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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그 애 *

방생

그때 그 애

w.방생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열여섯의 나는 방학 숙제를 위해 동네 뒷산에 올랐다. 멀쩡한 등산로를 놔두고 수풀을 헤쳐 도착한 곳은 나만이 아는 아지트였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작은 공간. 제법 부드러운 잔풀들이 카펫 마냥 깔린 그곳에 벌러덩 드러누우면 좁은 방의 하얀 천장이 아닌 드높은 하늘의 파란 조각이 나를 덮었다. 나는 산새를 오르느라 거뭇해진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우고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나무를 그리고 나뭇잎 사이를 파고드는 햇빛을 그리고 푸르게 뒤덮인 땅과 작은 들꽃을 그렸다.

 

 

 

 "얘."

 

 

 

 상상도 못한 말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길도 없는 이런 산속에 대체 나 말고 누가 있는거지? 시선 끝에 닿은 건 특이한 생김새를 한 내 또래의 남자 애였다. 내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그 애는 작게 소리내어 웃더니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옆에 웅크리고 앉은 아이는 고개를 빼어 내 그림을 들여다봤다. 그 애의 머리카락이 볼에 닿았다. 간지러웠다.

 

 

 

 "그림 잘 그리는구나, 너."

 

 "그, 그래...?"

 

 "내가 본 그림 중에 제일 잘 그렸는걸."

 

 

 

 나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쑥스러웠다. 누군가에게 그런 식의 칭찬을 받기란 난생 처음인 탓이었다. 빨개졌을 게 분명한 내 얼굴을 그 애는 조금 멍하게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내려 마주친 눈동자는 놀랍게도 황금의 색을 띠고 있었다. 속눈썹도 눈썹도 머리카락도 전체적으로 밀빛이었다. 햇살을 의인화한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 애는 빛이 났다.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현실감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꿈을 꾸는 기분이 든다. 환상의 존재를 목격한 순간처럼.

 

 

 

 "이름이 뭐야?"

 

 "...송태원."

 

 "좋다."

 

 

 

 뭐가? 나는 묻지 못했다. 스케치북에 들어갈 기세로 고개를 파묻고 연필을 사각대기만 할 뿐이었다. 어쩐지 귀가 막 뜨거웠다. 나를 계속 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볼이 따가웠다. 하지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아주아주 꼴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을게 분명했으니까.

 

 

 

 "여기 자주 와?"

 

 

 

 내가 물었다. 자주 오는 애라면 내가 못 봤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봤다면 내가 잊었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나.. 예쁜 애를. 만일 내가 잊은 거라면 가문의 수치라고 아버지께 혼이 나도 쌌다.

 

 

 

 "종종."

 

 "그래? 근데 난 너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자신이 없어서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여전히 시선을 스케치북에 고정한 채였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무슨 소리야? 우리가 만난 적이 있는거야?"

 

 "글쎄."

 

 

 

 의외의 대답에 놀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 애는 내게 바짝 붙어앉아 나를 올려보았다. 무릎을 끌어안은 손이 참 희었다. 흙 한번 안 만져본 것 같은 손이었다. 아이는 이제야 나를 보는구나. 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때 나는 또 넋을 놓았던 것 같다.

 

 

 

 "말도 안 돼. 내가 널 봤다면 기억 못 할 리 없어."

 

 "왜?"

 

 "왜냐니 너 같이..."

 

 

 

 나는 헙,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쓸데없는 소리를 할 뻔 했다. 그것도 방금 만난 처음 본 애한테.

 

 

 

 "나같이?"

 

 "아무것도 아니야."

 

 

 

 연필을 고쳐잡고 그리다 만 들꽃의 꽃잎을 마저 그려나갔다. 더이상 그 애에게 시선을 주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 대화가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 제법 강렬한 바람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고요해진 주변에 슬그머니 눈을 떴을때 그 애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참 많은 걸 후회했다. 이름을 묻지 못한 것, 어디 사는지 묻지 못한 것, 나이를 묻지 못 한 것, 날 바라보는 그 애를 줄곧 무시하고 스케치북만 쳐다봤던 것, 그리고 너 같이 예쁜 애를 어떻게 잊냐 말하지 못한 것. 너 참 예쁘게 생겼다고 말할걸. 다음에 다시 만나면 꼭 말해주리라 다짐했다.

