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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무덤 *

마카롱

 그에게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어떠한 꽃이든 그에게 안 어울리겠냐만은 그 날, 그가 들고 있는 꽃은 특히 그러하였다. 꽃봉오리를 터뜨린 노란색의 장미꽃들은 그의 품에 안기기 위해 피어난 꽃처럼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정확히는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앞이기에 꽃이 더욱 빛나 보이는 것만 같았다.

 

 노란색 장미 꽃다발을 든 그가 기뻐하며 웃고 있는―그런 꿈을 꾸었던 거 같다.

 

 

-

 

 

 “…뭐 하십니까.”

 

 호출한 사람이 왔음에도 일어나긴 커녕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누워만 있는 성현제를 내려다보며 송태원은 힘 빠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꽃무덤일세.”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단어에 송태원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생기고야 말았다.

성현제는 유리관 안에 누워 있었다. 장신인 성현제를 포용하고도 남을만한 네모난 유리관 안에는 그의 몸을 감싸듯 노란색 꽃잎들이 가득 차 있었다.

 

 노란색의 장미.

 몇 시간 전, 자신이 선물한 꽃다발과 같은 장미의 향에 송태원은 현기증이 나는 듯한 착각을 느껴야만 했다.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그럴 리가. 송 실장이 내게 처음으로 준 꽃다발인데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지.”

 

 매끄럽게 올라간 입술 사이로 나오는 말은 진심인지 비꼬는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특히 지금 눈앞의 광경을 마주한다면 더욱이 그러하였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준 장미 꽃다발에서 뜯어낸 꽃잎들인 건가.

 

 “처음이니 말일세.”

 

 꽃잎에 혹시나 있을 패턴을 찾듯이 성현제의 주위에 있던 꽃잎 하나하나를 훑어보던 송태원의 시선이 다시금 성현제에게로 향했다.

 

 “부여한 의미가 있지 않나 싶더군.”

 

 장갑 낀 양손이 깍지 껴진 채 배 위쪽에 얌전히 올려진 것이 보인다.

 

 “꽃말이라는 것도 있지. 그 중에서 장미는 색깔에 따라 품고 있는 의미가 여러가지지.”

 

 평소처럼 쓰리피스 정장에 코트까지 어깨에 걸친 채로 누워있는 성현제의 모습은 지금 막 잠든 것처럼 보이면서도 유리관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인지 매우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그래, 마치 그가 죽은 것처럼.

 

 “송태원.”

 

 조각 같은 하얀 얼굴에서 그나마 생기가 있는 붉은 입술 사이로 불리어진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게 준 이 장미의 의미는 어떤 거지?”

 

 낯선 것은 그 안에 담긴 감정일지도 몰랐다. 입꼬리가 내려간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분노인 것도 같았고, 슬픔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왜?

 

 성현제란 남자는 송태원에게 언제나 어려운 이였다. 어렵고도 과분한.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걸 알게 되어 연인이 된 지금으로서도 그는 어려운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송태원은 이럴 때 괜한 사족을 붙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임을 알았다.

 

 송태원은 몸을 낮추곤 천천히 그의 얼굴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S급이기에 눈을 감고 있다하여도 자신에게 뻗어오는 손길을 알 터이지만, 성현제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송태원은 조심스럽게 성현제의 얼굴에 자신의 두 손을 닿게 하였다.

 

 “당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내려앉아있는 눈꺼풀을 엄지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성현제 씨의 눈동자 색과 닮아서.”

 

 눈꺼풀 아래에 감춰져있던 금안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에 송태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분한 어조의 말에 노란색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동그랗게 떠진다. 그에 결국 참지 못한 송태원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야 만다. 가벼운 접촉이었고, 입술을 떨어뜨리니 성현제의 불만스러운 표정과 마주할 수 있었다.

 

 “질투, 이별, 사랑의 감소. 이게 노란색 장미의 꽃말이란 건 알고 있나?”

 “그 외에 좋은 뜻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어이 자신의 입으로 그 의미를 듣고 싶은 건가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살짝 신음을 삼킨 송태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변하지 않는 사랑, 완벽한 성취입니다."

