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놉티콘 *
- 교도관 송태원X신경건축학자 성현제
- 교도소 생활 잘 모르고 씀 주의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화이트데이.”
“…….”
“또 무시하네.”
“…….”
“재수 없는 새끼.”
죄수 번호 314. 수감 생활하고 있는 인물 중에서 단연 눈에 튀는 인물이었다. 반듯하게 다린 죄수복을 입고 지나가는 314번 죄수를 따라 사람들의 눈동자와 턱이 경우 없이 움직였다. 고개를 숙이고 시간을 죽이는 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괜히 트집 잡힐 일 만들지 않으려고 초점 없이 허공에 시선을 던지는 곳이었다. 그런 곳이 어수선해질 땐 밥 먹을 때와 그 죄수가 떴을 때뿐이었다. 사실 ‘떴다’는 표현도 우스웠다. 그도 그저 내부의 커리큘럼에 맞추어 움직일 뿐이었으니, 모든 현상의 원인은 그를 보는 자들에게 있었다.
그는 여느 수감자와 결이 다른 인물이었다. 같은 옷과 생활 방식으로도 감출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어딘가 모자라고 비틀린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괴상하리만큼 완벽한 존재였다. 성정이 나빠 보이진 않으나 쉽게 다가갈 수 없는 타입이었다. 그가 입을 열지 않으면 그 침묵은 권력이 되었고, 느린 손짓은 엄중한 결단력을 담았다. 여유에 찬 미소는 누군가에게 오만이었고 군림이었다.
“107번.”
“…재수 없게 번호로 부르고 지랄이야. 네가 교도관이냐?”
“나중에 체스나 한판 하지.”
“뭐? 내가 지금 너랑-”
선뜻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위기의 그는 무리를 만들려 하지 않았으나, 우상에 빌붙고자 하는 이들이 그를 놔주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있었을 뿐인데 작당 모의를 하는 것 같다, 라고 뜨내기들이 트집을 잡곤 했다. 물론 윗선에서 언제나 잘 무마되곤 했다. 모범수도 아니었고, 우발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았지만 314번 죄수는 특별했다. 그가 이런 좁고 누추한 곳에 갇혀 있을 자가 아니라는 건 풋내기 죄수도 대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죄수 번호가 화이트데이 날짜라 그리 별명 붙은 그는, 선뜻 고유 명사로 명명되지 않는 이곳의 유명인사였다.
시답지 않게 시비를 걸던 이가 다른 죄수들의 손에 이끌려 다른 쪽으로 가자, 화이트데이는 산뜻한 걸음으로 운동장을 다시 돌기 시작했다. 지금 충분히 햇빛을 만끽하고, 온몸의 근육을 쓰지 않는다면 종일 기분이 저조할 터. 운동장 중앙에 자리한 기둥을 아래에서 위로 훑어 올리던 화이트데이는 아래에서 위로 세 번째, 11시 방향 창문으로 보이는 턱과 가슴을 보고 저도 모르게 위로 치솟는 광대를 억눌렀다. 그였다.
314번 죄수, 화이트데이는 감시탑 쪽으로 미묘하게 방향을 틀며 또 한 번 감시탑을 한 바퀴 돌았다. 더 작은 원을 그리며 걷는 속도를 늦추었다. 좁혀진 거리가 마음에 들어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시선이 뺨을 간질이다 못해 온몸이 쭈뼛 서게 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내지는 라푼젤의 눈동자가 따라붙자 기분이 그대로 상승곡선을 찍었다.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먹이 내지는 물건 취급하는 것 같은 눈빛임에도 불구하고 화이트데이는 순수하게 기뻤다.
“…꽃밭이군.”
쇠창살과 함께 장미 나무가 감시탑 주위에 잔뜩 심겨 있었다. 죄수들이 감시탑으로 기어 올라오지 못하게 막기 위함이었다. 건조한 덤불 사이로 붉게 피어오른 장미 몇 송이가 사람을 더 갈증 나게 했다. 감시탑 아래에 정신 혼미할 정도로 진한 장미 향이 314번 죄수의 코를 간지럽게 했다. 진정 꽃밭이었다. 이 퀴퀴한 감옥에서 피어난 저 한 떨기 장미꽃을 두고 방에 들어가려니 배가 아팠다.
***
성현제는 죄를 짓는 인간을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죄인을 한데 모아 관리하는 시설 구조를 연구하게 되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신경 건축학 쪽으로 블루오션을 연 새파랗게 젊은 교수가 되어 있었다. 그의 몰두는 남들의 시기를 샀지만, 그 자신을 좀먹기도 했다. 선례가 없는 연구, 자신을 끝없이 뛰어넘어야 하는 이론을 턱턱 내놓던 그는 돌연 학교를 떠났다. 교수는 쿠바의 교도소에서 머그샷을 찍고 제 발로 갇혔다.
과거 파놉티콘 이론이 대대적인 인기를 끌 때, 수많은 감옥이 건설되었다. 효율적인 만큼 비윤리적인 건축물들이었다. 최근에는 죄수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중앙에 감시탑을 세운 감옥 구조를 찾기 어렵지만, 아예 없지는 않았다. 314번 죄수는 쿠바의 이 교도소를 발견했을 때 번갯불이 제 일상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직접 경험하는 것만큼 훌륭한 연구는 없다고, 교수는 생각했다.
하늘이 이 살짝 돌은 지식인을 돕는 게 아니었을까. 하필 쿠바였다. 사회 시스템이 흔들리는 것에 엄격한 나라였다. 그곳에서 범죄자가 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의 죄목은 단순했다. 사기죄. 신뢰감 느껴지는 말투와 표정, 깔끔하다 못해 사람 홀리는 외모로 수도 일대의 술집들을 불법 매입한 그는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쿠바에서 가장 끔찍하기로 소문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가 사기 친 술집 중에 쿠바 정부와 연루된 굵직한 업소도 있던 탓에 유독 그의 죄가 무겁게 다뤄졌다.
