을 두어번 꾹꾹 누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변함없이 현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송태원이 보였다. 고지식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운할 인사는 근무시간 외에, 꽃다발 한 아름을 안고 사택에 방문하는 순간조차 늘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송태원의 유일한 기행은 성현제가 참아줄 수 있는 범위를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렸다. 기실 한 달의 유예기간조차 송태원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제 삶에 영향을 미치는 타인을 참아줄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으며, 어떤 튀는 행동이라고 해도 새롭게 흥미를 불러일으킬 요소가 없다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만들기 위해 발버둥치다 개연성을 내다버린 조잡한 B급 영화와 다름없었다. 성현제는 여느 때처럼 장미꽃 한 다발을 안기고 잠깐 물끄러미 이 쪽을 응시하더니 마지막으로 꾸벅 허리를 숙이는 송태원을 처음으로 불러세웠다. 최종 선고 직전 검은 양에게 마지막 자애를 베풀기 위함이었다.
"하나 묻지, 송 실장. ―도대체 왜 이러는거야?"
물론 상냥한 어조로 묻겠다고는 한 일이 없다. 우습게도 송태원은 명백하게 짜증이 난 표정이 어쩐지 조금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겪어본 바 성현제는 오히려 저조한 기분을 숨기고 방긋방긋 웃고 있을 때가 위험하지 이렇게 대놓고 얼굴을 찡그릴 땐 기껏해야 투정 정도를 부리는 게 다였다. 그마저 가장 많이 부딪힌 자신에게나 보이는 얼굴이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조금 기꺼운 것도 같았다. 즉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성현제의 목소리에 바로 날이 섰다.
"송태원, 내 질문 안 들려?"
"당신이 그런 질문을 하다니 놀라워서요."
"뭐?"
송태원은 그 영민한 성현제치고는 아주 당연한 질문을 한다는 생각을 하며 성실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당신에게 어울리는 장미가 피어있었고, 그 사이에 선 당신은 예쁘고, 그걸 보면 제가 기분이 나아지니까요. 그래서 가져왔습니다."
…지금 내 귀가 이상하던지 송태원 머리가 이상하던지 둘 중 하나는 돌아버린 것 같은데. 내 귀는 멀쩡하니까 송태원이 드디어 일 때문에 미쳐버린건가?
"그럼 저도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꽃다발 발로 한 번만 밟아보세요. 이왕이면 맨발로요."
이번에는 정말로 말문이 턱 막혔다. 쟤 지금 자기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 알기는 하나? 성현제의 멘탈 지진 여부와 무관하게 송태원은 무슨 1+1=2이고, 내일은 태양이 동쪽에서 뜬다는 얘기를 한 사람처럼 태연했다. 성현제는 정말로 드물게, 세상의 진리를 의심한 머저리가 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잠자코 성현제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던 송태원은 그의 침묵을 거절로 이해했는지 약간 아쉬운 눈치로 돌아섰다.
"의문이 다 풀리셨다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지잉. 작동음이 울리며 포털이 닫혔다. 그 앞에서 선 채로 얼어붙어 한참을 덩그러니 서 있던 성현제가 이윽고 …하! 헛웃음을 터트렸다. 송태원의 근무 시간 외 가정방문은 언제나 단 둘만 있는 시간에 이루어진다. 그건 그러니까, 각성자관리실장에게 할당된 담백한 목소리를 내는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가 사실은 상대가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걸 제 3자의 눈으로 설명할 도리가 없다는 뜻이다. 아―. 아주 괘씸하고 귀여워. 대체 어디서 이런 게 떨어졌지? 헛웃음으로 가늘게 들썩이던 어깨가 어느 순간 몸이 뒤로 넘어갈 때까지 배를 잡고 정신없이 웃어대던 성현제는 흩어진 장미꽃잎을 깔아뭉갠 채 허공에 대고 불현듯 다정하게 속삭인다.
―내일은 좀 더 로맨틱한 얼굴로 꽃을 가져와 줘.
있잖아, 송태원. 나를 좋아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성현제는 가끔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산책을 할 때가 있었다. 체력은 넘치게 좋으니 시간이 허락한다면 발이 향하는 방향대로 걸어나갔다. 차도에서 벗어나 카페거리의 옆을 벗어나 주택가 쪽으로 향했을 때 모퉁이에 꽃집이 하나 보였다. 주말 클래스 안내종이와 꽃다발 주문을 받는다는 안내, 안에는 더욱 많은 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안내문이 여기저기에 붙어있었다.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앙증맞은 선인장을 보고 눈꼬리를 휘었다. 꽃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지.
