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interés *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가련한 이 생명마저 법이란 잣대로 내칠 셈인가. 장난스런 말로 시작한 아침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똑같은 출근길과 여전한 던전 브레이크. 그 속에서 곰살맞게 굴지 말라는 성현제 또한 그대로였다. 그래서 더욱. 제법 썩 괜찮은 아침이었다.
가시돋힌 꽃이 무슨 색이었는지 송태원은 잠시 생각한다. 그의 머리색을 닮은 조금 옅은 꽃잎이었던 것도 같은데. 시야에 퍼지는 붉은 액체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괴물에게 주어지는 저항은 무쓸모가 되어버렸다. 평소 스스로를 부정한 벌이어도 좋으니, 눈앞에 있는 사내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붙잡을 수 있길 간절히 바래보았건만 멀어지는 그의 눈가에는 처연한 웃음만 붉은 선혈 위로 흩어졌다.
성현제의 몸이 뒤로 넘어가는 짧은 찰나조차 송태원의 뇌리엔 제법 평온했던 아침부터 지금까지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뭐가 문제였나. 시한폭탄같던 던전 브레이크도 유달리 일어나지 않던 오후였다. 성현제의 짓궂은 장난도 조금은 사랑스럽다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
“ …왜…, 그러나, 송실장 ”
그는 막혀버린 자신의 목구멍을 뜯어버리고 싶었다. 빌어먹을 저주라면 해주하면 그만이고 찢기고 갈려나간다면 포션을 부어버릴 수 있다. 머리를 상실하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성현제를 부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팔을 뻗을수록 닿는건 없고 애처로이 웃는 성현제의 얼굴 뿐이었다. 잠시만, 잠시만요 성현제씨. 잠시만.
한 발자국만 아니 잠깐이라도.
온 신경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몸 속을 기어 다녔다. 목덜미는 축축했고 호흡은 좀처럼 온전해지질 못했다. 밋밋한 천장을 한참이나 보고나서야 송태원은 그것이 꿈임을 알았다. 악몽을 가장한 던전의 저주는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럼 아예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이기심.
생(生)이 꺼져가던 환영의 손은 오늘도 어김없이 꽃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
“ 이게 뭡니까 ”
“ 절절한 사랑 고백에는 장미만한 꽃도 없다지. ”
“ 꽃의 이름을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
“ 저런, 나 또한 이름을 대답해준 것이 아닌데 이를 어쩌겠나. ”
곧게 굳은 미간이 비틀린다. 이 남자의 장난같지도 않은 장난은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늘 제 속을 휘집어놓고선 어떨때는 다시 멋대로 나가버리고. 더는 지칠 구석도 없을 줄 알았던 송태원은 기어이 한숨을 내쉬었다. 성현제가 빙그르 웃는다. 그의 웃는 낯은 송태원이 가장 잘 알아보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알고 있어도 좋은 구석이었다.
“ 직접 고르신겁니까? ”
이 장미 다발을 하나하나 골랐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세성 길드장은 지휘하는 자에 걸맞는 위치다.
저 우아한 손으로 빳빳하고 조금은 거친 잎가지들을 건져내는 움직임 자체가 기이하다.
“ 마치 처음 받아본 사람처럼 말하는군 ”
“ …몇 번, 있었습니다 ”
각성자 관리실에 발을 들여놓기 전이라면 손에 꼽을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그 끝은 항상 씁쓸했다. 정성들여 신경을 써주지 못해 바스러지고 마는 존재가 태반이었고 그 외에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 말라가는 꽃들도 있었다. 어떤 날들은 바쁜 나머지 유리병 속 물이 반이나 마르고서야 손에 쥘 수 있었다. 쓰레기통 앞에 서서 마른 가지를 들고 있을 때마다 꼭 자기 손으로 그 숨을 거두어가는 것 같아 그는 입 안이 썼다. 그게 꽃에 대한 송태원의 가까운 기억이었다.