이곳에서 생활하며 보이지 않는 중앙 기둥 속 감시자를 두려워하는 죄수들을 보았다. 방에서 먹고 자고 싸는 것까지 모조리 공개된 방에 갇힌 이들은 미쳐가고 있었다. 교수는 매일 그의 생활을 기록하고 주변 죄수들의 변화를 살폈다. 약간의 불편함만 감수한다면 훌륭한 연구소였다. 그들 사이에서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성현제가 314번 죄수가 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건, 멀리 떨어진 감시탑에 서서 저를 관찰하던 교도관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교도관은 자신을 보지만, 314번 죄수는 교도관을 볼 수 없었다. 그게 올바른 건축 구조였다. 하지만 성현제는 그 괴물과 같은 눈빛에 사로잡혀 제 모든 연구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걸 느꼈다. 지금껏 이곳에 지내며 누군가를 관찰하던 교수는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죄수답게’ 관찰당했다. 허튼짓을 하는지 살피는 그 집요한 시선에 교수는 모든 의지를 결박당하는 기분이었다.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종류의, 광기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교수는 하마터면 자신이 감옥에 스스로 갇힌 본분을 잊고 그의 죄수가 될 뻔했다.
쇠창살 사이로 감시탑의 시선이 스며들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제 행동에 대한 선택권을 두 눈 똑바로 뜬 채 약탈당하는 기분이었다. 분명 수많은 죄수가 감시탑 교도관들의 시선을 느끼고 있을 터인데, 유독 저를 향한 시선이 진하고 강렬했다. 314번 죄수는 치미는 반항심에 이상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관찰했던 죄수들이 보이지 않는 시선을 감내하지 못하고 보였던, 흔한 행동 패턴이었다. 교수는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감시탑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성적인 행동을 했다. 방어 기제를 기반으로 한 행동이라 어설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렇게라도 충동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온몸에 한기가 돌고 힘이 쭉 빠졌다. 지금까지 이곳에 수용되면서 흐트러짐이라곤 없던 314번 죄수는 좁은 독방에서 한참을 헐떡이며 저를 관음하는 이를 향해 치부를 드러내며 울음 섞인 신음을 토했다.
감시탑의 괴수가 그를 욕정 하지 않았다면, 교도관은 그저 전근대적 구조의 감옥에서 근무하는 흔한 교도관으로 남았을 것이다. 제 벗은 아래를 훑는 시선의 끈적함이 제 가랑이 사이로 분출된 끈적함보다 농밀하지 않았다면, 화이트데이는 감시탑의 괴수를 두고 감시탑에 갇힌 공주님이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성현제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온몸으로 그의 관음을 즐겼다. 먼 거리에서 성현제가 잡아낼 수 있는 그의 특징은 강인하게 생긴 턱선과 무수한 시간을 단련했을 흉근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곳에서 그렇게 뜨겁고 건조한 오아시스의 태양을 닮은 이는 흔치 않았으니까.
***
생기 넘치던 붉은 장미가 하나둘 꽃잎을 떨어트렸다. 덤불에 가까이 가지 않더라도 314번 죄수는 손가락으로 짓이기면 붉은색이 묻어나는 꽃잎을 주워갈 수 있었다. 잡동사니에 불과한 꽃잎을 한두 장씩 매일 주워 방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누구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별명 따라간다더니, 이 삭막한 공간에서 낭만주의자 납셨다는 핀잔만 조금 들었을 뿐이었다. 관찰 일지 사이로 꽃잎을 끼운 성현제는 오늘도 초반에 쓰던 내용에서 조금 벗어난 글을 써내려갔다. 내용은 주로 시선에 대한 것이었으나,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어떠한 열망과 욕구,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감상에 대해 여과 없이 펜을 놀렸다. 공주님은 장미를 닮아 가시를 세우고 있어 가까이 갈 수 없다는 둥, 가벼운 농담도 섞여 있었다.
죄수에게 허락되는 개인 물품은 많지 않았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펜은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굵기도 얇았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펜을 붙들고 한참 종이에 해소되기 어려운 열망을 쏟아낸 성현제가 평소처럼 딱딱하고 불편한 침대에 드러누웠다. 언제부터인가 그를 향한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의욕을 잃은 까닭이었다.
좁아빠진 방, 제 체구보다 너무나도 낮은 천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교수는 짧게 한숨을 내쉬려다가 누군가 북측 복도에서 제 쪽으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숨을 참았다. 방에 시계는 없지만, 어림짐작으로 계산해보면 절대 이 시간엔 교도관들이 돌아다니지 않았다. 이런 경우 3층의 누군가가 사고를 쳤거나, 사고를 당했으리라.
하지만 그런 것치곤 단조롭고 차분한 걸음걸이였다. 교수는 복도를 가로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제 관찰일지를 침대 아래로 숨겼다. 익숙하지 않은 패턴에 느낌이 좋지 않았다. 태연하게 다시 침대에 누워 벽을 응시했다. 괜히 얼굴을 보였다가 표정 관리에 실패해 이상한 트집이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감시탑을 향해 완전히 공개되어 있던 공간에 누군가가 불쑥 예고 없이 들어오자 그는 평정심을 살짝 잃을 뻔했다.
“314번.”
“……보통은 인사라도 하면서 들어오지 않나?”
목소리만 들었을 때 꽤 깐깐하게 생겼겠군,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굴을 보기 위해 뒤를 돌며 상체를 일으키자 가장 먼저 보인 건 근무복 단추가 터질 것처럼 근육이 발달한 가슴과 힘줄이 도드라지는 목, 그리고 강인해 보이는 날렵하고 두꺼운 턱이었다. 314번 죄수는 홀린 듯이 고개를 살짝 위로 들었다. 어두운 전등을 등진 사내를 보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최소한의 빛을 받아 더욱 뚜렷하게 실루엣이 잡힌 눈썹 뼈와 콧대, 날카롭고 길게 빠진 눈꼬리와 보기만 해도 까슬거리는 얇은 입술이 눈에 천천히 들어왔다.
“최근 관찰한 결과 지속해서 무언가를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파악, 내용을 검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보다시피 나는 죄수고, 내가 무엇을 쓰던 그걸 읽을 권리가 자네에게 있다는 걸 믿기 어렵군. 그저 평범한 참회의 일기이네만.”
“알다시피 저는 당신이 하는 모든 행동을… 관찰하고, 보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금욕적인 검은 눈썹이 작게 떨렸다. 잠시 말을 멈추는 모습에서 314번 죄수는 아랫배가 뭉근하게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놀랍군. 내 모든 행동을 관찰했다는 건가?”