"어서오세,허억!"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원예용 가위를 들고 있던 주인이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를 내며 성현제를 바라보았다. 텔레비젼 속의 뉴스에서나 보던 인물이 실제로 걸어다니고 있으니 놀랄 법도 했다. 그런 반응이 특이한 것도 아닌터라 성현제는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꽃들의 향연에 시선을 옮겼다. 물을 머금은 상큼한 풀냄새와 꽃향기들이 어루어져 기분 좋은 향긋함이 느껴졌다. 구석에서 웅웅 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냉장고가 미스 였지만 거기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 수입장미 전문점이라고 붙어있더니 과연 장미의 종류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올퍼러브, 마타도어, 카타리나, 코틸리온-... 이름도 알지 못 할 장미가 색색깔로 제각각의 매력을 뽐냈다.
'송실장을 닮았군.'
화려하게 꽃잎을 펼치고 있는 장미들 속에 혼자 아직 봉오리 상태인 장미를 발견했다. 고집스레 입을 꼬옥 다물고 있는 게 잘 알고 있는 꽉 막힌 남자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프로포즈를 하는 연인들을 위한 장미다발로 우선 1000송이 주문하고, 그걸 매일 하나씩 포장해서 배송해줄 수 있겠냐고 하자 직원이 달뜬 표정을 지었다. 아마 세성의 성현제가 연인에게 달콤한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아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기대에는 부흥하지 못 할 것 같다. 수신인은 각성자관리실의 시커먼 곰 앞으로다. 고백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상대가 눈치채지 못 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대외용 휴대폰이 울려 확인했다. 우리 소영이.
"어, 그래. 소영아. 잠깐 산책 나왔는데."
멋들어지는 필기체로 송태원의 신경줄을 잘 긁어줄 카드를 작성하고 있던 성현제의 손이 멈췄다. 전화 너머의 강소영의 목소리도 침묵했다. 들고 있던 펜이 손에서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성현제는 이걸로 계산하라며 지갑을 아무렇게나 직원의 품에 던져주고 가게를 박차고 뛰쳐 나갔다. 강한 충격에 문의 경첩이 어그러져 버렸지만 그런 것 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색자의 사슬을 펼쳐 끝을 건물에 박아넣어 자기 몸을 던지듯 끌어올려 건물을 타넘어 달려갔다.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 송태원은 던전 공략 후 눈을 뜨지 않았고 성현제는 고백조차 하지 못한 사랑을 잃었다.
*
흐릿한 의식 속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의 원인을 찾아 송태원은 이리저리 팔을 뻗었다. 이쯤에 있을텐데 하는 위치를 뒤져보고 자기 옆구리 부근을 더듬어 보았을 때 쯤에는 잠이 깨버렸다. 원하지 않는데 일어난 것 같은 불유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차피 일어나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기에 상체를 일으켰다. 베개를 들어보자 분명히 머리 맡에 두고 잤던 휴대폰이 모닝콜을 울리고 있었다. 아마도 잠결에 울리기 시작한 휴대폰을 집어서 안으로 쑤셔넣어버렸던 것 같다. 기지개를 켜고 어깨를 두어번 돌리고 목 운동까지 한 뒤 씻으러 욕실로 향했다.
어제 저녁으로 먹다가 남긴 미역국과 김치만을 꺼내 밥통을 확인하며 버릇처럼 텔레비젼을 틀었다. 혼자 살다보면 무엇이든 소리가 나는 게 필요했다. 아침부터 총질을 하고 있는 자극적인 느와르 영화가 부엌과 연결되어 있는 거실을 울렸고, 볼륨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소리를 낮췄다. 어제 영화를 보고 잤던가? 대부분 헌터 관련 채널을 틀어두었기 때문에-동료에게는 집에서는 그만 일에서 자유로워지라고 혼났다-스스로에게 의외였다. 익숙하게 헌터채널 번호를 누르자 춤추고 있는 아이돌 무대가 방영되고 있었다. 송태원을 눈을 깜빡였다. 뉴스를 할 시간인데? 다시 눌러보지만 채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고 확인해보니 화면 오른쪽 위에 한국 넘버원 헌터채널을 의미하는 KNB 로고가 있어야 하는데 전혀 달랐다.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채널이 달라지기라도 했나? 오늘은 아침부터 의문점이 많다.
밥을 한숟갈 먹고 바지를 챙겨입고, 한숟갈에 와이셔츠를 입으며 휴대폰을 보았지만 간밤에 특별한 연락이 온 것은 없었다. 포털사이트의 첫 화면도 깨끗했다. 한 두개 정도는 소식이 떠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드문 일이다.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고 할 때 송태원은 정말 이상현상을 깨달았다. 신발장의 손잡이에 차키가 매달려 있었다. 누구씨의 세단에 반파되어 버린 가엾은 차의 열쇠였다. 원래 차키를 여기에 두기는 했지만 차가 없어진지가 3개월이 넘었으니 차키도 버린 지가 옛날이다.