“ 그렇다면 다행일세. 송 실장도 싱그러운 향내 정도는 맡아봤다니. ”
“ 가지고 돌아가십시오 ”
오늘따라 서류뭉치에 코 박은 제 반려견은 왜이리 밉살맞게 구는지. 반듯한 얼굴에 주름이 생길 것 같았다. 성현제가 알기로 개라는 생물은, 잠시 삐졌다가도 주인 손짓 한 번에 꼬리를 살랑이며 안기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게 흔히 사람들이 느끼는 ‘개’의 매력이라고 하던데. 물론, 이쪽에 있는 개는 이질감이 있다. 스스로 물기를 경고하며 가두는 개.
거슬리는 점이 하나 있다면, 실컷 물어뜯을 만큼 뜯어놓고 재빠르게 뒤돌아 다시 뱉어버리는 이유.
“ 돌려줄 생각일랑 접게. 그랬다간 이정도 야근으론 턱도 없을테니. 아 그리고 말이야 ”
“…”
“ 가질 수 없다고 먼저 떨쳐내는 성정은 잘 알겠네만 ”
“ … ”
말없이 종이활자에 고정시켜둔 시선을 들자 옅은 머리칼의 사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작은 협탁 위엔 장미다발만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짙고 바알간 장미.
커다란 유리창으로 내리쬐는 햇빛이 어쩐지 성가시게 느껴진다. 송태원의 손에 들린 빳빳한 종이가 속절없이 구겨져갔다.
* * *
성현제는 실소를 뱉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잘나신 송 실장의 침대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여진 장미꽃이라. 어디서 구해왔는지는 몰라도 나름 신경은 썼다고 쓴 투명한 꽃병까지. 이렇게 나올거 였으면서 뭐하러 얼굴을 굳혔을까. 송태원 실장은.
예상치 못한 성현제의 조소 너머로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문고리가 보인다. 문짝을 부수지 않은 걸로 다행히 여기라 이건가.
“ 저리 소중히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만 ”
“ 버릴 수 없어서 가져온 것 뿐입니다 ”
“ 그러시겠지. ”
송태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현제는 곱게 웃으며 받아쳤다. 두 사람의 문장은 잔뜩 날이 서 있어 다른 이가 있었더라면 진즉에 도망을 쳤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목울대를 울리며 잔뜩 날을 세워놓고 뒤에와선 저런 대접이라니.
바르게 일자를 유지하고 있던 눈썹이 뒤틀리는 것도 잠시. 송태원의 멱살을 잡아끌며 그대로 엎어뜨렸다. 덤벼든 것은 성현제였으나 모양새는 송태원의 짓이었다.
“ 똑바로 굴어, 송태원 ”
“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
“ 적어도 애매하게는 굴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
사람의 동공에서 볼 법한 어떤 빛조차 없는 까만 눈을 아득히 응시한다. 장갑을 끌러내는 손은 그 흔한 굳은 살 한 점 박혀있지 않았다. 머리칼을 넘기는 저 손이 제 목덜미를, 어깨를 끌어안는 상상을 할 때마다 아랫배가 저릿했다. 이름 모를 감각. 분노라고 정의하기에 근래 들어 성현제를 바라보는 송태원의 머릿 속은 뇌내 한 구석이 기능을 상실한 듯 했다.
여전히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은 그의 얼굴 옆을 짚자 송태원의 그림자가 성현제를 집어 삼켰다. 한유진씨처럼 무모하지 않은 당신이 파트너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그에게 어울려주고 있다는건, 충분히 그럴 여지가 있다는 뜻이겠지. 파멸 또한 달갑게 받을 것처럼. 입술을 씹은 턱에 힘이 들어갔다.
“ 송실장 ”
“ 예.”
“ 송태원 ”
“ 예 ”
언제든 나에게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는 목양견이란걸 충분히 알고 있으니.
“ ……태원아 ”
“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
“ 나는 여기 있어 ”
이게 무슨 뜻인지, 너는 알고 있겠지. 너는 나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똑똑하니 말이야. 송태원이 여기 있는 한 성현제 또한 소멸할 마음이 없다. 애초에 그런 선택지는 없겠지만, 종극에 가서 골라야한다면 송태원을 방치하는 일은 성현제의 그림에는 없는 일이다.