명백히 떠보는 말투였다. 화이트데이는 굳이 제 의도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
“무시하는 건가?”
성현제가 교도관의 오른쪽 가슴에 부착된 명찰을 눈으로 훑었다. ‘송태원’. 초면이지만 그가 감시탑의 공주님임이 틀림없었다. 성현제는 제 방에 들어온 게 송태원뿐이라는 걸 고개 돌려 다시 확인한 뒤, 덥석 송태원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감시탑의 다른 이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더라도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있을 터이니 이제부터는 속도전이었다. 송태원의 옷깃에서 물씬 나는 장미 향에 성현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까 어떤가? 관찰할 맛 나는가?”
“놓으십시오.”
“누가 봐주니까 나는 더 스릴 넘치던데.”
“……314번. 놓으십시오.”
송태원의 경고에 성현제가 도발하듯이 제 얼굴을 송태원의 코 앞에 들이댔다. 서로의 열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 턱을 조금만 틀어도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해지게 하는 야릇한 입김이 성현제의 뺨에 닿았다. 이렇게 다 티 나는 주제에. 성현제는 그가 가소로웠다.
“빨리 벗기나 해. 이 방엔 손가락 말고 넣을 게 없어서 약간의 도움이 필요했거든.”
/ <파놉티콘> 끝.

* 일반론 *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평소 눈여겨보던 꽃집의 장미가 그날따라 유독 아름답고 싱싱했던 것을 송태원은 기억하고 있다. 꽃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 지 고작 서른 날도 지나지 않았으니 '평소 눈여겨보던'이라는 표현에는 조금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세성 길드장 성현제가 제 생일을 앞두고서 기자 회견을 연 것도 벌써 한 달 전의 일이다. 누군가는 고작 생일 발표 따위로 기자 회견을 여느냐며 욕하기도 했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였다. 성현제의 이름은 일개 헌터 길드장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생일 축하 피로연쯤 되면 연줄 한 가닥이라도 얻기 위해 타국의 귀빈들까지 줄줄이 참석하려 달려드는 실정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매 해 생일파티에 참석하는 국내외 헌터들의 분란 조정과 민간인들의 안전 보장을 위해 갈려나가는 것이 송태원 본인이었으니만큼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올해만큼은 다른 양상을 띠었다. 성현제는 꼭 한 달 전에 기자 회견을 열어 올해년도에는 자신의 생일 피로연이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개인적으로 소소하게 함께 보내고 싶은 이가 있다는 발표에 기자회견장 전체가 폭탄이라도 맞은 듯 들썩여댔다. 세성 길드장님! 그건 열애설을 발표하시는 겁니까?! 거의 광분한 모양새로 달려드는 기자들에게 성현제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만 지어 보였을 뿐이다. 노코멘트입니다. 모든 대답을 그럴싸하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에 회견장은 다시금 뒤집혔더랬다.
그리고는 한동안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기사며 찌라시들로 언론이 들썩했다. 연예 패널들은 한동안 시들했던 성현제와 강소영 사이의 떡밥을 다시금 미친 듯이 굴착하기 시작했으며 에블린 또한 새롭게 물망에 올랐고 심지어는 박예림이나 문현아를 들먹인 잡지사도 있었다(다음날 해연과 브레이커 길드에게 나란히 고소당했다).
그리고 성현제는 뒤이어 다른 소식을 하나 더 발표했다. 그간 너무 많은 생일 선물들이 들어왔습니다만, 매 해 길드원들이 고생해서요. 올해의 생일 선물은 간단히 꽃으로만 받습니다.
이 소식에는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외국까지도 발칵 뒤집혔다. 꽃이라니, 무슨 은유법인가? 그렇게 생각한 이는 적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성현제의 말 뒤에 숨겨진 진의를 캐내려 들었다. ○○던전에서만 핀다는 그 희귀한 꽃을 받고 싶다는 뜻이라는 둥 □□□던전 보스가 드랍한다는 꽃 모양 아이템이 틀림없다는 둥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다. 와중에 성현제는 흠잡을 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웃으며 또 하나의 폭탄을 풀었다. 저는 장미가 좋습니다, 그것도 싱싱한 생화로요.
신명난 것은 한국의 성현제 팬클럽이었다. 길드 전체를 꽃으로 둘러싸 버리자는 의견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디어디에만 난다는 희귀하고 아름다운 장미의 정보들이 우후죽순처럼 팬 카페에 쏟아졌다. 그리고 각성자 관리실 가장 깊숙한 안쪽에 앉아 그 모든 흐름을 지켜보던 송태원은 피로한 미간을 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장미꽃이란 말이지…….
하여 송태원은 한 달 내내, 굳이 신경쓰고 싶지 않아도 눈만 돌리면 무의식적으로 꽃집을 찾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장미가 존재하는지도 송태원은 이 때 처음 알았다. 개량종이며 뭐며 심지어 최근에는 던전 안에서 나는 것과 믹스한 새로운 교배종들까지 수백 수천 종류의 장미가 존재한다고 했다. 하도 집 근처의 꽃집을 몇 번이고 빤히 바라보고 있다 보니 안쓰러이 여긴 꽃집 주인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송태원은 저와 성현제의 관계가 퍽 미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전투행위의 연장선처럼 난폭하게 몸을 겹치던 행위도 최근에 와서는 꽤나 평탄해진 상태였다. 키스라거나 애무 같은, 이전이라면 쓸데없다고 일축했을 행위에 일일이 공을 들였고 눈만 마주치면 날을 세웠던 분위기도 제법 부드러워졌다. 주고받는 말에 자연스럽게 성적인 농담이 섞여도 우스갯소리로 넘길 정도가 된 데다 최근에는 송태원이 먼저 성현제의 사택으로 걸음하는 지경이다. 늘 여유시간이 없어 거의 직전에나 보내는 간단한 문자 통보를 성현제는 거절한 적이 없었다. 비록 도착하면 코끝을 살짝 비틀며 비아냥대는 발언을 던질지언정 송태원의 방문 자체는 기꺼워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현제도 송태원도 그 과정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지극히 흔해빠진 흐름은, 그러니까, 아주 평범한 보통의 연애 같았다. 각성 이후에 송태원이 결코 손에 넣어볼 수 있을 거라고는 언감생심 바란 적도 없었던 그런 것. 상대가 비정상의 대명사 같은 성현제라는 점이 가장 아이러니했으나 그럼에도 송태원은 그 흐름에 저항할 수 없었다. 사실은 저항할 기분도 들지 않았다.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그러한 것이 아니던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송태원의 마음은 성현제에게 괴었다. 그것이 마치 자연의 이치라는 듯이 당연하게도 그랬다.