'또 장난이라도 쳐둔건가?'
이런 짓을 저질러둘만한 건 한 명 뿐이었다. 경차에 몸을 꾸겨놓고 타는 꼴을 보면 무심코 엑셀에 발이 올라나간다고 하더니 다른 경차를 마련해준건 한 번 더 폐차 시켜주겠다는 의미인가 싶다. 참 할 일 없는 사람이다. 아니 할 일은 많은데 쓸데 없는 일까지 찾아서 구태여 하는 사람이지.
차키는 무시하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47분 지하철을 타야 넉넉하게 각성자 관리실에 도착하게 되었다. 조금 발걸음을 서둘러 40분에는 지하철역에 도착할 수 있었고 또 하나 더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됬다. 바로 타인으로부터 시선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답답한 남자,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남자라고 욕을 먹고 있기는 했지만 송태원이라고 자기의 위치를 모르고 있는건 아니었다. 국내에 10명도 되지 않는 S급 헌터 중에서도 유일한 국가소속. 연예인이라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공인이었고 출퇴근길에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주시하는 건 익숙하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힐끔 거리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이런 덩치가 서있으니 쳐다봤을 뿐이지 특별하게 관찰하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이게 뭐라고 할까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기분이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연예인 병이라도 걸렸냐며 비웃음을 사겠지.
다음 역은 잠실나루, 잠실나루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지하철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고 있던 송태원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잠실나루? 그럴리가 없다. 잠실나루역은 국내에서 여섯 번째로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던 곳이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많아 민간인 대피가 어려워 병력이 다 투입되어 어떻게든 피해를 줄일려고 애를 썼다. 던전 브레이크가 수습된 이후에도 몬스터의 몸에서 흘러내린 진액이 수습 불가 할 정도로 역을 뒤덮고 녹여버려 할 수 없이 역을 폐쇄하고 말았다. 재건축 이야기는 매분기마다 나와서 근처 집값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었지만 근처 지역에 선로만 놓는 상태로 임시방편을 하고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파트마다 빨간 플랜카드를 걸어놓고 있는 게 일상적인 풍경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잠실나루 역이라니.
송태원의 충격은 뒤로 하고 지하철을 잠실나루역에서 멈추었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이 내렸고 다시 탔다. 송태원은 그 모든 광경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무언가 아주 잘못 돌아가고 있다. 각성자 관리실에 연락을 취해야 할 것 같아 휴대폰을 열어 통화목록에 들어갔을 때 송태원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맛 보았다. 그럴리가 없는데, 그럴리가... 어제 저녁에 통화한 사람의 이름을 송태원은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보았다. 어머니. 간결한 3음절의 단어가 뺨을 날린 것 같이 느껴져 휴대폰을 쥔 손이 떨렸다. 이미 지워버린 연락처였는데, 심지어 그 연락처의 상대와 통화를 했다니. 머리가 어지럽다.
이게 뭐지?
저주?
스킬에 당한 건가?
송태원이 입을 가리고 현기증에 비틀거리자 옆에 서있던 여학생이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아저씨 괜찮아요? 동그랗게 뜨인 눈이 하얗게 질린 표정의 송태원을 닮았다. 그 학생의 얼굴을 확인하고 송태원은 더 놀라고 말았다. 박,예림 양. 그 나이 또래 닮게 천진난만하고 근심걱정 없는 얼굴로 어떻게 제 이름 알아요? 라고 하더니 자기 가슴팍에 달려 있는 명찰을 내려서 확인하곤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개인정보 보호 전혀 안되는거 아니냐고 툴툴 거리면서도 재차 송태원에게 괜찮냐고 물어왔다. 교복치마 아래로 칙칙한 색의 체육복 반바지를 입고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에는 잔뜩 장식이 되어 있는 스마트링이 걸려있었다. 이어폰 대신에 에어팟을 끼고 있는 모습은 여느 다를 것 없는 중학생들과 같았다. 그쯤되자 박예림 헌터의 부모님이 던전쇼크로 사망 했다는 것이 기억났다.
"괜찮습니다."
간신히 답할 수 있었다. 박예림은 미심쩍은 표정을 짓더니 본인 앞자리가 나자 이쪽에 앉으라며 성화를 부렸다. 좁은 자리에 몸을 구겨넣고 그녀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빠른 속도로 타자를 치며 이미 송태원에게 대한 관심을 떠나 보낸 뒤였다. 평범한 중학생인 박예림. 부모님을 잃지도 않고 목숨을 걸고 던전공략을 하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아이. 고민이라곤 점심 급식에 양배추가 더 많은 돈육불고기가 또 나온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없는 책임질 것이 없는 어린아이.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두려워 했던 거지?
