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OFF THE RECORD *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유도 국가대표 아시안게임 금메달 리스트. 빛나는 영광의 나날도 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더는 선수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빛바랜 과거가 되어버렸다.
훈련 일정이 없는 오프였다. 미루고 미루던 고등학교 동창들과 만남 후 기분 좋게 취기를 유지한 채 오른 귀갓길에 성폭행범과 맞닥뜨렸다. 본가로 가는 길목 가로등도 없는 후미진 골목 안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여성의 살려달라는 목소리에 홀린 듯이 다가갔다. 막 여성을 덮치려던 쓰레기를 제압하던 과정 중에 굴러다니던 쇠파이프로 어깨를 얻어맞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부상이 선수로서의 생명이 끝이 났음을 알렸다. 용감한 시민상과 맞바꾼 선수 생명이었지만 그 일이 후회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스물 중반. 인생의 태반을 운동에만 매진하던 저가 새로운 진로를 찾는 일에 막막함을 느꼈을 뿐이다.
그저 하고 있었기에 하던 운동을 타의로 못하게 되고 나니 모든 것들이 지루하고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애써 그렇게 마땅히 맞는 적성이 없어서 정한 진로라고만 생각했던 유도가 그 무엇보다 진심이었음을 뒤늦게 인정하고 나자 마음이 퍽 아려왔다.
그 뒤로 칩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방문 밖으로 두문불출하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저어되었다. 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얼굴을 보기만 해도 괜찮으냐는 질문의 일변도였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밖이 잠잠해질 때까지 죄지은 사람처럼 방구석에 처박혀만 있었다. 그리고 그러고 있는 저가 마뜩잖았는지 하루는 저의 여동생이 방문을 부서지라 두드려 왔다. 그 소리에 마지못해 방을 나서자 그렇게 답답하게 있느니 나가서 영화나 보고 오라면서 영화 표를 건네주었다.
결국, 무거운 엉덩이를 떼어내고 동생이 준 영화 표를 들고 영화를 보러 나왔다. 받은 영화 표의 제목과 같은 영화의 팸플릿을 뽑아들고 대기 좌석에 자리했다. 이쪽으로는 통 문외한인 저가 봐도 유명한 배우가 팸플릿의 전면을 채웠다. 밝은 금 갈색 머리칼에 금빛 눈동자. 언뜻 보기에는 한국 사람보다는 외국인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은 아이 홀과 그윽한 눈빛에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티비 광고 속에서 스쳐 지나갈 때도 대단히 눈길을 끄는 사람이라고 느끼긴 했지만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 엔딩 크래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도 여운에 젖어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보다 못한 직원이 그만 정리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시라는 말에야 부랴부랴 벗고 있던 모자를 다시 눌러쓰고 극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날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것을 그만두고 도서관부터 찾아 나섰다. 운동 특기생으로 대학 특례입학을 하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공부 머리가 전혀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도서관에 존재하는 연기에 관한 서술이 들어간 서적이란 서적은 다 모아서 파고들고 무작정 외우기 시작했다. 책을 통째로 외운다고 연기력이 늘어난다면 연기를 못하는 배우란 존재하지는 않겠지만 우선 기초는 다지고 시작하고 싶었다.
그렇게 악바리로 무식하게 끌어모은 서적들을 독파하고 모아둔 돈으로 무작정 연기학원에 등록부터 했다. 저가 의욕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안도하신 것인지 지원을 해주시려는 부모님을 만류했다. 그저 오랜만에 들끓는 마음에 자신의 능력이 닿는 곳까지 혼자서 해보고 싶었다.
***
“태원씨. 오디션 한번 볼래요?”
연기 선생님의 소개로 영화 오디션을 보기로 결정됐다. 연기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한 지 꼬박 6개월째 되던 날이었다. 지금, 이 상태로도 괜찮은 거냐고 저어된다고 하자 1대1 수업도 좋지만, 현장에서 배우는 것들도 많으니 힘껏 부딪치고 깨지고 오라는 말로 등 떠밀어 주었다.
오디션을 보기로 한 역할은 주인공의 오른팔인 격으로 대사는 크게 많지 않았지만, 앵글에 많이 잡히는 배역이라 경쟁률이 대단히 높은 자리였다.
“오디션 번호 50번 들어와 주세요.”