 

 

 개학을 했다. 열여섯이면서 대한민국의 중학생이자 예비 고등학생이기도 한 나는 아주 바빠졌다. 학원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애를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아지트는 커녕 집에 있는 때조차 얼마 안 되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매일밤 그 애를 떠올렸다. 초조했다. 왠지 그 애가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애를 만나러 가야했는데,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몇달이 지났다.

 

 

 내가 다시 아지트를 찾았을 때 산은 듬성듬성 눈이 덮여있었다. 그 애를 처음 본 날이 장미 핀 여름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차디 찬 산속을 홀로 걸었다. 서리 내린 앙상한 가지들 사이로 하얗게 물든 아지트가 보였다.

 추위에 못 이긴 나무와 풀은 그 녹빛을 잃었지만 대신 눈부시게 흰 빛으로 반짝였다. 역시나 누구도 발 들이지 않았는 지 소복히 쌓인 눈의 카펫에는 발자국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애는 아직 오지 않은 듯 했다. 난 아무 데나 주저 앉았다. 고개를 들어 본 하늘은 화창했지만 겨울 특유의 차분한 색감이었다. 날이 많이 추웠다. 그 애가 안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태원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당 못하게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에 온몸이 진동했다. 시선의 끝에는 그 애가 있었다.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너... 춥지 않아?"

 

 "괜찮아."

 

 "괜찮다니..."

 

 

 

 코트를 벗어 그 애의 몸에 둘렀다. 그 애는 눈을 몇번 깜빡이더니 고맙다며 웃었다. 앞섶을 조금 여며주며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그 애는 또 조용히 내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애써 무시하며 옷을 좀 더 만져주고는 도로 뒷걸음쳤다. 그러자 이번엔 그 애가 한발 다가왔다.

 

 

 

 "오늘은 그림 안 그려?"

 

 "아.. 어 오늘은.. 근데 너 어디 살아? 동네에서 보질 못해서... 혹시나 하고 찾아봤는데 네가 없더라고."

 

 "나 찾았어?"

 

 "어? 아 뭐..."

 

 

 

 그 애가 기쁜듯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웅크리고 앉았다. 그런 자세로 앉는 걸 못하는 나는 그냥 아까처럼 털썩 엉덩이를 대고 다리를 뻗어 앉았다. 그러자 그 애가 키득키득 입을 가리고 웃었다. 휘어지는 눈매가 초승달을 떠오르게 했다.

 

 

 

 "늦어서 미안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색 하늘에 하얀 구름이 지나갔다. 이번에도 그 애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안 나서 애먼 구름만 구경했다. 그 애는 말이 없었다. 뽀드득거리는 눈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난 당혹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길게 뻗은 내 두 다리 위에 올라앉은 그 애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닿았다. 남들은 이럴때 귓가에 종소리가 울린다는데 나는 그런 것도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 본능적으로 그 애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미지근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 애를 뒤로 밀어 넘어뜨렸다. 찬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그 애 위에 올라탄 자세로, 그렇게 내려다 보게 된 황홀경. 달빛을 부숴서 바른 것 같은 컬러의 머리카락이 시리도록 흰 눈밭에 비단처럼 흐드러졌다. 날 바라보는 황금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일렁였다.

 

 

 

 "아까 바람 불었을 때."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이마로 흘러내린 그 애의 머리칼을 조심히 거두었다. 언뜻 스친 피부로 미약하지만 온기가 느껴졌다.

 

 

 

 "사라져버리는줄 알았어."

 

 "내가 사라질 것 같아?"

 

 "응. 그때도 그렇게 사라졌잖아."

 

 "정작 한번 가더니 한참동안 안 온 건 너면서."

 

 "미안해."