 “흐음.”

 

 원하는 바를 들어서인지 성현제의 낯은 조금 누그러졌으나 여전히 그 입가는 미세하게 삐뚤어 보였다.

 

 “역시 꽃말을 알면서 굳이, 이 노란색 장미를 준 건가.

 “잘 어울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송태원은 자신의 아래쪽에 누워있는 성현제를 내려다보았다.

 

 “실제로도 잘 어울리십니다.”

 

 낯설다 느꼈던 기분은 그가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저 멀리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꽃잎들에 파묻힌 채로 누워있는 자신의 아름다운 연인 뿐.

 

 “우쭐해하지 말게. 이 꽃잎들은 자네가 준 꽃다발에서 나온 게 아니니.”

 “제 꽃다발은 잘 보관중이란 말씀입니까. 영광입니다.”

 “뻔뻔해지기까지.”

 “과찬이십니다.”

 “송 실장은 꽃 선물도 참 자네처럼 답답한 걸 주는군.”

 “노란색 장미가 답답하니까?”

 

 반응하는 게 그쪽인가. 성현제는 자신이 답답하다는 것엔 딴죽을 안 걸고, 노란색 장미에 대해서만 묻는 연인을 보며 자신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으니 귀엽다해야할지 얄미워해야할지 1초간 고민했다.

 

 “좀 전에 여러 의미에 대해 말했잖나.”

 “그렇긴 합니다만, 성현제 씨께 드리는 선물을 제가 부정적인 뜻으로 드릴 리 없잖습니까.”

 

 흠, 이건 좀 귀여운데.

 

 “자네 생일에는 자네를 닮은 까만 장미를 선물해주지.”

 “? 무슨 의미입니까?”

 “그건 자네 숙제로 남겨두지.”

 “하아… 그보다 언제까지 거기 누워 계실 겁니까?”

 “자네가 해주를 제대로 안 해서 그렇잖나.”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송태원을 바라보며 성현제가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제대로 해야지, 태원아?”

 

 백설공주입니까. 그 물음 대신 송태원은 순순히 고개를 숙여 성현제의 얇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붉은 혀가 서로 얽매이는 틈 사이로 비친 금안. 그에게 어울리는 장미의 색을 떠올린 송태원은 소리 없이 웃으며 장미향을 깊게 탐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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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씨의 플러팅이

망한 건에 관하여 *

미세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성현제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꽃집으로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았다. 허리를 숙이고 장미를 열심히 살피는 성현제의 옆으로 꽃집 주인이 다가왔다. 벌써 세 달째,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잘생긴 손님은 매일같이 꽃집에 찾아와 꽃을 사 갔다.

 “오늘은 어떤 아이로 드릴까요?”

 “주황색으로 주세요.”

 “열다섯 송이 맞으시죠?”

 성현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게 핀 주홍빛 장미 열다섯 송이가 순식간에 화려한 꽃다발로 재탄생되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리본을 묶으며 손님의 정체를 추리했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말쑥한 옷차림, 흔치 않은 머리와 눈동자 색, 연인에게 선물하는 줄 알았건만 네 번째 손가락에는 반지가 없다. 대체 누구에게 주려고 꽃을 사 가는 걸까. 묶은 리본의 모양을 매만진 주인이 성현제에게 꽃다발을 건넸고, 성현제는 카드를 내밀었다. 영수증은 버려달라는 말과 함께 성현제가 꽃집을 나섰다. 오늘도 꽃집 주인의 궁금증은 해결되지 못했다. 내일 오면 꼭 물어봐야지, 하고 다짐한 꽃집 주인이 성현제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한편 성현제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오늘은 받아주겠지? 도심 위로 내려앉은 석양의 색을 그대로 담은 장미는 오늘따라 유난히 향기로웠다. 작게 휘파람까지 불며 걷던 성현제가 길 한복판에 멈춰서 목을 가다듬었다. 반사경에 얼굴을 비춰보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잘 정리한 성현제는 깊게 심호흡했다.