일찌감치 운동을 그만두고 취업 전선에 뛰어든 친구들로부터 면접이 어떻고 얼마나 기 빨리는 일인지 들었기에 조금은 긴장되던 마음을 겨우 다잡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로서는 50번째로 보는 오디션 참가자에 대한 기대는 크게 없는지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얼굴들이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도전하고 싶은 의욕마저 꺾일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감독님이 배우 이름과 소속사 유명세를 따지고 드는 사람이 아닌 데다가 신인 등용문으로 유명하신 분이라 오디션도 이름이 아닌 번호만 매겨지고 진행되는 거라고 들었다. 뭐 다른 심사자들이 미리 눈 찍어 둔 배우가 있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제일 오른쪽에 앉아있던 깐깐한 인상의 안경을 낀 남자의 말과 함께 면접, 아니.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당일 오디션은 저를 마지막으로 정리되었다. 질의 문답 시간에 뜨뜻미지근했던 분위기를 상기하고는 선생님에게 이번 오디션은 아무래도 그른 것 같다는 말을 하려고 핸드폰을 드는 순간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시야에 걸리는 사람이 없어 헤매는 와중에 다시 팔을 툭 치는 손길에 내려다보았다. 처음 오디션 시작을 알렸던 안경 끼고 예민해 보이던 인물이었다. 끝나고 나서야 생각났지만. 이번 영화의 감독이었다.
“키가 어떻게 되죠?”
“...198입니다.”
저의 키가 크기도 컸지만, 저를 올려다보는 감독님도 남자치고는 매우 작은 체구와 키를 가지고 있었다. 겨우 저의 허리춤에나 올까. 조용히 키를 말하자 잠시 턱밑을 쓰다듬던 감독님은 조만간 연락할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을 끝으로 돌아 가버렸다.
그리고 얼떨떨한 상태로 선생님과 약속장소에서 얼굴을 보자마자 감독님과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김 감독 님 마음에 든 거네 송태원 씨가.”
“...그런 건가요?”
“그 감독님 쓸데없이 말 걸고 그런 거 안 해요. 다 마음이 있으니까 하는 소리지.”
의미를 알 수 없어 난감해 하는 저에게 감독님에 대해 잘 아는 듯 보이는 선생님의 첨언 뒤따라 왔고.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뿌듯한 얼굴을 하고서는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좋다니까. 하는 선생님에게 어설피 웃어 보였다.
그리고 꼬박 일주일 만에 영화제작사에서 계약하자는 연락이 왔다. 크랭크인이 시작될 때까지의 비밀유지 서약서와 앞으로의 영화촬영에 대한 계약서를 받아들였다. 소속사도 없는 마당에 이런 쪽으로는 처음 이었기에 결국 선생님에게 손을 벌려야만 했다. 그리고 저가 무소속의 무명임에도 기준이 되는 표준계약서보다 더 인도적으로 적힌 계약서라고 확인받았다.
그 뒤로는 기약 없는 영화의 크랭크인 까지 가 대본으로 인물 파악을 하고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데 시간을 쏟았다. 제작사 측에 사정사정해서 작가님과의 핫라인을 알아내 보다 권고하게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오빠가 찍는다던 영화감독 이 사람 아니야?”
거실에 앉아 연기공부의 목적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던 저의 옆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던 동생의 말에 돌아보자 눈앞으로 들이미는 핸드폰을 잡아 들었다. 저가 연기로 인생 2회차를 시작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배우 성현제의 얼굴이 메인에 걸린 기사였다.
[배우 성현제 김 감독과 랑데부]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은 저가 비밀유지 서약서까지 쓴 영화의 주인공으로 성현제가 발탁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주연배우인 성현제가 발탁되고 난 뒤로는 지지부진하던 모든 캐스팅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고 기약 없던 크랭크인도 일주일 뒤로 다가왔다. 그전에 잡힌 대본리딩 일정에 저보다 더 들뜬 부모님이 차 키까지 쥐여주며 잘 다녀오라고 함박웃음을 지어왔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저의 연기 선생님도 종종 영화나 드라마에 얼굴을 내비치는 사람이었지만 워낙에 깐깐할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수더분한 성격이라 형, 동생으로 지낸 지 오래되어 연예인이라는 느낌이 없었던 터라 대본리딩 현장에 도착해 현장을 찍기 위한 프리뷰 카메라와 기자들에 캐스팅된 배우들을 보자니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그 별 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사람은 그 사람이었다. 멀리에서 봐도 잘생김이 과한 사람이었다. 출연한 작품들의 블루레이를 모두 사들여 감상하면서 어여쁜 얼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카메라는 그의 실물에 반의반도 담지 못했다.
먼발치서 그를 흘끔 이다 자리에 앉으려 출연자들의 이름이 붙어있는 의자들에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이름을 한참을 찾았건만 보이지 않음에 지나가던 스텝을 한 명 붙들었다.
“죄송하지만 제 자리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친구들이 물찬 제비와도 같다던 상냥함을 두른 미소를 짓고 말하자 잠시 얼굴을 붉히고는 곧바로 이름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왔다. 그에 이름을 말하자. 손에 쥐고 있던 파일을 뒤적이더니 믿기지 않는 소리를 해왔다.
“아, 송태원 씨는 저기 성현제 씨 옆으로 가서 앉으시면 돼요.”