“ 그러니 내 앞에서 불안에 떠는 얼굴은 그만 거두는게 좋겠군 ”
“ 싫으신겁니까? ”
“ 오래 보고 있기에 썩 유쾌하진 않아서 ”
* * *
“ 송 실장이 악몽에 시달리기도 할 줄이야 ”
“ 무엇이 그리 즐거우십니까 ”
“ 자네의 솔직함을 엿볼 수 있었지 않나 ”
이불을 들춰 울긋불긋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는 이내 낮게 웃고야 말았다. 전부 실토해낸 상황이 영 마땅치않은지 표정이 좋지 못한 송태원이었다. 성현제 몸 곳곳에 핀 열꽃은 애절함을 양분삼아 피어난 애정일테지. 송태원이 들으면 제멋대로라고 하겠지만 성현제는 원래 그러한 사내였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난감한 웃음을 짓는게 전부였다.
성현제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요 근래 들어 송태원의 감정 회로에 이상이 생겼음을. 하지만 알아도 할 수 있는건 그다지 없었다. 직접 손을 대면 자신은 물 줄 아는 개라며 목소리를 낼 것이고, 그냥 두고 있자니 그럴 성격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개가 얼만큼 억누를 수 있는지 궁금해진 성현제는 송태원의 감정에 순순히 휘둘려주기로 했을 뿐이었다.
“ 태원아 ”
“ ……예 ”
“ 저 꽃이 시들면 언제든 또 새로운 꽃을 가져다줄게 ”
“ 언제든..말입니까 ”
“ 영원이라는 말은 진부해서 싫어하지않나 ”
퍽 부드러운 입맞춤이 뺨에 닿자 송태원의 눈꺼풀이 살풋 내려앉았다. 오늘 밤 이후로는 조금 다른 꿈을 꿀 수도 있겠다는 기대와 함께.

* 꽃잎이 흩날릴 때 *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얼굴을 가까이에 대 향을 맡자 장미 특유의 향이 콧속 깊이 들어찬다. 바로 어젯밤까지만 해도 봉우리에 저를 꽁꽁 감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던 꽃이다. 하지만 지금은 활짝 피어 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바로 그렇기에 그 어떤 꽃보다 잘 어울리는 거겠지. 장미도 때를 보고 피는 모양이야. 성현제는 장미로 손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꽃잎에 닿았을 때, 구름이 해를 가리어 꽃을 뒤덮었던 햇살이 흔적을 감추었다. 성현제는 그런 하늘을 흘끔 보곤 손가락 끝을 세웠다. 흰 장미가 반듯하게 잘려 손 위에 깃털처럼 내려앉는다.
“오랜만이군. 송실장.”
“…그렇습니까.”
송태원이 목례하곤 옆에 다가와 선다. 성현제는 엄지와 검지로 줄기를 쥔 채 꽃잎 속으로 코를 묻었다. 변함없는 목소리다. 물론 얼굴 또한 그렇겠지. 특유의 체향 또한 그러하리라. 당장이라도 돌아가려는 고개를 억지로 다잡으며, 그는 또 다른 장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전기가 인다.
“…원예에도 취미가 있으셨습니까.”
“자네가 내게 그런 질문을 할 줄을 몰랐는데.”
“…….”
“옆을 보지 않아도 송실장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겠어.”
퍼석. 짧은 전기가 일더니 손안의 장미꽃이 허무히 아래로 진다. 흰 장미 끝이 검게 타는 것도 모자라 바스라지기까지 했다. 역시 이러면 꽃잎이 상하고 마는군. 그는 미련 없이 장미를 손에서 떠나보냈다.
그렇게 재가 된 장미꽃이 바람을 타고 옆으로 흘러갔을 때, 성현제는 그제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김 없이 말끔한 검은 정장에 흐트러짐 하나 없는 머리카락은 상상 속 모습 그대로였다. 또 변화 없는 표정까지 그 어느 하나 기대감에 미치지 못한 것이 없어 그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성현제는 온전한 장미 꽃 하나를 송태원에게 내밀었다.