 “무엇을 도와드…….”

 성현제가 장미꽃을 들고 향한 곳은 뜬금없게도 경찰서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반사적으로 나오던 말이 쑥 들어갔다. 성현제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제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 하나가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옆에서 다른 경찰관들이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야, 야. 또 왔다, 또 왔어. 진짜 징하다. 성현제더러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였지만 정작 성현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송태원 경위님.”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도난 신고 건으로 왔습니다.”

 성현제의 말에 송태원이라고 불린 남자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건 송태원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장장 백 일 동안 아무런 이유도 없이 경찰서에 들어와 송태원에게 데이트 한 번만 해달라며 꽃을 내밀던 남자가 도난 신고? 백 일만에 제대로 된 구실로 경찰서를 찾아온 셈이다. 진지한 눈빛으로 진술서 양식 파일을 클릭한 송태원이 갑작스레 눈가를 찡그리며 재채기를 했다. 성현제는 퍽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송태원에게 말을 건넸다.

 “감기가 안 나으시네요.”

 “예, 뭐…….”

 엣쮸! 엣쮸! 연달아 터지는 송태원의 재채기 소리에 성현제가 입술을 깨물고 부들부들 떨었다. 곰 같이 생겨서 재채기 소리 하나는 기막히게 귀엽다. 엣쮸가 뭐야, 엣쮸가. 한참 코를 비빈 송태원이 잠긴 목소리로 질문을 시작했다.

 “언제, 무엇을 도난당하셨는지 말씀해주십시오.”

 “정확히는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세 달 전쯤에 제 마음을 도둑맞았습니다. 범인은 확실하게 송태원 경위님입니다.”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재미있는 예능 프로그램이라도 보는 것처럼 송태원과 성현제를 지켜보던 경사 하나가 입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대차게 뿜었다. 그 옆에 서 있던 김 순경이 죽은 동태눈으로 커피 자국들을 바라보았다. 저거 내가 치워야 하는데…….

 멍하니 성현제를 응시하던 송태원이 다시 재채기를 시작했다. 에, 엣쮸! 엣쮸! 총체적 난국이었다. 하나는 어디서 배워먹었는지 모를 이상한 플러팅을 해대고, 하나는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사 온 꽃다발 때문에 재채기를 해대고, 하나는 커피를 뿜고……. 아아, 어머니, 대한민국의 미래가 참으로 밝습니다……. 경찰서 내에서 제정신을 유지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 참으로 놀라웠다. 성현제는 눈을 반짝이며 송태원의 대답을 기다렸다.

 “성현제 씨, 계속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찾아, 엣쮸!”

 “말도 안 되는 이유라니요. 저는 진심입니다. 진심이 아니면 제가 미쳤다고 세 달이나 꽃다발을 들고 찾아올 리 없지요. 3만원 이상은 받으실 수 없다고 하셔서 열다섯 송이밖에 못 사지만, 마음 같아서는 이 경찰서 내부를 전부 장미로 채우고 싶습니다.”

 그랬다가는 송 경위님 죽어요……. 사인은 재채기일 걸요. 김 순경은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꾹꾹 눌러담았다. 송태원은 눈가가 붉어질 정도로 재채기를 하느라 성현제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김 순경이 성현제의 팔을 잡았다.

 “오늘은 이만 하고 돌아가세요.”

 “내일은 대답을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송 경위님.”

 취객을 끌어내는 것처럼 성현제를 경찰서 밖으로 데리고 나온 김 순경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웬만하면 안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정말 절박해 보이셔서 말씀드릴게요. 송 경위님이랑 잘 되고 싶으시면 앞으로 꽃다발은 피하시는 게 나을 거예요.”

 “어째서죠? 꽃을 별로 안 좋아하나요?”

 “송 경위님, 꽃가루 알러지 있으세요.”