 

 

 

 그 애가 반쯤 몸을 일으켰다. 나는 조금 뒤로 물러나주었다. 등 뒤로 땅을 짚어 상체를 일으킨 그 애는 다시금 내게 입 맞춰왔다. 그때 난 참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고작 두번째 만남이었는데, 태어나 누군가와 입을 맞춘 것 또한 처음이었는데, 그 모든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심지어 오랜만인 것 같기도 했다. 그 애와, 그 애와의 입맞춤과, 모든 접촉이... 그래서 몇번이고 그 애의 입술을 감춰물었다. 원인 모를 감정이 가슴께에서부터 피어올랐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 애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가까스로 억눌러 참았다..

 

 

 

 "그만."

 

 

 

 그 애가 단추를 풀어내려는 내 손을 멈췄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 애를 바라봤다. 부드러운 검지 손가락이 내 입술을 살포시 눌렀다.

 

 

 

 "아직은 안 돼."

 

 "왜? 우리가 너무 어려서?"

 

 "하하, 여전히 귀엽구나, 너. 그런 이유가 아니야."

 

 "그러면?"

 

 

 

 그 애가 나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엉거주춤 따라 일어선 나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

 

 "그때가 되면 꼭 먼저 알아봐주기야."

 

 "...응. 반드시 내가 먼저 널 알아보겠어. 약속해."

 

 "약속 대신 이걸 가져."

 

 

 

 그 애가 내민 것은 이슬이 맺힌 싱싱한 붉은 장미였다. 엄동설한에 말이다. 어디서 꺼낸건지 의심조차 하지 못한 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특이하게도 가시가 없었다.

 

 

 

 "다시 만날때까지 시들지 않게 잘 돌봐줘."

 

 "뭐? 그건 무리야! 꽃이 얼마나 빨리 시드는데..."

 

 "그러니까 네가 잘 돌봐줘야지. 어렵지 않을거야."

 

 

 

 불안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손에 쥔 한송이의 장미가 그렇게나 무겁게 느껴지긴 또 처음이었다. 그 애는 자신없어 하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다시 만나는 날, 이 꽃을 너에게 줄게."

 

 

 

 그때까지 잘 돌볼테니까, 너는 꼭 받아주기야. 알았지?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꽤나 결연한 태도로 말했던 것 같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는 상황에서 알 수 없는 확신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그 애는 이내 맑은 미소로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지금까지 중에 가장 예쁘고 화사한 웃음이었다.

 나는 장미를 바라보았다. 드물게 탐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애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찰나 바람이 불었다.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누구도 없었다. 눈밭에 떨어진 코트만이 그곳이 그 애가 서 있던 자리임을 알렸다.

 

 

 그날 집에 돌아간 나는 또 후회를 거듭했다. 이름을 못 물어봤다. 그게 너무 후회 돼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찔끔 울었다. 그 언젠가까지 그 애를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직감에 후회는 본전의 곱절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애를 꼭 찾아내겠노라고 그 애의 장미를 걸고 맹세했다. 그렇게 십년이 넘게 흘렀다.

 

 

 

 "성현제 씨."

 

 

 

 쏟아지는 태양빛이 따가운 지 팔을 들어 그늘을 치고 있던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투박한 내 손에 들린 한송이의 붉은 장미가 그렇게 안 어울릴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봤다가 장미를 봤다가 다시 나를 봤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까지 했다. 소매가 곱게 접힌 팔을 서서히 내리자 믿기지 않는다는 투의 표정이 훤히 드러났다.

 

 

 

 "여기 성현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당신밖에 더 있습니까."

 

 "나? 정말 나란 말인가?"

 

 "약속했잖습니까."

 

 "무슨...?"

 

 

 

 그의 얼굴이 답지않게 황당함으로 물들어갔다. 어찌 반응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받아주시기로요."

 

 "내가?"

 

 "네, 당신이요."

 

 

 

 들고 있던 SS급 아이템을 그에게 더욱 내밀었다. 여즉 이슬이 맺힌 상태였다. 당연히 시들지도 않았다. 그는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긴, 나라도 그럴 것이었다. 괘씸하게도 그는 어느 것 하나 아는게 없는 것 같으니까. 뭐, 상관없었다. 내가 전부 기억하니 그걸로 되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러자 그가 더욱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 나는 그를 향해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인 장미를 들어올렸다. 아직 개발되지도 발견되지도 않은, 절대 시들지 않는 SS급의 장미를.