“난 흰 장미를 볼 때마다 우리의 관계가 생각나더군.”
“그렇습니까.”
“이유는 묻지 않나? 섭섭하군.”
“…왜 다른 것도 아닌 흰색입니까.”
“흔히들 떠올리는 장미는 붉은색이지.”
그는 송태원에게 한발자국 다가섰다. 시선을 마주하자 덤덤한 시선이 섞여든다. 늘 그렇듯, 단순히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이 피어오르는 눈이었다. 그는 송태원을 향해 한발자국 더 다가섰다. 곧이어 호흡이 뒤섞일 만큼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입술이 잡아먹혔다가 금방 풀려난다. 성현제는 그런 송태원을 보며 눈을 접었다.
“우리의 사랑이 붉은 장미처럼 열렬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잖은가.”
“…그럼 흰 장미처럼 청순하다고 하고 싶은 겁니까.”
“송태원 실장이 꽃말에 능통할 줄은 몰랐군.”
입술이 다시 맞부딪히며 호흡이 뒤섞인다. 성현제는 제 목을 틀어쥔 손과 입안을 침투하는 혀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래서 잊을 수가 없는 거야. 고개를 틀고 눈을 감자 마치 사자(使者)처럼 차디찬 호흡이 내려앉는다.
성현제는 흰 장미를 송태원의 정장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이러니 우리의 사랑이 열정적이라고 할 수 없는 거겠지.”
“납득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낸 지도 벌써 3개월이야.”
그런데 사랑이 식기는커녕 더 타오르더군. 이러니 우리에겐 장미가 어울리되 붉은색보단 흰 색이 어울리지 않겠나.
그런데 사랑이 식기는커녕 더 타오르더군. 그러니 우리에겐 흰 장미가 어울리지 않겠나. 그는 몸을 틀어 장미꽃을 손에 쥐었다. 곧장 먼지처럼 바스러진 장미가 허공을 배회한다. 성현제는 뒤를 돌아보았다.
송태원은 변함없이 그곳에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올곧게 선 채로―
“만약 시간을 되돌려 다시 자네를 볼 수 있다면, 그때는 흰 장미가 아닌 붉은 장미를 심도록 하지.”
그리고 사랑을 고백하면 다시 맺어질 수 있지 않겠나. 성현제는 송태원에게 다시 다가가 섰다. 흰 장미꽃과 함께 사라져가는 제 무정한 연인. 그는 웃으며 다시 장미꽃을 꺾었다.

* Uneasy Romance *
1회차 송성 과거 날조 + 네임버스 최신화 스포
Uneasy Romance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엠마우드를 품에 안은 송태원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보존스킬이 걸린 만큼, 생화는 약 한 달여간 봉우리가 알맞게 맺혀있을 터였다. 꽃이 만개하기 전에 통통하게 뭉쳐놓은 눈송이 같은 흰 장미꽃을 건네야지.
풍성한 윗단과는 다르게 가시가 말끔하게 정리된 줄기가 가지런히 모아진 얇은 줄기를 손바닥에 얹었다. 왼 손바닥에 적힌 이름은 여름 햇살의 따가운 빛줄기처럼 맹렬하게 빛났다. 해변의 모래처럼 반짝이는 잔 가루가 자잘히 묻은 것처럼, 손바닥의 이름은 멋모르고 반짝였다.