에어컨 바람이 볼에 닿자 송태원은 차츰 제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비상식적인 일이 터지지 않는 온전한 일상을 줄곧 바래오지 않았던가. 잃어버린 시간을 붙잡고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모조리 변해버렸다는 걸 알면서도 변하지 않았다고 처절하게 매달리고 있지 않았나. 이쪽이 현실이다. 이제까지 자기가 오히려 꿈을 꿔온 것이다. 눈을 두 손으로 가리고 호흡을 정돈하자 두근거리던 심장의 박동이 안정을 찾았다.
어제 밤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났다. 영화관에서 의도치 않게 3번 정도 감상 했던 애니메이션 영화의 재방송을 하여 그걸 틀어놓으면서 휴대폰 게임을 했었다. 신기록을 재던 중 전화가 와서 기록 갱신을 실패해서 욕설을 했던 것도 떠올랐다. 어머니와 통화를 했던 내용도 생각났다. 반찬을 보냈으니 냉장고에 넣어두라는 잔소리였다. 어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까지 기억이 나자, 동생과 어머니가 죽었던 장례식의 기억이 흐릿해졌다. 마치 영화 속의 장례식 장면을 합쳐 놓은 것처럼 비현실적인 감각이 들었다.
시험에 합격하여 경찰관이 되었던 것도 발령을 받았던 것도, 처음 했던 회식도 전부 기억이 났다. 그 사이에 던전 쇼크니 몬스터니 각성이니 하는 말도 안되는 것들이 끼어들 틈은 전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그런 비현실적인 곳에서 살아왔다고 믿어서 진심으로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게 우습게만 여겨졌다. 내가 미쳤지. 무슨 꿈 내용을 현실로 착각을 다하고. 어제 만화를 보고 자서 그런가?
내릴 역에 도착했고 송태원은 지체 없이 지하철에서 내렸다. 휴대폰에 고개를 박고 있던 박예림은 자리가 나자 냉큼 의자에 앉았다.
경찰서에 들어오자 동료들과 후배들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오늘 결혼식이라도 가냐? 정장을 갖춰 입고 온 걸 보고 상사인 최은영이 고개를 까닥였다. 아침부터 판타지스러운 꿈에 취해서 자기가 각성자 관리실의 실장이라고 믿고 양복을 찾아 입었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 할 것 같아서 입을 옷이 없다고 둘러댔다. 네가 입으니까 무슨 조폭 같다, 야. 깔깔 웃으며 등을 치는 손길이 묵직했다. 조폭이랑 경찰이랑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이야기 한 건 그녀였다.
오늘 2시까지 작성해야 하는 보고서가 있었고, 자긴 그걸 제목만 적어둔 상태로 백지로 비워뒀다는 걸 떠올리고 송태원은 한글 문서를 열었다. 흰 페이지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고보니 어제도 한숨만 쉬다가 덮었지. 해야 하는 일이 있지만 하기가 싫을 때는 마우스로 인터넷 창을 두번 클릭한다. 포털사이트의 메인에 < vs프랑스 전, 캡틴 문현아의 지휘 아래 대승리! > 라는 기사가 떠있었다. 요즘 여자 배구가 승승장구 하는 중이었다. 브레이커 길드장 문현아라니, 요즘 경기 영상을 많이 봤더니 꿈의 설정도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그 사람도 있을까.'
판타지 세계 속에서 절대자처럼 여러모로 과한 설정이 붙어 있는 인물이 떠올랐다. 빛을 받으면 백금실처럼 한올 한올 흩어져 빛을 내던 머리카락과 금을 녹여서 박아놓은 것 같은 노란 눈동자. 그리고 상냥하고 부드러운 미소와는 달리 주변을 모조리 먹어치우던 빛의 사슬과 창까지도. 다른 기억들이 영화 속의 연출 장면 같이 떠오른 거소가 별개로 그 인물에 대한 기억만은 마치 어제 보고 온 것 마냥 생생했다. 그렇게 잘난 얼굴은 영화 배우 중에서도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조합해서 만들어 냈을까.
숨겨지지 않을 덩치를 모니터 뒤에 숨기고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그 이름을 쳤다. 성현제.