송태원은 어둠 속에서도 생생히 피어 있는 장미들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밤늦은 시각이었지만 S급의 시력은 닫힌 꽃집 안쪽을 살펴보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송태원은 이틀 뒤로 성큼 다가온 성현제의 생일을 생각했다. 각성자 관리실 이름으로 보내는 선물은 이미 어제 세성 길드로 발송한 참이었으나 성현제에 대한 송태원 개인의 선물은 아직이었다. 적어도 올해만큼은 그가 원하는 선물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아름답고 화려한 장미꽃을.
-
생일날 당일 아침, 송태원은 자주 지나치던 집 근처의 꽃집에 꽃다발을 주문했다. 던전 식물과의 교배종이라는 짙은 호박색 장미는 빛이 비쳐들 때마다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투명하고 우아한 성현제의 눈을 떠올리게 하는 꽃이었다. 가격은 결코 낮지 않았지만 송태원은 주저하지 않았다. 이따 저녁 때 찾으러 오겠습니다. 묵직하고 단정한 말에 꽃집 주인은 최고로 예쁘게 만들어 둘 테니 언제든 찾으러만 오시라며 가슴을 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오후 늦게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다. 하필이면 강남 한복판에서였다.
각성자 관리실의 팀이 사건 현장을 모두 수습한 것만 해도 해가 한참 넘어간 뒤의 일이었고 다들 너덜해진 몸으로 사무실로 귀환했을 때는 이미 자정 직전이었다. 이후의 피해 상황 보고나 복구 대책 등에는 또 꼬박 일주일 정도 야근이 필요할 것이 뻔했다.
송태원은 사고 현장의 잔해로 여기저기 지저분해진 몸으로 자리에 앉고서야 반짝이는 탁상시계를 보고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열한시 삼십육분.
성현제의 생일이, 앞으로 24분 뒤면 끝난다.
"죄송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예? 뭐라고요, 실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이로 인한 업무 지연은 내일 꼭 처리하겠습니다."
"잠ㄲ, 송실장님? 실장님?!"
실장니임! 애타게 부르는 부하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송태원은 순식간에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엘리베이터를 쓸 여유도 없어 다급히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도중에 확인한 휴대폰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몇 시간 전 수십 통의 업무 연락에 씹힌 성현제의 문자 한 통이 들어와 있었다. [일 끝나면 들르게]. 송태원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지면을 박찼다. 종이처럼 가벼워진 몸이 순식간에 바람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갔다.
성현제는 일이 끝나면 오라고 했다. 오후 늦게야 던전이 터졌다는 보고도 진작 그의 귀에 들어갔을 터다. 그러니 아마 오늘 내로 송태원이 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고 있을 테지만…… 거기까지 생각하고 송태원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즈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면 언제 어디서 수틀릴지 모르는 것이 또한 성현제이기도 하다. 심지어 오늘은 생일이었다, 아마도 그 또한 나름대로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오늘 내로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한구석에서는 과연 송태원이 언제쯤 도착할 것인지 시험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송태원이 아는 성현제라면 그랬다.
송태원은 한 줄기 바람처럼 한강 대교를 건너며 생각한다. 사실 그런 것들이야 아무래도 좋지 않나.
구구절절하게 변명을 늘어놓는 제 자신에게 질리면서도 송태원의 속도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온 몸의 근육이 팽팽히 당겨지고 늦여름의 후끈한 밤공기에 땀 한줄기가 흘러내린다.
밤의 가로등이 흐르는 빛처럼 끝도 없이 그의 곁을 스치고 사라지는 것에 초조해질 즈음 송태원은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는 익숙한 건물의 형태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 흘끗 손목시계를 보면 분침은 11을 가리키고 있었다. 송태원은 주머니 안의 작은 카드키를 꽉 쥐었다.
-
고요한 저택에 어울리지 않은 요란한 소리가 난 것은 열한시 오십칠분께의 일이었다.
거의 구르듯이 문을 열고 뛰쳐들어온 송태원을 보고 마침 로비에 있던 성현제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다 알고 있었다는 몸짓 같기도 했고 혹은 의외라는 표시 같기도 했다.
송태원은 전력 질주하느라 흐트러진 숨을 세 번 만에 진정시키고 성현제의 앞에 도착해서야 아, 하고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대한 사택 안은 완전히 꽃으로 도배된 것 같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제야 송태원은 저가 아침 일찍 주문해두고 온 꽃다발을 떠올렸고, 곧 어차피 이 시간에 가봐야 꽃집 문이 닫았을 거라는 사실만 새삼 상기해냈다. 곧고 검은 눈썹 끝이 미묘하게 시무룩한 방향으로 휘어 내려갔다. 성현제는 그 모양새를 흥미롭다는 것처럼 보며 팔짱을 꼈다.
들어온 꽃을 정리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슬랙스에 셔츠 한 장이라는 편한 차림으로, 그나마도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손에 꽃송이를 쥐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대한민국 최강 헌터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도 어딘가의 꽃집 청년처럼 보였다. 사십 언저리의 사내가 이러하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송태원이 잠시 말문을 잃고 있자면 성현제는 눈을 가늘게 하더니 웃음의 형태를 띠었다.
"이 시간에 굳이 요란하게 방문한 건 뭔가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겠지, 송 실장."
"그, ……죄송합니다."
"사과하러 왔나? 뭐에 대한 사과지?"
금빛 눈이 한층 더 웃음을 담았다. 내가 듣고 싶은 건 그게 아닌데. 성현제가 검지 끝으로 손목시계를 톡톡 건드렸다. 송태원은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반사적으로 입을 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생일 축하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내일 오후쯤에나 부랴부랴 올 줄 알았더니 의외로 빨랐군 그래."
"……죄송합니다."
"뭐, 던전이 터지는 게 자네 탓은 아니지. 어쨌거나 열두 시 전에 도착했으니 가산점은 주겠네."