*
"성현제 씨"
오늘도 송태원은 빌어먹을 애인 때문에 지끈한 두통을 앓았다. 애인 얼굴을 보겠답시고 기꺼이 지하 취조실에 끌려오는 것은 성현제가 유일할 것이다. 던전브레이크를 정리하고 헌터협회에 보고를 하러 왔던 성현제는 코빼기도 하나 비추지 않는 송태원이 괘씸해졌다. 건물의 상층부 모서리 부분을 하나 날려 보낸 것은 단순히 그런 연유 때문이었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분명한 고의였다. 각성자 관리실에서 밀린 보고서와 새로 등록된 신규 헌터 명단을 정리하던 송태원은 성현제를 수습하기 위해 책상을 박차고 나섰다. 취조실에 앉은 성현제는 뻔뻔하디 뻔뻔한 낯짝이었다. 의도를 물으니 삼일 철야에, 애인이 직장 근처에 왔는데도 얼굴 하나 비추지 않아서, 얼굴을 잊어먹을까 걱정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송태원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 얼굴을 어떻게 잊어먹을까. 초라한 취조실의 전등 하나만으로도 성현제의 얼굴은 빛이 났다. 조도가 낮아 속눈썹이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슬며시 내려 깐 눈이 또렷이 제게 향해올 때면 어둠을 걷어 올리는 태양을 보는 듯했다. 오렌지 색 조명에 녹아드는 맑은 원석 같았다. 그것이 너무나 투명하고 순진무구해서,
"죄송합니다…"
도리어 사과를 하고 말았다.
"반성은 오늘 밤 침실에서 하지."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그랬다. 연애 전에는 이성을 지키고 근엄한 표정을 짓는 거라도 가능했지. 물렁 해진 송태원은 이제 성현제에게 속수무책이었다. 송태원은 사건 경위서를 성현제에게 내밀었다. 이번에도 그는 S급 헌터라는 신분으로 선처를 받아 가벼운 벌금형으로 풀려날 것이다. 소란을 일으킨 죄로 이천만원의 벌금이 부과된다는 것에 싸인을 할 찰나, 만년필의 잉크가 다 떨어져 펜이 써지지 않았다. 성현제는 송태원이 쥐고 있는 손을 슬며시 겹쳐 잡았다. 손바닥을 피게 한 다음 그가 쓰고 있던 모나미 펜을 가져가기 전, 성현제는 두툼한 손바닥에 시범삼아 이름을 새겼다. 잘 써지는군. 성현제가 다시 서류에 싸인을 했다. 그날이었다. 송태원의 몸에 성현제가 아로히 새겨진 것은.
결혼을 해야지. 송태원은 제집 가구처럼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성현제를 보았다. 각성자 관리실 실장 송태원은 아등바등 살기 위해 애를 썼다. 자신의 길드를 세우지 않고 국가의 밑으로 들어가 박복한 삶을 사는 것부터 그랬다. 한국의 S급 헌터는 대부분 자신의 길드를 설립하고 어느 정도의 입지를 다지고 그에 맞는 화려한 삶을 꾸렸다. 한신, 브레이커, 세성, 해연. 그렇다고 해서 S급 헌터라고, 손에 꼽히는 길드를 세웠다고 세상이 만만하게 고개를 수그리고 들어온 적은 없었다. 그들의 삶 또한 고독하고 치열했다. 하지만 적어도 세성 길드장 성현제는 송태원이 애쓰고 있는 삶이 안쓰러웠다. 눈에 훤히 들어오는 33평의 방구조, 앙증맞은 다육식물과 아무리 빈 냉장고라도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계란과 인스턴트 라면, 중국산 식기, 주거공간에도 쌓인 서류와 빽빽한 포스트잇. 어지럽고 혼잡하게 늘어진 책상에 놓인 5년은 더 된 노트북. 성현제는 다 엎질러 버리고 싶지만, 송태원을 위해서 참았다. 애인이 원하는 삶이 이런 거라면 참아야지, 하면서도 자신의 반려는 생각하지도 못한 채 불도 다 꺼진 각성자관리실에서 다크써클이 퀭한 눈으로 서류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저번에도 그래서 보복심으로 건물 하나를 날리고 경차까지 부셨 것만. 당최 알아듣질 못했다. 철야에 허덕이는 송태원을 질질 끌고 왔다. 아무리 괴물 같은 S급이라도 2주간 야근은 사람을 빈곤하게 만들었다. 무슨 정신으로 끌려와서, 무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둘은 언젠가 백화점에서 샀던 커플 잠옷을 서로 뒤바꿔 입었고, 성현제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안정적이고 깊은 숨소리…. 차갑고 맑은 새벽 공기처럼 성현제의 숨결에선 이슬 냄새가 났다. 송태원의 사이즈는 성현제보다 한 치수가 컸기에 단추를 꼭꼭 잠갔어도 탄실한 가슴과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이보리색 수면등에 성현제의 얼굴이 은은하게 비췄다. 마녀의 저주로 인해 끝없는 달콤한 잠에 빠져든 미인…. 성현제의 얼굴에 긴 그림자가 졌다. 입술에 닿는 솜털이 보드라웠다. 스르륵, 미인과 눈이 마주쳤다. 갓난아기의 공막같이, 유리같이 맑은 흰자위에 다시 입을 맞췄다.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눈이다.