 

 

 

 "이 장미는... 자네가 산 건가?"

 

 "살 수 없는 겁니다."

 

 "무슨 말이지?"

 

 "아직 세상에 없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자네는 그걸 어떻게 가지고 있나?"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받아주시기 전까지는요."

 

 "자네답지 않게 치사하게 나오는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내 손에서 장미를 빼내어 갔다. 시선을 장미에서 뗼 생각도 못한 채 코끝 가까이에 가져다 댄 그는 여지껏 보인 적 없는 얼굴을 했다. 들뜬 것 같기도 하고,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조금은 설레어 보이기도 했다. 성현제 그는 장미와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울컥한 기분과 함께 심장이 뻐근해졌다. 그리고 한순간이었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품에 그를 안았다.

 부정과 고민 속에 보낸 긴긴 밤들. 녹음 진 여름과 눈 내린 겨울을 지나 끊임없이 반복된 무수한 계절. 바랜 줄 알았으나 바래지 않은 감정. 어째서 사랑은 나이 들지 않는걸까.

 

 

 

 "약속 지키십시오."

 

 

 

 뜨겁게 그의 숨을 삼켰다. 꺄악!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이따금 셔터음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이렇게 못 박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제 다시는 안 보내드립니다. 그렇게 아십시오. 그가 들고 있던 장미를 떨어트렸다. 가벼워진 손이 조금 멈칫거리다 이내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나 또한 그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무더운 여름 태양 아래 우린 그렇게 호흡을 나누었다.

 

 

 사실 '그때'의 성현제는 대체 무엇이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어쩌면 평생 모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괜찮다. 아득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찾아 낸 장미의 주인. 이제는 절대로 그를 내 시야에서 놓칠 일 없을테니까 말이다.

 

 

 

 

 

fin.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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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여름밤의 꿈 *

1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그만두자.”

 

 무엇을 말입니까. 태원은 반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은 저 밑으로 침잠하여 단단히 굳어진 하지 못한 말들이 이룬 퇴적물 속에 가라앉고 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처럼. 그에겐 하나의 선택지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무엇을? 무엇을 안단 말인가. 태원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정원에 핀 장미가 참으로 그와 잘 어울린다고 멍하니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서야 태원은 깨달았다. 아, 우리 헤어졌구나. 그 사람이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구나. 태원은 앞으로의 날들이 매우 긴긴밤이 될 것을 직감했다.



 

2

 

 휘청, 눈앞이 어지러웠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태원은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훔쳤다. 그 위로 새로이 흐르는 피가 다시 시야를 가렸다. 여기서 죽는 건가. 태원은 실소했다. 이전에는 돌아갈 이유가 있었고 그것보다 더 전에는 쓰러지지 않을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글쎄. 태원은 점점 가라앉으려는 몸을 이끌고 한 걸음 한 걸음 게이트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러나 게이트는 너무 멀었고 태원의 시야는 한 번, 두 번, 깜박이다가. 아.



 

3

 

 송태원. 정신 차려, 제발



 

4

 

 뭐지? 멍한 머리로 생각하던 태원이 눈을 깜박였다. 하얀 천장… 소독약 냄새… 병원? 한쪽 팔이 무거웠다. 태원이 삐걱거리는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자 색소 옅은 동그란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성현제 씨…? 태원은 제 팔을 붙잡고 엎드려 잠든 이를 부르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부르기도 전에 현제가 부스스 일어났다. 음… 졸음에 겨운 현제의 눈과 마주쳤다. 잠시 멍하니 상황을 파악하던 현제의 얼굴에 대번에 노기가 서렸다.

 

 “송 실장, 자네 정신이 있는 건가?”

 

 목숨이 여러 개야? 그 앞에 뛰어들 생각을 하다니 미친 게 아니고서야 그런 짓을 하냔 말이야. 쉴 틈 없이 쏘아붙이는 목소리에 태원은 어리둥절한 낯이 되었다.

 

 “당신이 왜 저를 걱정합니까?”