성현제는 손에 들고 있던 장미를 아무렇게나 꽃바구니 안에 던져 넣었다. 로비에서부터 응접실까지, 어쩌면 방 구석구석까지 들이차 있을지도 모르는 엄청난 장미꽃 다발과 바구니와 화환의 행렬로 저택 안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장미향에 가득 찬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포장도 뜯어보지 않은 것처럼 대강 발치에 구르고 있기 일쑤였다. 자연적으로 날 수 없는 온갖 오묘한 색의 희귀한 장미들도 숱하게 널려 있었다. 그것을 본 송태원이 무심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 망망대해 같은 꽃밭 속에서, 어차피 저가 준비한 꽃다발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 뻔했다. 차라리 이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송태원이 그렇게 복잡한 심경을 억누르며 주변을 휘 둘러보고 있자니 성현제가 방금까지 만지작대고 있던 꽃바구니를 발끝으로 툭 차내고서 다가왔다.
"그런데, 자네는 나에게 꽃을 줄 생각은 없는 건가?"
빈 손을 바라보며 묻는 성현제의 어조는 딱히 화가 난 것은 아니었지만 송태원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솔직하게 답할지 적당히 둘러댈지 순간적으로 고민한다. 아무튼, 이런 쪽에서는 가끔 침울한 성격인 것을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였다. 송태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준비는…… 했었습니다만. 찾으러 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응? 아,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네. 내가 찾아왔거든."
"……예?"
"내가 찾아왔다고. 자네 이름으로."
뭐가 문제냐는 듯 말똥하니 눈을 뜨고 이쪽을 보는 모습에 송태원은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어째서 성현제가 꽃을 주문한 사실을 알고 있으며 왜 그걸 알아서 직접 가져왔는가 하는 사소한 문제는 제쳐두고서라도, 갑자기 어떤 한 가능성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건 일종의 확신에 가까운 깨달음이었다. 송태원은 어쩌면 가장 처음부터 궁금해 했어야 할지도 모를 질문을 그제야 입에 담는다.
"왜 굳이 이번 생일에는 장미꽃만 받고 싶다고 발표하신 겁니까?"
"자네에게 장미 꽃다발 좀 받고 싶어서."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살짝 눈썹까지 찡그리며 대답하는 그 모습에 송태원의 두통이 조금 더 심화됐다. 그러니까, 지금 이 엄청난 대국민, 아니 대세계 발표가 오로지 자기한테서 장미를 받기 위해서 친 거대한 전략 사기였다 이 말인가.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스케일이 성현제답다고 한다면 성현제다운 것이 더욱 어이가 없었다.
송태원이 작게 신음하며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자면 성현제는 태연한 걸음걸이로 소파 위에서 꽃다발 하나를 들고 왔다. 받게나. 송태원이 얼떨결에 받아들어 보니 그건 아침에 자신이 주문하고 갔던 꽃다발이 틀림없었다. 금빛이 흘러넘치는 것처럼 반짝이는 싱그러운 장미 다발. 송태원은 다시금 떫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 꽃집 주인은 드물게도 TV와 거리가 멀어 송태원의 신분을 모른 채 평범하게 대해주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의 빛으로 후려치는 정도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성현제의 얼굴까지 모르고 있을 거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분명히 기절할 듯 놀라 뒤집어졌겠지.
"자, 송태원. 꽃은 내가 준비했어. 그럼 자네가 나한테 해야 할 말이 있지 않나?"
성현제는 뻔뻔하리만치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요구해 온다. 그럼에도 거기에 오만은 느껴지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이 합당하게 느껴지니 신기한 일이었다. 자비롭지만 제멋대로이고 온전하지만 그럼에도 무결하지만은 않은, 신과 인간의 양면성을 동시에 띤 생물. 송태원은 꽃다발을 들고 성현제에게 바싹 다가섰다. 흘러나올 말을 짐작하면서도 재촉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그 모양새에마저 가슴이 떨리니 확실히 이건 중증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비로소…….
"늦었지만 다시 한 번,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손에 있던 꽃다발이 주인을 찾아 성현제의 품에 안겨 들어갔다. 송태원은 말갛게 깜박이며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그 눈 위에 가볍게 입술을 누르고, 뒤이어 뺨과 입술에 스치는 듯한 입맞춤을 떨궜다. 금빛 눈이 약간 즐거운 기색을 담고 휘었다. 송태원은 자신이 올바른 대답을 해야 할 때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건넨 적 없던 그 말을, 지금과는 조금 더 다른 형태의 관계로 올바르게 나아가기 위해,
"사랑합니다, 성현제 씨."
정답을 알리는 대답 대신 성현제의 손이 송태원의 뒷목을 휘감으며 입술이 겹쳐졌다. 나도 그래, 태원아. 속삭이는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하고 맞닿은 품 안에서 황금빛 장미 꽃잎이 흩어졌다. 새벽이 내려앉은 여름밤에, 그로써 세계에 단둘이었다.

* Suits me, suits you *
[태원현제]Suits me, suits you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의심 한 점 없이 붉디 붉기만 한 장미였다. 올올이 살아있는 뾰족한 가시마저 그에게 어울렸다. 성현제는 그 푸른 가시의 끄트머리를 상처 하나 입지 않는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아, 그가 어서 투박한 손길로 이 장미를 받아들였으면. 미심쩍은 듯, 못마땅한 듯, 굵은 막대가 찌르듯이 강인한 눈길이 그를 바라볼 텐데. 한낱 실체 없는 시선에 불과한 것이 어찌나 깊숙이 자신을 찌르는지 그는 모를 테지.
옅은 미소가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붉은 꽃잎에선 어울리지 않게 파릇한 향이 났다.
그것은 의심할 데 없이 붉은색이었다.
붉은 장미의 결에는 검은 그림자가 스몄다. 그리하여 장미는 검붉은 색이 되었다.
검은 천의 주름엔 붉은 불길이 어렸다. 그것 역시 검붉은 색이라 칭할 수 있었다.
⋯⋯자꾸만 흐르는 피 웅덩이 속에서 송태원은 언제나처럼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성현제의 가슴 포켓엔 아직 전해주지 못한 붉은 꽃송이가 피어있었다.
"⋯⋯송태원."
답이 없을 것을 알면서 미련하게도 입을 열었다.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다.