 성현제가 가벼운 미소를 지은 채로 동상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눈을 깜빡, 깜빡, 깜빡……. 꽃가루 알러지? 계속 재채기했던 게 감기 때문이 아니라 알러지 반응인 거였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움직임으로 경찰서 안을 바라본 성현제의 눈에 충격이 감돌았다. 커피를 뿜었던 경사가 꽃다발을 송태원에게서 멀리 떨어뜨려놓는 걸 보니 김 순경의 말이 사실인 듯 했다. 고백을 할 때는 꽃이 정석이라는 말에 혹한 내가 바보지. 솜사탕을 씻은 너구리 표정이 된 성현제의 등을 김 순경이 슬쩍 밀었다.

 “내일은 꽃 말고 다른 걸 준비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조언 감사합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성현제의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심신의 안정을 위해 상관의 비밀(이라기보다는 쓸데없는 정보)을 흘린 김 순경은 상쾌하게 경찰서 문을 열고 대걸레를 꺼내들었다. 송태원은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의자에 늘어진 상태였다.

 다음 날, 성현제가 진짜 장미로 만든 꽃다발 대신 비누로 만든 장미 꽃다발을 들고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경찰서에 향긋한 비누 냄새가 배일 때쯤 성현제가 들고 오는 건 설탕으로 만든 장미가 되었고, 송태원은 성현제가 천 원 지폐를 접어 만든 장미꽃다발을 여섯 번째로 내밀고 나서야 한숨과 함께 한 마디를 던졌다. 퇴근하고 같이 식사하러 가시죠. 네 달에 걸친 구애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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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녀의 고양이와 향수에 관하여 *

미케

About the Witch's Cats and Perfume

- 마녀의 고양이와 향수에 관하여

 

 

* 가벼운 시체훼손 묘사가 있습니다.

* 감금, 유혈 묘사가 있습니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태원은 샛별이 반짝이는 새벽 3시, 거의 한방중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잠이 그득한 얼굴을 손으로 마른세수하는 것으로 정신을 차리자마자 집을 나섰다. 옆구리에는 꽃을 따서 담을 바구니를 끼고 집 앞의 장미 밭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바구니 안에 뚜껑이 열린 채 담겨있는 투명한 플라스크에 장미 꽃잎에 담긴 새벽이슬을, 그리고 그 이슬을 떼어낸 장미 꽃잎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바구니 안에 담았다.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떠올라 이슬이 모두 말라버리기 전에, 만월이 아직 떠 있을 동안 모든 작업이 신속하게 이뤄져야 했다. 태원의 크고 두터운 손이 생긴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하지만 어떤 때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이슬이 흘러내리지 않게, 꽃잎이 다치지 않게. 태원의 키와 비등할 정도로 자란 다마스크 장미의 향이 눅진한 여름 바람을 타고 온 천지에 흩날렸다. 숨 막히도록 진한 장미향에 어지러움을 느낄 즈음, 태원의 손이 느릿해졌다. 마지막 천 방울의 이슬을 모으고, 마지막 꽃잎을 따는 손이 경건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바구니 안에 꽃잎을 조심히 흘려 넣고, 마지막을 장식하게 해준 탐스런 장미꽃에 미미한 미소와 함께 입을 맞췄다. 꽃잎이 태원의 입술을 부드럽게 스치고 바람결에 바르르 떨리더니 꽃 안에 고였던 이슬이 한 방울, 태원의 입술 위로 흘러 고였다. 맞붙었던 입술 사이를 벌리자 입 안 가득 꽃향기가 범람하며 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혀를 내밀어 젖은 입술을 핥은 태원이 낮은 탄식을 터트렸다. 남자의 몸이 만들어내는 물도 이렇게 달콤하고 장미향을 풍기고 있었다. 그와의 밤을 떠올린 태원의 한 쪽 입 꼬리가 느릿하게 위로 끌어올려져 비릿한 미소를 그렸다.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 태양이 공기 중의 눅진한 기운을 서서히 휘발시켜갔다. 해가 떠오를수록 바짝 말라가는 공기의 마른 기운이 진득한 장미의 향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안타까웠다. 남은 장미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직 코끝에 걸려 있는 눅진한 장미향을 떠올리며 걸었다. 질척이게 젖어 유혹의 향을 뿜어냈던 남자의 몸이 자동으로 떠올라서 길지 않은 길을 걷는 내내 마른 입술을 몇 번이나 적셔야 했다. 집 안으로 들어와 바구니를 내려놓고 간단하게 아침을 차렸다. 오늘은 꽤 오랜 시간 식사를 하지 못할 거라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뭐라도 채워 넣어야 했다. 두툼한 베이컨과 계란 세 개를 프라이팬에 올려 굽고, 진하게 우린 홍차에 장미 잼을 넣었다. 빵까지 곁들여 배를 꽉 채우고 작업실로 꽃이 담긴 바구니를 가져갔다. 깨끗한 물로 꽃잎을 살살 흔들어 닦고 일일이 물기를 닦아 없앤다. 깨끗하게 닦여 말린 장미꽃잎을 김이 펄펄 오르는 증류 장치에 넣고 나면 우선 한 가지는 시간이 해결해준다. 기다림이 끝나고 나면 그에게 잘 어울리는 달콤하고 진한 장미 오일이 태원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나머지 작업을 위해 지하의 작업실로 내려갔다. 이제부터 꽤 까다로운 작업이 시작되기에 벌써부터 뻐근해 오는 고개를 옆으로 꺾어 목 관절을 풀었다.