성현제 라는 이름의 꼬마들이 피아노를 치는 영상, 학예회에서 무대 공연을 하는 영상과 전북 순창에 있는 마을이름과 기타 학원을 뒤로 하고 인물소개에 익숙한 얼굴이 떴을 때 송태원은 왠지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성현제가 자기 상상 속의 가상인물이 아니라는 게 무언가 의미라도 있나? 한국에 지분을 둔 외국 기업의 CEO 라는 간단한 소개에 왠지 모르게 납득했다. 그에게 잘 어울린다.
'역시 각성 전에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군.'
하지만 기를 쓰고 자기 과거에 대해서 숨겼던 것 치고는 별 것 없다. 다음 번에 만나게 되면 슬쩍 언급이라도 하면서 놀려줄까. 자기가 숨겼던 걸 들키게 되면 그리 유쾌해 할 사람은 아니니 드문 반응을 보여줄지도 몰랐다. 피식 웃음을 흘린 입술이 곧 다물어졌다. 주인의 뜻을 반하고 올라간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내리며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을 하나 실감했다. 이 세계에서 성현제와 자신의 '다음'은 없음을. 성현제와 자신이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타인임을.
'...맞아. 뉴스에서 이 얼굴을 봤지.'
어지간히 충격적인 외모였나 보다. 뉴스에서 얼핏 본 얼굴의 사람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내서 자기 망상 속의 고고한 군림자로 설정을 해두었다니. 세성 길드장의 성현제와 각성자 관리실 실장 송태원. 던전 쇼크라는 세상의 상식이 기틀부터 부숴지는 사건이 없었더라면 성현제와 송태원의 인연의 끈은 절대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한 느낌이 가슴 속에 일렁거리며 퍼졌지만 이윽고 사라졌다. 꿈 속의 관계를 마치 실제인 것 처럼 생각하고 그걸 잃었다고 쓸쓸해다니 정말 병원 가봐야 한다. 이제 일이나 하자. 자기 양 볼을 가볍게 두 번 두드리고 송태원은 하얀 문서를 다시 마주했다.
*
"경찰서가 문화생활을 대체 왜 지원하는건데? 왜! 자료실이나 넓혀줄 것이지."
"눈에 보이는 일을 하고 싶은가 보죠."
"범죄율로 수치를 보여야지!"
주민복지센터에 가야 할 일을 왜 경찰한테 들이밀고 있냐고 그걸 받아들인 청장도 제정신은 아니라고 궁시렁 거리며 나아가는 최은영의 뒤를 송태원은 열심히 따라갔다. 경찰서 옆의 빈상가 건물을 정리하고 시민 만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강의실, 소강당, 수영장 등이 있는 6층 짜리 건물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정말 좋아 보이기는 했다. 그 주최에 경찰서가 끼여 있지만 않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우리가 무슨 떡잎마을 방범대인줄 알아?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캔을 우그러트린 최은영은 그 미친 계획이 실제로 진행될리 없다고 굳게 믿었으나 이번에도 믿음을 배신당하고 말았다.
"세금으로 진행되는 겁니까?"
"우리 쪽에만 하는 게 아니고 전국적으로 추진될 것 같아서 기업투자도 받기로 되있지."
오늘 회의는 그 투자자와의 안면을 트기 위한 자리라고 했다. 점심시간에 먹었던 갈치조림의 국물이 약간 튀어있는 본인 티셔츠를 내려다보며 다른 걸로 갈아입었어야 했나 고민했지만 상사도 동기도 신경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책상이 둥글게 배치되어 있는 회의실에는 쌀과자와 믹스 커피, 과일사탕이 놓인 단촐한 다과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래도 CEO가 오시는데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도 하나 해둬야 되는게 아닌가? 근처 커피는 커피향만 나는 갈색물이기는 하지만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회의는 3시에 진행될 예정이었고 상대방에게서 늦겠다는 연락은 없었기 때문에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정확히 3시가 되자 문이 열리고 기다렸던 인물이 들어왔다.
"성현제라고 합니다. 제가 늦지는 않았지요?"
이제는 흐릿해 진 꿈의 기억이 갑자기 현실로 던져지자 송태원의 솜털 하나까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이 남자가 여기에는 어떻게. 자연스럽게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까지 생각이 떠올라 얼른 부정했다. 꿈 속 세상에는 그럴수도 있지만 실제로 둘은 만난 적도 없는 사이다.
멍하니 얼굴만 보고 있는 송태원의 종아리를 구두발로 걷어찬 최은영 덕에 간신히 일어나서 악수를 할 수 있었다. 살짝 맞닿았던 손이 떨어지고 나자 성현제의 시선이 다른 사람에게 향했다. 그 아무것도 없는 짧은 만남에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 대체 무엇 때문일까.
"저희도 공익에 기여하는 이미지를 만들면 좋죠. 서로 윈-윈 이니 적당히 조율합시다."