 

 “왜? 왜냐고? 허…”

 

 눈앞의 상대는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태원은 억울했다. 헤어지자고 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걱정을 합니까? 제가 걱정이 되는 것은 맞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것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태원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현제가 태원의 표정을 보더니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머리를 많이 다쳤나 보군. 의사를 불러와야겠어.



 

5

 

 “기억 상실이라니.”

 

 S급 중 최초로 저주가 아닌 이유로 기억을 잃은 소감이 어떤가. 현제가 빈정거렸다. 걱정에 단단히 화가 난 연인을 끌어안았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현제가 태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래, 다시는 그러지 마. 가슴께에 올려진 태원의 팔에 자신의 팔을 겹쳐 손등 위로 깍지를 꼈다. 가습기가 백색 소음을 내었다.



 

6

 

 내게로 돌아와 줘.



 

7

 

 송태원은 성현제에게로 돌아갔다. 언제나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고 마는 진자처럼. 멀리 가지도 못했다. 긴 냉전과 말다툼과 기어코 떨어뜨린 눈물 몇 방울, 그리고 토해내고 만 솔직한 말끝에 태원의 품속에 영원히 간직될 것만 같았던 반지는 원래 자리했어야만 하는 곳에서 당당하게 빛났고 현제는 다시 눈물을 떨궜다.

 

 “당신이 그렇게 잘 우는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누가 할 소릴.”

 

 그래. 사실 태원도 울고 있다. 현제가 태원의 눈가를 엄지로 쓸었다. 내가 살다 살다 송 실장이 우는 날도 다 보는군 그래. 그만하시면 안 됩니까? 태원이 부끄러워했다. 싫은데. 현제가 킬킬 웃었다. 제 볼을 붙잡은 두 손을 붙잡으며 태원이 말했다. 눈이나 감으십쇼. 눈물범벅에 무드라곤 없는 아주 엉망진창인 프러포즈였지만 키스는 어느 때보다도 달콤했다.

 

 둘은 곧 결혼할 것이다. 옆자리에 누운 현제가 태원을 보며 웃었다. 태원도 마주 보고 웃었다.



 

8

 

 이쪽으로 와.



 

9

 

 싫습니다. 지금 정말로 해보겠다 이건가? 태원은 꿋꿋하게 좀 더 높이 팔을 들었다. 사슬 사용은 금지입니다. 알고 있다네. 치사하긴. 태원은 현제와 씨름 중이었다. 던전으로 어려진 그에게 술은 안 된다는 태원과 어차피 취하지도 않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현제가 한참을 팽팽하게 맞선 결과 태원은 현제에게 자신에게서 와인병을 뺏으면 마셔도 된다는 허락 아닌 허락을 받았다.

 

 앞으로 한 달. 식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이런 저주에 당한 연인이 태원은 못내 속상했다. 어떤 모습이든 태원이 사랑하는 그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 저주가 그를 구하려다 걸린 것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기어코 병을 뺏어가 잔에다 꼴꼴 따르는 그의 팔다리는 평소에 비해 훨씬 작았다. 가늘고, 뽀얗고. 쥔 손에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 같다. 태원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태원아, 마실래?”

 

 현제가 천진난만한 낯으로 잔을 흔들었다. 태원은 가라앉은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안 된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젠 나 혼자 한 병을 다 비우라는 건가? ...한잔만입니다.



 

10

 

 “태원아...송태원…”

 

 몸이 어려진 탓인지 살짝 빨개진 볼을 보고 태원이 병을 숨겼으나 이미 때는 늦어 현제는 헤실헤실 웃으며 연신 태원의 이름을 불렀다. 태원이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끝까지 말렸어야 하는 건데.”

 

 “하하.”

 

 앳된 얼굴의 현제가 테이블에 뺨을 댄 채 태원을 올려다보았다. 아, 시원해서 좋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태원아.”

 

 “네.”

 

 “태원아…”

 

 “네.”

 

 “태원아,”

 

 내가 싫어졌어? 생각에 잠겨 현제의 말에 반쯤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태원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 그게 무슨…”

 

 “집에 온 뒤로 나한테 손 하나 안 대잖아.”