그 즈음엔 가히 유쾌한 일이 잦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날도 제법 들뜬 기분이었다. 헌터 대련 이벤트로 헌터협회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을 이들에게 보낼 선물을 골랐다. 그래, 꽃바구니를 보내지. 그들에게 어울릴 만한 것으로. 말끝을 맺기도 전에 슬며시 오르던 상승곡선이 바닥을 쳤다.
그에게 어울리는 꽃이라. 성현제는 꽃바구니의 내용물을 일일이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올렸을 뿐이다. 한유진에게는 풍성하고 옅은 색의 꽃다발을, 작은 붉은 색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이미 그에겐 장미 꽃다발을 보낸 적이 있으니. 그리고⋯⋯.
그리고? 어둡게 탄 피부, 뻣뻣한 검은 정장, 굵고 투박한 손길 그 어디에 붉은 장미를? 성현제는 제 머릿속을 채운 생각에 코웃음을 치려했다. 그러나 입꼬리는 미미하게 굳어졌을 뿐이었다.
성현제가 손을 휘저었다. 묘하게 어두워진 기색에 주변의 이들이 눈치껏 물러나고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 고요함 어딘가를 노려보는 눈길은 가라앉은 듯, 혹은 매서운 듯도 했다.
툭, 공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벨소리가 솟아오른다. 성현제는 의식적으로 입매를 끌어당겼다. 어찌됐든 내용물조차 모르는 꽃바구니는 무사히 전달 될 만큼의 시간이 지난 것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혀는 매끄럽게 굴러갔다.
사과의 선물에 답장조차 없더니, 사과의 선물은 무슨⋯⋯. 오고가는 소소한 말장난. 한유진이 작게 투덜거리다 답장 대신 귀엽기 짝이 없는 부탁을 던졌다. 너무 쉽고 사소해서 되레 받아본 적 없는 류였다. 기분이 오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렇게나, 그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즐거운데.
그러나 검은 화면의 스마트폰이 내려놓아짐과 동시에 어둑한 공기가 그를 감쌌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종이에는 뻔한 날짜, 뻔한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익숙하다 못해 질렸다. 잔뜩 예민해진 혀가 얼얼해지다 무뎌져버리듯.
입가를 매만지며 남은 손으로 종이를 짚었다. 슬쩍 걸터앉은 몸이 기울어져 앞코가 들렸다. 그는 아마 흰 정장을 입고 흰 크루즈에 올라 갖가지 꽃들이 장식한 내부를 별 감흥 없는 눈으로 바라볼 터였다.
과연 그 중에 붉은 장미는 몇이나 될까?
그가 보낸 꽃바구니 중 과연 몇 송이나 그들의 품에 들어갔을까? 기실 단 한 송이도 쥐여지지 않은 채 버려지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러기위해 쓰인 것이 아닌가.
그 꽃바구니 사이에 붉은 장미는 몇이나 있을까?
성현제는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 코끼리를 생각하듯 붉은 장미를 되뇌었다.
날이 지날수록 기시감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에 반발하듯 기억 한구석을 후벼 파는 이질감도 함께였다
"유명우 헌터는 조금 늦어도 되네. 예림 양은⋯ 지금쯤이 적당할까."
"한유진 님은⋯."
"한유진 군은 특별히 전달할 예정이라."
성현제는 빙긋 웃었다. 자기 자신의 일인 데도 마치 시험하듯이 그는 퍽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렇게하면 숨어있던 무언가가 튀어나오기라도 하는 마냥.
"아, 송태원 실장에게는 맞춤 정장을 동봉해야지."
송 실장 씀씀이야 뻔한 노릇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성현제의 영역에 발을 들이면서 그런 꼴이라니. 초대한 이로서 그럴 수가 있나.
받아주지 않을 것을 물론 알았다. 그대로 반송당한 흰 정장을 성현제는 구태여 제 눈에 한번 담았다. 먼지 한 톨 없이 매끄러운 표면에서 그가 찾으려 했던 것은 없었다.
정적이 다시금 그를 휘감았다. 여름이 지루하게 달려 나갔다.
검은 어둠이 한 겹 덧씌워 서늘해진 여름밤에 은빛 광채가 뿌려지는 날이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나른하고 후덥지근한 데자뷔, 그를 깨우는 선명함. 뒤엉켜버린 오감으로 불투명한 기억을 칠한다. 이미 물려버린 흰 정장과 크루즈는 도화지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칠해 버릴 수야 없지.
성현제는 제 시야 한 구석을 메운 검은 실루엣을 바라본다. 엉망으로 부서져 내린 갑판이나 흥건한 물웅덩이도 성현제를 깎아내리진 못했다. 그러나 저 수수한 검은 덩어리는, 마치 흰 캔버스의 오점처럼⋯⋯.
성현제는 한유현의 품에 안겨 그를 도발하는 한유진을 마주보았다. 그것은 꽤 순순히 고개를 숙일만 했다. 속이 탁 트이는 자극과 동시에 곁눈을 채우는 검은 얼룩. 손끝이 까끌거렸다. 작은 화풀이정도는 필요한 날이었다.
터져 나오는 불꽃, 작은 폭풍에 휩쓸렸다. 그 뒤로는 겪어본 적 없는 일들뿐이었다. 흠뻑 젖은 채 바다를 표류하고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다 칭해도 될 생일파티를 맞이했음에도 성현제의 기분은 깨지지 않았다. 그랬어야 했다.
다시금 박혀오는 검은 얼룩이 지워지지 않았다.
"세성 길드장님."
성현제는 이름 모를 바닷가에 서서 바람을 맞이했다. 여름 바람이 서서히 물기를 말렸다. 같이 물가에 떠밀려온 이들은 이미 떠났다. 사고를 친 당사자와 수습할 이들만이 남아 어수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이마에 들러붙었다. 축축한 바다 내음, 조잡한 조명과 바다에 물결치는 달빛 물비늘, 밤에 파묻힐 듯 가라앉은 남자.
"내가 보낸 옷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야, 송 실장."
송태원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받을 수 없다는 것 알고 계시잖습니까."
"핑계하고는."
원한다면 열 벌이고 스무 벌이고, 그 어떤 것이든 아무도 막을 수 없을 텐데. 거부하고 있는 것은 송태원 오로지 그 한사람뿐이다.