“난데없이 다정하긴.”
던전이 생기고 난 뒤 다수의 삶이 변했다. 가깝고 먼 가족의 죽음, 헌터 능력 발현, 몬스터. 그럼에도 불변의 형태를 지니고있는 것은 혼인신고서와 프로포즈였다. 개중에 다이아몬드 반지와 꽃다발은 로맨틱함의 상징이었고.
아무리 C급 마석이 1억을 호가한다고 해도 왼손 약지에 빛나는 결혼반지는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송태원은 지긋지긋한 성현제와의 연애를 끝낼 셈이었다. 몇 번을 만나고 헤어지고, 싸우고, 서로의 집에 먼지처럼 머물렀다가 사라져야 하는지, 피곤했다. 송태원은 성현제가 없는 빈집을 보았다. 성현제는 스펀지가 다 꺼진 쇼파에 불편하게 앉아있었고, 성인 남성 두 명이 눕긴 벅찬 침대에 가련히 잠들었고, 식빵껍질을 다 떼내 부드러운 속살만 쏙쏙 골라 먹었는데. 이제 성현제가 집으로 들어서면 광택질이 반질반질하게 나는 새 쇼파와 매트리스가 푹푹 꺼지는 커다랗고 포근한 침대를 사고, 유통기한 지난 음식을 다 버리고, 성현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갖춰 냉장고에 넣어야지. 조잡하고 엉성한 미적 감각으로 애써서 고르고 고른 다이아몬드 반지는 마음에 들어할까. 그래도 반지보다 빛나는 것은 성현제겠지. 예복은 무엇이 좋을까. 무엇이든 상관없지만 웨딩 베일은 썼으면 했다. 결혼식 키스타임에 머리 위로 떨어진 면사포 사이로 들어가서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으니깐.
고백엔 어떤 말이 좋을까.
송태원은 자동차에 올라서면서 준비한 꽃다발과 반지를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성현제가 자신의 고백을 받아줄까. 키스하던 눈꺼풀에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았는데 몽롱한 밤의 착각이었나, 라는 생각도 짧게 스쳤다. 길게 생각해봤자 자존심만 닳아 문드러질 것같았다. 성현제 씨 좋아합니다. 너무 단정한가. 언제나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고전적이다. 제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결투를 신청하는 것도 아니고. 복잡한 생각에 애꿎은 핸들만 내리쳤다. 그래, 진심에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않는 법이다. 성현제의 손을 잡아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고, 왼손으로 꽃다발을 건네자. 안전벨트를 메어 세성길드로 차를 움직이려는 찰나, 방해꾼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G구에 있는 미발견던전이었다. 던전 입구에 불길한 붉은색 빛이 어른거렸다. 조금만 늦었다면 작은 불씨가 걷잡을 수 없는 화염을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와이어를 꺼내든 송태원은 홀로 던전 안으로 들어섰다. 자잘한 B급 몬스터는 이미 곤죽이 되었다. 보스 몬스터로 가까이 갈 수록 꽃향기가 만발했다. 아래로 내려갈 수록 밤이 찾아오는 듯 맑았던 공간은 어둠이 졌고, 땅 아래에는 어둠을 밝히듯 푸른 꽃이 발을 간지럽혔다. 블루보넷이 깔린 들판이었다. 눈가를 저릿하게 만들정도로 강렬한 파랑이었다. 어느 곳에서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땅속이나 들판 아래 몸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송태원의 감각으로는 인지가 불가능했다. 빳빳하게 쥔 와이어를 잠시 풀어내며 기꺼이 황홀에 시선을 두었다.