 재료를 손질하는 것은 섬세한 작업이 필요해서 시간이 꽤 걸린다. 물론 구해오는 것도 쉽지는 않다. 매년, 그가 원하는 향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그에 맞춰서 재료를 선별하는 것도 꽤 까다로운 일이긴 했다. 하지만 손질하는 것은 한 번 시작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멈출 수가 없기 때문에 조금 더 까다롭다. 봉오리가 피기 전에 만들어두었던 장미수에 며칠간 재워두었던 재료를 꺼내 작업대 위에 올려두었다. 우선 새빨간 머리칼을 모아 묶고 매듭 위를 가위로 싹둑 자른다. 일일이 잡아 자르면 양이 조금 더 나오긴 하지만 워낙 풍성하고 길어서 조금 정도는 상관없지 싶었다. 오히려 작업 시간이 많이 단축되니까, 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잘라둔 머리칼을 작업대 뒤편에 걸어 말린다. 손질이 끝날 때쯤이면 말라있으려나. 이제 메스를 들고 하나하나 해체 작업을 시작한다. 태원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작업대에 오른 재료에게서 맑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장미수에 담그기 전에 미리 장기와 피를 빼두었기 때문에 재료의 몸에서 흐르는 것들은 모두 장미향이 났다. 오늘 손질해야 할 재료는 모두 5개. 안구와 머리칼을 비롯한 몇 가지는 남자의 향수에, 더불어 작업할 비누를 만드는 재료로 쓰인다. 지금 손질하는 재료는 꽤 희귀한 재료라 더욱 조심히 손질하고 있다. 붉은 작약의 향을 담은 머리칼, 앰버그리스의 호박색 눈, 옅은 핑크빛의 피부에서는 달콤한 딸기향이 풍겼다. 어디 하나 버릴 곳이 없는 재료의 몸을 하나하나 해체해 비누를 만들 지방을 모아두고, 향의 원료로 쓰일 것들은 유리병에 따로 모아두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작은 플라스크로 만들어진 증류 장치에 하나하나 담아 불에 올려두고 다른 재료들을 손질했다.