맞지 않는 옷을 구겨 입고 있는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닐 터인데. 상처 입지 않은 손끝이 어째서 따끔거리는 것인지.
전류가 튀었다. 파지직, 불투명한 전광판이 깜빡인다. 가로등이 수그러들며 은빛 달만이 태양처럼 남았다. 사위가 고요해지며 파도 소리가 한 차례 밀려들었다.
"어울리지 않아."
텅 빈 바닷가에 파도가 끊임없이 다가오다 멀어졌다.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 듯한 고요. 성현제는 그 파도 위에 내어버리듯 말 한마디를 얹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글쎄, 자네의 그 값싼 정장이라든가?"
파도의 희고 검은 윤곽을 더듬던 눈길이 옮겨졌다. 사슬이 쏘아나간다. 빛 없이 작은 번뜩임만으로 다가오는 그것을 송태원은 피하지 않았다. 죄인 오른팔의 소매가 구겨졌다. 그 틈새를 메운 사슬이 어둡게 묻혔다.
"자네, 생각보다 더."
그저 가늘게 좁히려고 했던 눈가가 찌푸려진다.
"검은 색이 어울리지 않군."
갑자기 홱 당겨져 오는 사슬을 송태원은 남은 손으로 끊어냈다. 가늠할 수 없는 속내를 마주하는 것보다 코앞으로 다가오는 전의를 맞이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그 사이 성큼 다가온 성현제의 손이 송태원의 빈 손목을 스치듯이 쓸었다.
"시계는 은색이 좋겠군."
헌터 협회에서 그 정도도 마련해주지 않던가? 설핏 웃는 성현제의 팔을 내쳤다. 성현제는 다가왔던 그때처럼 꽤나 순순히 매끄럽게 멀어졌다. 끓을 듯 말듯한 전의에 송태원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를 사리물었다.
"무슨 짓입니까."
"내가 변덕이 죽 끓듯 하던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사슬이 다시 송태원을 휘감으려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게 잘해줄 때 순순히 받아들이지 그랬나."
원한다면 백 벌이고, 천 벌이고 강요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겐 있었다. 제 의지란 잔뜩 억눌러 버리고 목줄에게 줘 버린 송태원을 휘두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사슬이 흩어지는가 싶더니 주위로 벼락이 내리꽂혔다. 가는 빛줄기 사이로 송태원이 빠져나왔다. 부러 살짝 벌려 놓은 길목에서 성현제는 기다리다 그가 가까워질 때쯤 훌쩍 물러났다. 매섭게 따라오는 발끝에 사슬이 매달렸다. 사슬을 잡아당겨 보았지만 오히려 질량이 늘어난 송태원을 따라 떨어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선물을 열어는 보았나?"
남은 한쪽 다리마저 사슬이 엉겼다. 성현제의 손이 옷깃을 끌어당겼다. 검은 옷자락이 찢어질 듯 팽팽해졌다.
"자네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흰 색이었는데."
빛을 품은 손길이 송태원의 턱 끝에 가 닿았다. 그 팔목이 붙잡힘과 동시에 송태원의 옷깃 밑으로 검은 것이 올라왔다. 손끝에 묻어나올 듯한 그것에 성현제는 털어내듯 팔을 빼냈다. 사슬이 반대로 팔을 얽고 풀려난 다리가 등을 찍으려 다가왔다. 짧은 공방 끝에 지상이 가까워졌다.
쾅-! 콘크리트 바닥이 쩌적 금이 가고 그들은 다시 처음의 거리를 되찾았다.
"혹시 다른 색을 원하나? 나는 관대하니까."
기어코 송태원이 먼저 성현제에게 달려들었다.
"네이비 블루는 물론 안 되지만. 너무 뻔하잖나."
"밤색은 어떤가? 그것도 나쁘지 않아."
성현제는 조금의 틈이 있을 때마다 쉬지 않고 말했다. 송태원의 미간이 깊어질수록 성현제의 미소도 짙어졌다. 입 한번 열지 않는 송태원을 두고 이 대화 같지 않은 대화가 즐거운 이유는 무엇일까.
벼락이 내리치고, 검은 와이어와 은색 사슬이 부딪혔다. 잠시 힘겨루기를 하듯 팽팽히 늘어지다 얇은 와이어가 퉁, 먼저 끊어져 하늘 위로 둥근 곡선을 그렸다.
"이참에 경차도 배상하면 되겠군. 송 실장 취향은 빨간 스포츠카인 것 같지만."
"⋯⋯."
"아쉽게도 자네, 붉은 색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군."
부드럽게 허공을 유영하던 사슬이 제 주인의 기분을 따라 땅으로 거칠게 곤두박질쳤다. 마구잡이로 바닥을 파헤치는 사슬에 자그만 돌 부스러기들이 온 사방으로 튀었다. 송태원의 눈가를 스친 돌조각이 튕겨나갔다. 그는 덤덤히 한쪽 눈을 찡그렸다.
성현제가 땅을 박찼다. 그가 꽤 가까이 다가온다 싶은 그때 갑자기 뜨거운 열기와 흐릿한 연기가 눈앞을 메웠다. 화염 속성 아이템인가. 몸을 물리는 송태원의 시야를 무언가가 반쯤 덮었다. 그는 황급히 그것을 잡아 내쳤다.
손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떨어지고 나서야 송태원은 제 머리 위를 덮으려 했던 것이 옷이란 것을 알았다. 성현제의 인벤토리에서 나왔을 옷, 실레키아의 날개였다. 송태원의 손을 벗어난 코트는 휙 낚아 채여 그를 빠르게 지나쳤다. 쭉 바라보던 해변의 어느 자갈들 위에 구둣발이 툭 내려앉고 풀썩, 한 박자 늦게 흑적색의 코트가 베일처럼 성현제의 머리와 어깨를 덮었다.
"내가 훨씬 더 어울리지 않나?"
성현제는 웃었다. 앞을 가리는 옷자락을 걷어 올린 채, 달빛과 바다를 등진 얼굴은 흑적색의 코트가 엷은 윤곽을 빛내며 둘러싸고 있어 어둡기 그지없었다. 바닥을 때린 반사광이 둥근 눈의 윤곽을 덧그렸다. 코트의 붉은 색을 창백한 달빛이 내리쬐어 가렸다. 어둑한 가운데서도 금색 안광은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그 눈만으로 그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순식간에 사그라든 투기에 꼼짝도 할 수 없이 이상한 적막이 흘렀다. 오직 송태원만이 그렇게 느꼈다. 송태원은 얼굴을 쓸어내리듯 손을 들어 눈을 덮었다. 성현제는 늘 이해할 수 없게 굴었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더⋯⋯.