찌잉.
시야를 가두는 푸름에 정신이 팔린 사이 급격한 온도를 견디지 못한 유리가 기어코 깨지고마는, 귀를 찢는 소음이 들렸다. 암흑이 깔린 어둠이 자잘하게 부숴지며 가늘게 휘어지다 못해 뾰족한 끝이 맞닿은 초승달이 떴다. 그 속에서 버들잎을 밟듯 흐드러진 꽃잎을 밟으며 우아하게 익숙한 인영이 내려왔다. 홉뜬 두 눈이 낮달같은 순백색이었다. 무용을 하듯 우아하게 뻗은 손이 송태원에게 향했다. 마치 꽃 한 송이라도 선사할 듯 부드러운 손끝이었으나 그에게 내리꽂힌 것은 벼락이었다. 빛을 꿰어 만든 커다란 창 같은 것이 몸을 꿰뚫었다.
*
죽음이 삶보다 가까웠을 때가 있었다. 송태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종지부가 아닌 급격하게 변한 삶의 지점에 있었다. 양육자의 삶과 맞바꾼 각성이었다. 각성자가 그러하듯 조실부모한 이들이 많다고는 했으나 그것이 위로가 되어주진 못했다. 먼지가 묻어나오는 봄공기가 텁텁하기 그지없었다. 송태원이 상주로 자리하면서 자신과 관계없는 이들이 분향소를 방문했다. 대기업 임원과 헌터협회, 송태원보다 먼저 각성한 헌터가 조문 겸 인사치레로 얼굴을 내비추었다. 각성 전부터 공직자였던 송태원의 결정은 뻔했다. 아직 이 세계가 혼잡하니 자네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간곡한 협회의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것이 면죄부가 되기도 했다. 지켜내지 못한 삶을 뒤늦게라도 자신이 막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러겠노라.
*
"만약 자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내가 대신 살아 가주지."
기일을 맞이해 분향소를 다녀온 날이었다. 송태원의 곁에 있던 그들이 떠나간 날이 봄이었으므로, 철쭉과 개나리, 진달래가 피어난 봄이 또다시 돌아왔다. 향을 피우고 근처 식당에서 육개장을 먹으며 그런 말을 했던 것이 떠올렸다. 이제 안정화를 맞이한 세계에선 죽음이 목도되는 풍경은 드물었다. S급으로 각성한 송태원은 이제 죽음의 끝발에도 도달하지 못하겠지만, 그 말이 왠지 든든하다고 느껴졌다.
"예. 제가 죽으면 성현제 씨가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넘기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도 굶은 터라 밥 한공기로는 부족했다. 성현제는 농담도 못 하냐. 라며 제 몫의 밥을 건네주었다. 송태원은 한 김 식은 밥을 뜨며 말했다.
"이런 곳에선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성현제는 물을 마시며 그의 진지함에 웃었다. 누가 듣나 보지. 예. 망령이 듣죠. 죽은 이들 앞에서 하는 약속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 태원아. 이건 내 천 년 동안의 진심이야."
성현제는 송태원의 손을 붙잡았다. 억센 손은 흐늘거리는 실처럼 그에게 끌려갔다. 맹세를 하듯 손등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철쭉과 개나리, 진달래 뭐 그런 꽃들에서 묻어난 꽃가루가 나비의 날개짓에 흐드러졌다. 노란 분에서 달큼한 향기가 났다. 황사가 가라앉은 바람에선 따스한 햇살냄새가 피었다. 날이 좋아 식당주인이 한껏 열어놓은 문으로 민들레홀씨가 들어왔다. 꺄르륵, 웃음소리가 퍼지는 걸 보아 바깥에서 뛰노는 자매가 분 꽃씨인 듯했다. 성현제의 눈가에 홀씨가 걸렸다. 감은 눈에서 송태원의 이름이 정갈하게 쓰여있었다. 유리구슬을 어루만지듯 눈가를 가만히 쓸었다. 무게가 없는 깃털은 소리 없이 추락했다. 공기를 가로지르며 낙하하는 비명도 없이 고요히.