회의 동안 성현제가 대화를 이끌어가는 방식이나 단어를 선택하는 방법, 간간히 짓는 표정들까지 송태원에게는 너무 익숙했다.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구체적으로 꿈에서 그릴 수 있었을까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송태원은 성현제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지 못 했다. 꿈 속 세상에서 툭하면 그를 만나서 부딪혔기 때문일까? 그는 상당히 재수없는 성격이었다. 송태원이 소중하게 세탁해서 뽀송하게 말려둔 수건을 꺼내서 자기가 멋대로 써버린 다음에 취향이 구리니 다른 것으로 바꾸라고 카드를 쥐어주는 것 만큼이나 짜증나는 성정이었다. 그러나 서로 위치가 있었고, 또 성현제가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집적거렸기에 비즈니스 관계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많이 얽혔다. 그것 때문이었나. 송태원은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이유를 성현제와 마지막으로 악수하며 느꼈다.
성현제가 자길 '이런' 눈으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 선상에 두는 시선.
기본으로 꾸며내는 가면미소를 짓고 있고 또 가면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게 만들 만큼 연기가 뛰어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눈만은 온전히 숨길 수가 없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송태원을 바라보는 눈만은 달랐다. 노란 버터가 녹아서 고여있는 것 같은 당도 떨어지는 눈동자에 설탕을 뿌려 놓은 것 마냥 흥미로움과 재미를 담은 눈동자가 언제나 저를 향했다. 찌푸려질 때도 있고, 성을 낼 때도 있고, 힐난을 할 때도 있고, 노려볼 때도 있었지만 성현제의 눈에 담긴 호의만은 변하지 않았다. 성현제가 호의를 품고 있지 않았다면 송태원은 진작 던전에 던져 넣어진 다음에 둘 중 하나가 시체로 변할 때까지 나오지 못 했을 것이다.
우습게도 자신은 성현제에게 언제나 특별한 존재였기에 그에게 풍경 속의 타인과 똑같이 취급 받아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에 알지 못 했다. 성현제에게 '모르는 사람' 카테고리로 분류가 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인줄은 상상치도 못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성현제가 애매하게 엘리베이터 문 사이에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문을 잡고 있다고는 하지만 닫히면 위험한데. 재수없으면 사고가 날 수도 있다.
"아까 송태원이라고 했던가? 혹시 어디에서 만난 적 있습니까?"
하대를 할 건지 존대를 할 건지 하나만 결정해줬으면 좋겠다. 송태원은 그런 적 없다고 답했다. 아무튼 현실의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타인이었다. 성현제는 손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짚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그런 눈으로 보는 사람은 처음이어서."
내가 혹시 잊고 있는 사람인가 했지. 자기가 어떤 눈으로 성현제를 쳐다봤다는 건지 모르겠다. 아까부터 멈춰서 있는 엘리베이터가 신경쓰였다. 성현제는 여전히 그 사이의 공간에 애매하게 발을 걸친 채였다. 계속 신경 쓰느니 차라리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송태원이 묵직한 목소리로 한숨을 섞어 입을 열었다.
"일단 나오십시오. 위험합니다."
뭐가 위험하냐고 되묻는 얼굴이라 설명 대신에 그의 팔을 잡고 엘리베이터 밖의 공간으로 완전 끌어냈다. 이끄는 대로 딸려온 성현제의 등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곧바로 다른 층으로 향해버린 엘리베이터를 보니 다른 이용객에게 민폐였겠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 쪽 부분을 누르면 문이 안 닫힌다네."
"잘못하면 손까지 다칠 수 있습니다."
자네 참 특이한 사람이로군? 성현제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데 오늘 저녁에 시간이 되면 식사라도 같이 하겠나? 그가 가벼운 말투로 권했고 송태원은 한 번도 받아들인 적이 없던 그의 요청을 승낙했다.
*
8월 30일. 성현제의 생일날 송태원은 꽃집을 방문하여 예약해 둔 장미꽃다발을 찾았다. 송태원의 품 안에 넘치듯 흘러내리는 사이즈였으니 성현제에게 안겨놓으면 비슷하겠지. 그는 꽃이 잘 어울렸다. 새삼스러운 사실이었지만 세번째 데이트에서 식물원을 방문하여 능소화 사이에 서있는 그를 보고 확실하게 깨닫고 말았다. 꽃이 정말 잘 어울린다. 조금만 더 넋을 놓았으면 꽃의 요정님이라고 할 뻔 했지만 거기까지 주접을 떠는 건 간신히 아슬아슬하게 막을 수 있었다. 그래 데이트. 이번으로 여섯 번째의 데이트였다. 회의를 위해 처음 만난 날 둘이서 저녁식사를 하고 난 뒤로 운명적 연인을 만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둘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이미 꿈 속 세상에서 성현제를 이미 겪어왔기에 송태원은 충분히 그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었고, 세번 째 데이트를 할 때 자기 상상 속의 그를 털어놓았다.