 

 아무리 자네여도 그렇지 안아주는 법도 없고 굿나잇 키스도 없고. 어린 나는 싫은가? 그렇게 많이 어린 것도 아닌데... 어리광을 부리듯 늘어지는 끝말이 태원의 목울대를 한번 휘감고 지나갔다.

 

 “아닙니다. 다만… 다만, 당신이 너무,”

 

 하얗고 가늘어서… 그래서 만지면 부서질 거 같아서. 태원을 말을 하려다 말고 삼켰다. 지금 상태의 그가 화를 낸다면 태원은 그 낯에 대고 받아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현제는 금방 눈치챈 것 같았다.

 

 “송태원. 날 봐.”

 

 어느새 현제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아니, 그가 현제에게로 당겨졌다.



 

11

 

 태원아.



 

12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빛으로 꾸며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일 것이다. 태원은 버진 로드 앞에서 저를 돌아보는 현제를 보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우십니다…”

 

 넋을 놓고 대답하는 태원을 보며 현제가 웃었다. 태원아. 이렇게 좋은 날 왜 울어. 태원이 눈부심에 눈을 감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 얼빠진 소리가 났다. 그렇게 좋아? 현제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결혼 안 할 거야? 그럴 리가요. 조금 다급하게 대답하자 현제가 더 크게 미소지었다. 가자. 태원은 손을 마주 잡았다.



 

13

 

 태원은 눈을 떴다. 한 쌍의 금빛이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안녕.”

 

 “안녕.”

 

 시트 아래로 드러난 벗은 가슴이 울긋불긋했다.

 

 “성현제의 남편으로 눈을 뜬 첫날의 소감이 어떤가.”

 

 “음…”

 

 평소랑 다를 게 없네요. 현제가 태원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14

 

 오늘은 말이야……



 

15

 

 태원은 현제가 제 머리를 쓸어주며 조곤조곤 얘기하는 것이 좋았다. 지나가다 본 인형이 너를 닮아서 네가 보고 싶었어, 파트너가 그러는데 기승수 사육소에 새로 들어온 어린 마수가 하는 짓이 매우 귀여워서 기승수 사육소 사람들의 사랑을 맘껏 누리더니 살이 빵빵하게 올랐다더라. 휴일엔 느지막이 일어나 서로에게 기대어 도란도란 얘기하는 것이 어느덧 그들의 일상이 되었다.



 

16

 

 태원아. 제발. 내게 돌아와.



 

17

 

 검토해야 할 서류의 산에서 눈을 든 현제가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며 기대었다. S급의 몸은 지치지 않았더라도 정신은 신체만큼 튼튼하지 않기에 피로함을 호소했다. 무거운 머리에 미간을 꾹꾹 누르다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흐드러지게 핀 붉은 장미들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5월도 다 갔나. 정원에는 여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장미가 한가득이었다. 현제는 턱을 괴었다.

 

 ‘오늘은 장미가 좋겠군.’

 

 허락이 떨어진 뒤로 현제는 일주일에 한 번은 태원을 만나러 갈 때 꽃다발을 사 들고 갔다. 태원은 별 반응이 없었지만 내심 좋아하고 있을 거라고, 현제는 생각했다. 태원이 생각하는 것보다 현제는 태원을 잘 알았다.



 

18

 

 빨강, 분홍, 하양, 색색의 장미가 늘어져 있는 꽃집 앞에서 장신의 남자가 고민에 빠져있었다. 한참 후 현제가 고민 끝에 고른 것은 빨간 장미였다.

 

 “애인 분이 좋아하시겠어요.”

 

 탐스럽게 핀 붉은 장미들을 심플한 포장지로 감싸며 꽃집 주인이 말을 붙였다. 처음 세성 길드장이 찾아왔을 때는 얼어붙어 간신히 필요한 말만 했었으나 이제는 그의 존재에 나름 적응하여 간간이 말을 건네왔다.

 

 “좋아하길 기대하고 있다네.”