"태원아."
부름이 겹쳐졌다. 송태원은 저를 받치고 있는 무릎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성현제다. 느릿하게 눈을 뜬 송태원은 아른거리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잠시 헤매었다. 시선을 또렷이하고 실상을 마주했다. 마음을 미혹하던 들판은 폐허가 되어있었다. 무참히 찧어진 꽃은 아우성을 쳤다. 으스러진 향기는 끈끈한 피와 엉켜 어지러운 냄새가 났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선 어떤 음성도 발설하지 못했다.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울림은 아우성에 불과했다. 홀씨처럼 퍼져나가는 다정한 음성대신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른 피가 쏟아졌다. 뻗으려던 손도. 온건한 것이 하나 없었다. 성현제는 송태원이 미발견던전으로 인해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각관실 직원을 통해 안내받았지만 위험한 예견이 등줄기를 찢었다. 그가 말한 던전으로 왔을 땐 송태원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방패나 다름없는 단단한 몸이 섬유조직처럼 잘게 찢어졌다. 성현제는 조용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켰다. 품에 안은 그가 먼지처럼 사라질 것 같아서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우리 송실장님이 왜 이런 꼴이지?"
한물 다 갔군. 성현제의 농담에 희끗한 웃음이 지어졌다. 당장이라도 풍쇄되어 사라질 것 같은 손이 뻗쳐왔다. 베이지색 수트에 붉은 손자국이 죽죽 그어졌다. 까만 잿더미처럼 변한 손이 성현제를 붙잡았다. 까만 회오리가 몰아치면서 검은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사랑합니다."
성현제의 손을 잡아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고, 왼손으로 꽃다발을 건네며 그대 이름이 적힌 손바닥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찬란히 빛나는 이름처럼 환한 별을 기대했는데. 손에 적힌 이름과 눈꺼풀 위에 새겨진 이름에 덧대어 우리의 증표는 이것이라, 말하고 싶었는데. 이별의 끝은 너무나도 짙은 어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백이라니, 무드가 없군."
"……"
"태원아."
상쇄하는 지옥이었다. 안아 들고 나갈 시신은 아지랑이 속에 느물거리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성현제의 품에 남은 것은 가슴에 사선으로 그어진 핏자국이었다. 무릎에 짓이겨진 꽃잎이 멍처럼 푸르게 물들여있었다. 걸음걸음마다 뇌성이 빗발쳤다. 출구로 나오는 하나의 인영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던전에서 새로 생긴 스킬은 보고하지 않았다. 성현제를 보고 각성자관리실장을 그렇게 만든 건 세성길드장이라는 흉흉한 뒷담이 많았다. 성현제는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진실을 말한다 한들 물증이 없었고,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진실을 만들어내어 믿어버리니.
그러나
무성하던 소문은 송태원의 차 안에서 발견된 꽃과 반지로 인해 사그라들었다. 주인이 명백한 선물이었다. 성현제는 아직도 싱싱한 꽃을 품에 안아 향기를 맡았다. 보존스킬이 걸린 꽃은 한동안 생생하게 향기를 뽐낼 것이었다.
송태원의 진심을 받아든 성현제는 홀로 걸어보았다. 성현제의 발끝에 무지개가 걸렸다. 무심하게도 빛나는 태양은 성현제의 부드러운 금색머리카락을 다정히 어루만져주었고, 허전한 팔꿈치를 쓸었다. 걸음의 끝은 옥상정원의 난간이었다. 가로막힌 벽 쪽에 돋은 풀이 싱그러운 여름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들꽃과 잔디에 맺힌 이슬이 성현제의 구두를 적셨다. 상공을 가로지르는 거센 바람에 스러지다시피 성현제는 난간에 걸터앉았다. 엠마우드가 이렇게 슬픈 냄새를 풍겼나. 쓸모없고 아름다운*, 덧없음에 상실감이 몰려왔다.
한쪽 눈을 감아 송태원의 이름을 매만졌다. 멀고도 험한, 이 지긋지긋한 연애의 끝이었다.
*문학동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김민정 시집 제목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