장장 한 시간이 넘게 이어진 이야기를 적절하게 호응해주며 듣고 있던 성현제는 웃으며 박수를 쳤다. 고지식한 줄 알았더니 작가님이기도 했군, 그래. 나한테 한 눈에 반했다는 소리를 그렇게 돌려서 할 필요가 있나? 한 눈에 반했다니. 그럴지도 모른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꽃다발을 안겨주자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잘 어울려 송태원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연인 사이가 되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장점은 정신을 놓고 순수하게 그를 보면서 감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성현제는 꽃다발 사이에 쓰여진 생일축하 카드를 안쪽 주머니에 넣어두고 직원에게 꽃다발을 꽂아놓을 수 있는 큰 유리화병을 부탁했다. 호텔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리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같은 짓을 태연히 저지른 남자가 점심 햇살을 배경으로 말갛게 웃었다.
"원래 생일파티는 크루즈나 호텔이나 산장에서 따로 진행 했다네."
"알고 있습니다."
"이것도 자네 상상 속의 세계의 내가 한 일인가?"
테이블 하나를 두고 서로 마주본 채로 아무 메뉴도 시키지 않고 둘은 대화를 나누었다. 성현제와 있으면 꿈 속의 세상, 상상 속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점점 선명해져 간다는 걸 느꼈다. 기억들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돌아와서 작성했던 서류의 내용이라던가 야근을 하면서 마셨던 커피 잔 수 까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송태원은 자신의 기억이 던전의 공략하고 밖으로 나온 뒤로 끊겨버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던전 내에서 몬스터의 포자에 공격을 당했고 시간차 공격을 하는 종류였던 것인지 뒤늦게 발동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현재는 추측 뿐이지만 돌아가면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전에 말했던 그 세계로 돌아가는 건가?"
이쪽의 성현제도 눈치가 빨랐다. 송태원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성현제이니 그런 걸지도 몰랐다. 이 세계는 송태원에게 완벽하다. 그가 바래왔던 모든 것들이 있었다. 안정적인 생활, 단조로울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 부모님도 여전하시고 친구들의 장례식에 수차례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불안정하고 무엇하나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도 되지 않는 세상이었다. 이런 곳이었기 때문에 답답하기 짝이 없는 송태원이 성현제에게 사랑까지 고백하는 마법같은 일이 일어난걸지도 몰랐다. 다시 돌아가버리면 전과 같은 삭막한 관계가 반복되게 될지도 몰랐다.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돌아갈거지, 태원아."
잔잔한 미소를 띄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성현제에 대해서 쉽게 오해를 했다. 그는 오해를 받는다는 걸 알면서도 오해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자기에게 어떤 기대가 부여되는지 알고 있으니 그 기대에 맞추어서 움직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 이쪽은 제가 만들어낸 형편 좋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여기에도 송태원의 자리는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신에게는 내가 없어져도 이 곳에 원래 있을 송태원이 있을 것이다. 그럼 원래의 세계에 있던 성현제는? 당신을 혼자 두면 안되는데, 생일에 누구보다 쓸쓸해 하는 사람이라는 걸 내가 알고 있는데. 알아차리는 게 늦어버려서 당신을 너무 오랫동안 혼자 둬버렸다.
"가서 사과를 해야 합니다. 몇 대 맞을지도 모르지만요."
"얼굴은 때리지 않도록 해보지."
송태원은 쓰게 웃었다. 조금은 봐주십시오. 성현제 역시 마주 웃어주었다. 고마웠어.
인간의 감각에서 가장 예민하게 먼저 깨어나는 것이 후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송태원도 베이지색의 천장 보다도 먼저 알아차린 건 꽃 향기였다. 오른쪽 손가락을 움찔 거리고 고개를 돌리자 링겔이 꽂혀 있는 팔이 보였다. S급 신체에 링겔이 소용이 있나. 이 바늘도 던전 부산물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일부러 느끼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주변의 감각들이 자기 몸에 쏟아지고, 쏟아진 정보들을 재빠르게 필요순서대로 분류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감각이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따로 있는데도 송태원은 느릿하게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송실장?"
성현제가 침대를 짚고 반쯤 몸을 일으킨 상태로 송태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자기가 누워있는지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었다. 던전 저주? 아니면 몬스터의 스킬에 당했던 걸까? 그런 의문도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며칠 입니까?.."