 

 현제가 미소지었다. 오늘 장미가 참 예쁘게 피었거든요.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주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여깄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한 손에 꽃다발을 쥔 현제가 꽃집을 나섰다. 그런 다음 현제가 향한 곳은 세성 산하의 병원이었다. 병원 입구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익숙한 층을 눌러, 지난 11개월간 익숙하게 드나든 병원의 복도를 지나 익숙한 번호의 문 앞에 섰다.

 

 “들어가겠네.”

 

 잠깐 기다려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현제가 문을 열자 산소호흡기를 낀 검은 머리의 남자가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현제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태원아, 나 왔어.”

 

 현제가 부르는 소리에도 태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조차 익숙하다는 듯 현제는 꽃다발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고 커튼을 걷으며 말했다. 오늘 밖을 봤는데 장미가 아주 예쁘게 피어 있었어. 그래서 네가 생각났지. 현제는 흐트러진 100송이의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들고 또한 흐트러진 정장 차림으로 숨을 고르던 그 때의 태원을 떠올리며 픽 웃었다. 백일이라서 백송이랬었지. 또다시 연인의 야근으로 파토 난 데이트에 우울해하고 있던 찰나 백일기념이라는 기대도 않고 있었던 깜찍한 짓을 했더랬다. 그 꽃다발은 성한 꽃을 골라 잘 말려져 지금도 침실 한구석을 장식하고 있다.

 

 꽃병에 물을 채워 포장지를 풀어 꽂고 가지런히 정리했다. 스치는 장미 향기가 싱그러웠다. 지난 일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늘 침대 옆에 놓여있던 의자가 당겨졌다. 장갑을 벗은 손이 이불 위에 늘어진 조금 마른듯한 손을 잡았다. 조곤조곤 그간 있었던 일을 늘어놓는 남자의 목소리가 병실을 채웠다. 길드에 새 기승수가 들어왔다네. 저번에 말했던 그 아이야. 워낙 힘이 넘쳐서 유진 군이 키우는 데 고생 좀 했지. 소영이가 노아 헌터에게 데이트를 신청해서 길드가 다 뒤집어졌다네. 자기는 리에트 헌터에게 걸었다며 투덜대는 길드원들이 꽤 많이 있었지. 아, 예림 양과 도련님이… 도란도란 한참을 이야기하던 현제가 감싼 손을 고쳐잡았다. 오늘은 협회와 조금 말썽이 있었다네. 엄지로 손등을 쓸며 작게 웃었다. 자네가 알고 싶어 할 거 같아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그가 말을 멈췄을 때는 어느덧 하늘이 어둑어둑한 때였다. 이제 돌아가야겠군. 현제가 겉옷을 입기 위해 뒤도는 순간이었다. 태원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현제의 움직임이 멈췄다. 병실 안은 산소 호흡기의 규칙적인 소음을 제외하고선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현제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얹어졌다. 때때로 태원이 작은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현제의 마음은 한없이 들떴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내일 다시 올게.”

 

 태원의 조금 자란 까만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고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고,

 

 “어디...가십니까...”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 같은 그러나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을 때 현제는 잠시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꿈에서도 바라던 그런 간절한 것이라, 이제는 눈 뜬 채로 꿈을 꾸나 보다 했다. 꿈속의 목소리가 다시금 말했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울지 마세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따뜻하고 아팠다. 현제는 제 얼굴을 어루만지는 태원의 손에 뺨을 기대었다. 방울방울 흐르는 눈물이 마른 손을 적셨다. 늦었잖나. 현제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였다. 늦었잖아, 태원아. 숨을 헐떡이기 시작하는 연인을 달래고 싶었지만 갖은 줄에 연결되고 근육이 빠진 팔은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링거줄을 뽑아버렸다. 뽑힌 자리에서 피가 흘렀다. 태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뻗었다. 슬픔에 푹 잠긴 두 뺨에 손을 얹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금빛이 자신에게로 무너져 내렸다. 현제의 팔이 제 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태원은 양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곤 간헐적인 들썩임이 멎을 때까지 태원은 가만가만히 등을 쓸어내렸다.



 

19

 

 “다시는 그러지 말게.”

 

 좁은 침대에 덩치 큰 두 남자가 나란히 구겨져 있었다. 태원이 머뭇거리다가 네, 하고 대답했다.