"말은 정확하게 해야지, 송 실장."
내내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구는 자네를 두고 내가 얼마나 입을 아프게 놀렸는데.
어떤 말이 그를 찌푸리다 못해 못 견디게 만들었는지. 성현제는 갸웃이 머리를 기울였다. 작은 움직임에도 머리에 걸린 코트의 끝자락이 살랑거렸다.
하지만 송태원은 어떤 문장도 잡아내지 못했다. 그가 입을 연 이래로 모든 말이, 모든 문장이, 그를 향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마치⋯⋯.
"제게⋯⋯ 당신이 어울린다는 듯이⋯⋯."
송태원은 이마를 짚었다. 이마가 뜨거웠다. 갑자기 들이닥친 화염 탓이다. 바닷바람의 짠 내음이 옷 밑의 소금기에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성현제의 머리에 매달려있던 물기도 어느샌가 말끔하게 말라 있었다. 정돈되지 못한 머리칼이 눈가를 간지럽혔다.
성현제는 턱과 입매를 느릿하게 쓸어 가렸다. 조금쯤은, 아니 사실은 많이 놀랐던가. 손목 아래로 흰 소매가 눈에 들어왔다.
"그랬군."
그런 거였나. 남들은 입을 모아 그토록 그에게 어울린다 칭찬하던 검은 정장이 왜 성현제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검은 색과 잘 맞는 붉은 색 역시 성에 차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던가. 흔치는 않더라도 오늘 몇 명이고 입었을 흰 정장이지만 제가 준비한 송태원의 옷은⋯ 그가 입고 있는 것과 꼭 닮아있었다.
"그런 거였어."
성현제가 다시 한 번 뇌까렸다. 연기의 잔재가 남아 공기가 아직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성현제의 서늘한 눈빛 한 줄기에 날아가 버릴 더위. 그러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선 안 되었다. 송태원의 시선은 애매하게 성현제을 비껴나갔다.
"송태원 실장."
파도는 쉬지 않고 오고 갔다. 해변을 향해 묵직하게 몰아칠 때의 소리는 천둥소리와 엇비슷한 데가 있었다. 성현제의 목소리는 그런 것에 묻힐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송태원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음을 눈치채지 못할 사람도 아니었다. 성현제는 말 한 마디 이후의 더 긴 침묵으로 송태원을 종용했다.
성현제의 종용에도 고집스레 버티고 선 그야말로 성현제가 알고 있는 송태원이었다.
"나는 자네와 내가⋯ 우리가 꽤 잘 지냈다고 생각하는데."
성현제는 송태원이 바라는 괴물이 되어주고, 다시 그런 자신을 비추는 송태원을 바라보는. 서로를 지탱한다기엔 너무 얄팍한 끈으로 된 묶음이다. 그러나 그 얇은 줄이 있기에 3년이란 시간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겠지.
"당신께서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그런 거겠지요."
네겐 그렇지 않았나봐? 성현제는 반문하는 대신 기다렸다. 송태원의 시선은 아직 성현제의 뺨 언저리에 아슬하게 걸려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것도 몇 년 하다보면 지루해질 만 하지 않겠나? 송 실장도 알다시피 내가 좀, 변덕이 심해서."
"지금이 그 때란 말입니까?"
불안정하게 힘이 꾹 들어가는 주먹에 그를 바라보는 눈길이 자못 흥미로워졌다. 저런, 또 무슨 나쁜 상상을 하는 건지.
이미 숱하게 봐온 송태원은 어떤 자극에도 침잠해 갈 뿐이었는데. 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겠지. 그도, 자신도.
"여태까지 내가 자네에게 맞춰 어울려주었으니."
"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였을 것이다. 송태원에게 성현제는 언제나 괴물일 뿐, 원한다면 언제든 괴물이든 인간이든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훨씬 그답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비웃음 섞인 한숨을 뱉어냈다. 꿈틀하고만 자신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 성현제를 쏘아보려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주한 금색은 녹아버릴 듯 한 여름의 빛깔, 꽃잎 안쪽에 숨겨진 다디단 꿀색.
"괴물 노릇은 지겨워져서 말일세."
숨이 막힐 듯한 여름의 끝자락에 송태원은 붙잡히고 말았다.
무의식 아래가 들끓었다. 이건 그저 괴물이 홀리는 말일 뿐이어야만 했다. 악마의 속삭임이 더 달콤하듯이. 그러나 꿰뚫린 뱃속이 저릿했다.
뚜벅, 구두 굽에 채이는 자갈 소리는 경쾌했다.
"이번엔 자네가 내게 어울려줘야 할 차례네."
툭 툭 가볍게 튕겨 오르는 자갈들에 두드려 맞은 것 같다. 조막만한 말들이 어찌나 무거운지 송태원의 속을 온통 멍투성이로 만들었다.
성현제는 한없이 가뿐하고 명쾌해 보였다. 송태원은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만일 자네가 그러고 싶다면."
날 듯이 다가온 그가 멈춰 섰다. 그들은 이제 눈동자에 서로를 비출 만큼 가까웠다.
희고 긴 손가락이 공기를 헤엄쳤다. 파도가 밀려온다. 송태원은 제 마음을 호수처럼 잡아 맨다. 메마를 수는 있어도 결코 풍랑은 일지 않는 늪처럼 가라앉은 호수다. 해일은 다가오는 성싶더니.
비어있는 왼 가슴, 콕 박힌 마음 끝에서 작은 파동이 일었다.
"붉은 장미를 주게나."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으로.
송태원은 그날로부터 붉은 장미에 사로잡혔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고 머리 한 구석에 작은 꽃밭이 피었다. 이윽고 그 꽃들은 머릿속을 뒤덮고, 눈앞을 가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콧속에서 간질거리는 꽃향기가 비어져 나올 때까지 송태원은 침묵했다.
입을 열면 붉은 꽃잎을 와르르 쏟아내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뱉어낸 꽃잎 하나하나가 꼭 닮은 붉은 장미를 찾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