목 안이 말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잔기침을 하자 성현제가 물을 따라서 건내주었다. 목을 축이고 나니 조금 달랐다. 다시 한 번 날짜를 묻자 얼빠진 얼굴을 한 채로도 8월 30일이라고 답을 해주었다. 그의 생일이었는데 왜 크루즈나 호텔 파티룸에 있지 않고 여기 있느냐는 질문도 나중이었다. 다행이도 시간을 맞출 수 있다.
"다른 세상에서도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현제는 누가 뒷통수를 치면 그대로 눈알이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로 휘둥그레 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무슨 정신나간 소리인가 싶은 얼굴이었고 걱정의 기색을 띄고 있기까지 했다. 뒤늦게 기억난 것은 이 곳의 성현제와 자기는 연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미 내뱉고 만 것을 다시 주어담을 수도 없었다. 송태원은 협탁 위에 놓여진 꽃병에 꽂혀져 있는 장미꽃을 바라보았다. 꽃송이가 크고 탐스러우면서도 싱싱한 것이 금방 둔 것 같았다. 왜인지 저걸 성현제가 관리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슨 대답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허를 질린 듯 성현제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송태원의 말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했다.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성현제의 손을 잡고 다른 세상의 그에게 선물하려고 했을 반지를 떠올리며 약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 온기가 닿았다 떨어지는 게 얼마나 아쉬운지. 성현제는 거부하지 않았다. 송태원은 그것에 감히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사랑합니다. 현제씨."
대답은 없었다. 여전히 손이 잡힌 상태로 멍하니 있던 성현제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며 고백 할 줄은 몰랐네. 혹시 일어나지 않은 것도 생일을 맞추기 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였나?"
만약 그런거라면 자네의 고백에 주먹으로 답해주고 싶은 심정이네만. 이가 세 개 정도 나가면 기분이 풀릴 것도 같군. 성현제에게는 애석하게도 송태원은 그 정도의 이벤트성을 갖추고 있지는 못 했다. 그렇게까지 사람 마음에 능했더라면 이 정도까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송태원은 성현제의 손을 잡은 채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성현제는 이번에도 역시 밀어내지 않았다. 겉으로 티는 내고 있지 않지만 성현제가 무척 당황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당황을 숨기려고 입으로 주절거리며 떠드는 사람이니까.
"놀라셨습니까."
"처음으로 송실장이 나도 따돌리고 푹 쉬는가 했지. 연차를 다 소진하지도 않고 복귀하다니 자네 답네."
"더 길어졌으면 당신이 몇개나 더 사고를 쳐두었겠죠."
성현제는 손을 뻗어 송태원의 짧은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잠들어 있던 2주 동안 조금 길어 손톱에 머리카락이 걸렸다가 떨어졌다. 찌푸려지지 않은 채 자신을 고요하게 응시하는 송태원의 얼굴은 그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라 무언가 이유가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뚝뚝한 남자가 갑자기 사랑을 고백해왔는데 몬스터 스킬에 당해서 인격마저 모조리 바뀌어버린 게 아니라면 원인이 뭘까.
"무슨 꿈을 꿨나?"
"조금 더 있다가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보고서도 써야 하니까요."
"아픈 곳은 없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머리칼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내려와 송태원의 한쪽 볼을 감쌌다. 성현제는 목 너머로 마른침을 삼켰다. 금안에 물기가 머금어져 시야가 흐릿해졌다. 꼴사납게 울지 않으려고 애쓰며 성현제는 입을 열었다. 눈물만 흘리지 않았다 뿐이지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한 채 떨리고 있어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함을 꾸미려고 했던 건 망해버렸다. 네가 일어나지 않을까봐 걱정되서 미치는 줄 알았어. 송태원은 성현제의 손바닥을 자기 손으로 감쌌다. 이 사람을 이렇게 걱정시키다니 몇 번을 사죄해도 모자랄 일이다. 죄송하다고 입을 열자 성현제가 고개를 저었다.
"무사하게 일어났으니까 괜찮네."
"...대답은 안 해주십니까?"
사람을 이렇게 걱정 시켜 놓고는 자기 고백이 우선이냐고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더 입을 열면 엉엉 소리를 내며 울어버릴 것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이자 송태원이 가까이 다가와 눈가에 입술을 댔다. 벅차오는 심경에 죄 없는 입술을 몇 번이고 짓씹었다. 정말 생일 선물로는 너무 과한데, 태원아. 눈가와 볼에 머물던 온기가 입술에 내려 앉았다 떨어졌다.
"생일 축하합니다, 현제 씨."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을 선물해주고 싶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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