 

 달빛이 두 사람 위로 흘렀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조용히 그 곁을 맴돌았다.



 

20

 

 “당신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신이 저를 불렀습니다. 제게 돌아오라고 하셨죠. 현제가 태원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 태원의 숨결이 부드러운 금실 위로 내려앉았다.



 

21

 

 달은 제가 몸담을 밤하늘을 되찾았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가득 피어난 어느 여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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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품에

장미를 안겨주는 것이

나의 행복이었다. *

소파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옅은 머리칼과 붉은 색의 장미꽃은 언제나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사실 송태원은 장미꽃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연인이 연인에게 주는 가장 흔한 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는데.

 

 “어디서 이런 귀여운 짓을 배워왔을까.”

 

 당신에게는 장미꽃이 정말 어울려서.

 

 “고마워.”

 

 내 앞에서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는 것이 좋아서.

 

 

 송태원이 성현제에게 장미꽃이 어울린다는 사실을 안지는 별로 되지 않았다. 늘 자신의 집인 것처럼 송태원의 사무실을 들락거리던 성현제가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꽃다발을 들고 왔었다. 여러 종류의 꽃이 여러 송이 한데 묶여 잘 포장되어 있던 커다란 꽃다발. 제발 빈손으로 와달라는 말은 또 왜 이렇게 듣질 않는지. 송태원은 그날도 한숨을 쉬었다.

 

 “또 뭡니까.”

 “그렇게 착각하는 것도 귀엽지만, 이건 자네 주려고 사온 게 아니야.”

 

 담담히 이어지는 성현제의 목소리에 송태원이 표정을 찌푸렸을 때, 성현제가 송태원의 곁으로 다가왔다. 자신을 주려고 산 게 아니라면.

 

 “그렇다고 달리 줄 사람도 없으니까 표정 푸는 게 어떤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내가 산 건 아니지만, 자네 주겠다는 소리지.”

 

 송태원은 도저히 성현제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같은 주제로 대화하고 있는 건 맞는 걸까.

 

 “심각한 표정 짓지 말고.”

 

 저 웃음. 성현제는 커튼이 내려져 있지 않은 창가에 서서 송태원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옅은 색의 머리칼이 햇빛에 닿아 반짝이고 있었다. 성현제의 눈이 둥그렇게 휘어졌다. 정말. 반짝이는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여기에 두면 되겠지?”

 “예. 그러시죠.”

 “흐음.”

 

 성현제의 입술 사이에서 의미심장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성현제를 바라보면 성현제가 본인의 턱을 만지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런 표정을 짓고 저 행동을 할 때면 항상 무슨 일이 나곤 했었는데. 송태원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다시 책상 위 서류로 고개를 돌렸다.

 

 “송실장.”

 “네.”

 “송태원 실장.”

 “왜 부르십니까.”

 “송태원.”

 “…….”

 “태원아, 날 봐야지?”

 

 귓가에 내려앉은 목소리. ……거절할 수 없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송태원은 다시 성현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성현제는 장미를 들고 있었다. 분명 아까 가져온 꽃다발 사이에 있던 장미꽃이었다. 붉은색의 장미. 붉은색. 성현제의 등 뒤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여전히 빛을 받고 있는 머리칼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 하얀색 장갑에 감싸진 손가락과 그 사이에 들려있는 붉은색의 장미.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여태껏 성현제에게 어울리는 꽃은 그와 닮은 연한 꽃잎을 가진 꽃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에겐 이런 색도 어울리는 구나.

 

 “잘 어울리네.”

 

 성현제가 들고 있던 장미꽃이 송태원의 귓가에 꽂혀졌다. 평소라면 장난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지금의 송태원은 성현제에게 진심을 눌러놓고 대할 수 없었다.

 

 “당신이 더 잘 어울립니다.”

 

 이미 장미와 당신이 잘 어울린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아버렸으니까.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다 컸네.”

 

 신기했다. 성현제가 그렇게 기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 아니. 그보다는 그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때부터였을까. 송태원은 가끔 생각이 날 때마다 장미꽃을 샀고, 성현제는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항상 송태원이 바라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소소한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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