 연한 여인의 지방을 녹여 남자의 피부를 돋보이게 만들 비누를 만드는 것도 꽤 까다로운 작업이다. 우선 사람 하나 분량의 지방의 양이 적은 것이 문제였다. 너무 비대한 것은 향이 좋지 않아 적당한 체구와 적당한 지방을 가진 것들을 선별하기란 생각보다 까다롭다. 일 년 내내, 돌아다니며 재료들을 선별하고 장미가 피는 계절에 맞춰 손질해야 하는 것이 꽤 귀찮기도 하지만, 곧 찾아올 남자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 수고로움은 감수할 수 있었다. 오늘 들어온 재료들에는 귀한 재료들이 은근히 섞여 있었다. 사향이나 용연향은 정말 드문 것들인데 운이 좋았달까. 하루 종일 재료를 손질하고 증류해 향을 모으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자정이 넘을 시간이 되었다. 아침에 먹은 식사 후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뱃가죽이 등가죽에 달라붙을 지경인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남은 재료들을 고이 분류해서 넣어두고 오늘의 작업은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지하실에도 장미향이 만발해있지만 오일을 뽑고 있던 집 안은 정말 달달한 장미 속에 파묻힌 것처럼 진한 향이 온 집안을 떠돌고 있었다. 그 속에 끼어든 이질적인 향을 느낀 태원의 입가가 부드럽게 허물어졌다. 지하실 계단을 올라가 향기가 퍼지고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나무로 된 식탁 의자의 등받이를 가슴에 안듯이 앉아 등받이 위에 고개를 기댄 채로 잠들어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올해는 방문이 평소보다 빠르다. 보통은 태원의 작업이 다 끝날 때에야 와서 장미가 지기 전까지 머물다 가더니 어쩐 일로 장미가 피기 시작하자마자 왔지. 의문과는 별개로 남자의 모습이 반가웠다. 꿀빛 머리칼을 길게 뒤로 늘어트리고 헐렁한 튜닉만 입은 남자는 이미 샤워까지 마친 상태였다. 제 집인 것처럼 늘어진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조용히 다가가 아직 물기가 남은 남자의 머리칼을 들어 입술을 문질렀다. 남자가 가진 연한 풀 향기와 장미향이 적절하게 섞여 태원의 코를 가득 채웠다. 굽혀진 등에 뜨거운 손바닥을 대어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남자의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다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밝은 황금색 눈동자가 천천히 드러났다. 사람의 것이 아닌 세로로 길쭉한 동공이 태원을 확인하고 잠시 크게 벌어졌다. 그리곤 곧이어 눈이 길게 휘어 올라오며 야살스러운 미소가 남자의 얼굴 가득 떠올랐다.

 “작업 중인 것 같길래.”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음, 태원이 네가 세 번 쯤 사정하고 네 번째 박기 시작할 정도?”

 남자의 이상한 시간관념에 태원이 낮게 웃었다. 보드라운 뺨에 손을 대어 살며시 주무르자 남자의 고개가 손바닥을 향해 기울어졌다. 나른한 한숨과 함께 나른한 고양이 같이 갸르릉거리는 소리가 남자의 목 안에서 울렸다.

 “성현제 씨, 식사는요.”

 이름이 없던 남자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은 태원이었다. 아직 작은 뿔을 숨기지 못할 무렵의 남자를 잠시 떠올리자 웃음이 흘렀다. 그 때는 이 남자도 꽤 귀여웠었지. 태원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동공이 좁혀진 눈이 가늘어졌다.

 “내 식사는 태원이 네가 줘야지. 네가 내 주인이니까.”

 “일 년 내내 오지도 않으면서 무슨 소립니까. 두 집 살림하는 고양이도 아니고.”

 “하지만, 내 이름도, 내 얼굴도 네가 만들었지 않나. 그럼 책임을 져야지, 책임을.”

 옛 연인을 쏙 뺀 얼굴이 야살하게 웃는다. 빨간 혀가 아랫입술을 훑고 지나가 타액으로 젖은 붉은 입술이 더욱 붉게 반짝였다. 손바닥에 볼을 더욱 밀착해 부비며 올려다보는 남자의 입술이 유혹하듯 오므라진다.

 “배고파, 주인님.”

 태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물론 남자가 오기만을 일 년 내내 기다리긴 했지만 이렇게 나오면 조금 얄미워지는데. 생글거리는 남자와 시선을 맞추던 태원의 입에서 가늘게 한숨이 흘러 나왔다. 역시, 이 얼굴에는 이겨먹을 수가 없다. 결국 태원을 향해 팔을 벌리는 남자를 안아들고 입을 맞추며 침실로 걸음을 옮긴다. 작년에 가져간 향수가 남자의 살에서 약한 잔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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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 미만 구독불가

* 성기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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