잠시 멍한 정신에 감사하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바쁜 듯 빠르게 자리를 피하는 스텝을 뒤로 다시 비어있는 성현제 배우의 옆자리를 건너다보았다. 저게 내 자리였단 말이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보이는 사람마다 커다란 키에 한 번 돌아는 볼뿐 처음 보는 얼굴이라 그저 스텝인 줄 알았는지 받는 둥 마는 둥 하는 데면 한 인사들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긴장되었다. 그 송태원이 긴장했단다. 결승전에서 금메달 못 따면 너 바로 군대로 끌려가야 한다고. 알아들었느냐고. 윽박지르는 코치의 폭력적인 언행에도 평소와 같이 경기 운영을 했고. 한판승을 이루어 낸 저다. 침착함에는 일가견이 있는 저가 긴장이라니. 이게 다 저 사람 같지 않은 얼굴을 한 성현제 때문이라고 합리화를 해도 빠르게 뛰는 심장은 도무지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겨 마주 보는 테이블 중 감독님과 작가님 다음으로 상석에 앉아있는 성현제 배우의 옆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송태원 이라고 합니다.”
“아, 송태원씨 잘 지냈어요?”
인물 구성을 위해 귀찮다고 느낄 정도로 자주 메신저와 전화를 했음에도 성가셔하지 않고 잘 받아주던 작가님이 제일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해 주셨다. 일부러라도 성 배우 쪽으로 눈길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더 작가님과 눈을 마주하고 안부를 주고받았다. 작가님과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눈인사만 하고 지나쳤던 감독님이 그를 붙잡고 저를 소개해왔다.
“오늘부터 성현제 씨 오른팔이 될 송태원 씨라고 해요. 앞으로 내도록 붙어있을 건데 서로 인사해요.”
“안녕하세요. 성현제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본 작품이 누가 봐도 도회적으로 생긴 그가 모종의 이유로 시골로 귀농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였다. 실제로도 어릴 적에 건강상의 이유로 한적한 시골에서 살았다는 인터뷰를 봤었다. 괜스레 드는 친밀함을 억누르고 겨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제 말에 저야말로 잘 부탁한다며 곱게 웃는 얼굴에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방정맞게 뛰던 심장이 이번엔 발밑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상투적이나 꽃과 같이 웃는 얼굴에 우습게도 첫눈에 반해 버렸음을 직감했다. 고달픈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
처음에 전혀 모르는 새로운 얼굴이 비중 있는 조연에 덜컥 앉아있음에 소속사 빨 이라도 받는가 했다고 했다. 이번이 처음으로 찍는 작품에 소속사도 없는 반푼이었다는 알고 나자 헛웃음들을 지었다. 아무런 방패막이도 없는 생초짜. 큰 키와 덩치. 웃지 않으면 조금 험상궂은 인상에 처음에는 인사하려 다가가도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지금은 모두가 허허실실 웃으며 인사를 하는 저에 마음을 열고 다가와 주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있었다. 거기다.
“송 선수!!”
성현제 의 담당 매니저인 남 실장님 덕분에 촬영현장 내 저의 애칭이 정해졌다. 대본리딩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저를 붙들고 ‘나 송태원 씨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단 말이지.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라는 말에 그저 웃으며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바로 영화 첫 촬영 날 현장에서 저를 보자마자 손가락질을 해왔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행동에 옆에 있던 성현제가 놀라 남 실장님의 손가락을 바로 잡아 내렸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려진 손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2014년도 아시안게임 유도 금메달리스트 송태원 선수 맞지?!’라고 현장의 모든 스태프 배우들이 돌아볼 정도로 좋은 목청으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내가 한국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이라 티켓 구매까지 해서 현장에서 직접 봤다니까?!’ 흥분해서 말하는 남 실장님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봐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흘러가는 내용의 고지는 어째서 배우 일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었다. 지금은 많이 추슬러진 마음에 아무렇지 않은 척이 아니라 정말 아무렇지 않게 담담한 마음으로 사정을 설명할 수 있었고. 그에 저의 마음과는 달리 걷잡을 수 없이 숙연해진 분위기에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괜찮다고 열심히 달래고 나서야 ‘뭐, 배우로 승승장구하면 되는 거지!’라고 쾌활하게 말하는 남 실장님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현장에서의 저의 별명은 송 선수로 고착이 되었다. 뭐 아주 어릴 적부터 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끊임없이 들어왔던 호칭이기에 익숙하게 받아들였고. 처음에는 저의 사정을 듣고 조금 주저하던 이들도 거리낌 없이 말해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저를 송 선수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을 제외하고 전혀 없었다.
“태원아. 잠시만 와줄래?”
그만이 저를 송 선수가 아니라 송태원. 태원아. 라고 불렀다. 좋아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것보다 싫어할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려운 사람이었다.
***
“송 선수 소속사가 없다고 했던가?”
“네. 아직, 이게 첫 작품이기도 하구요.”
“아직 이야기 들어온 곳은 없는 거지?”
감독님의 말마따나 성현제와 저는 붙어 다닐 일이 많았다. 촬영일이 무조건 겹쳤기에 덩달아 남 실장님이 저를 챙겨주어서 영화촬영을 하며 개인 스텝이 없어 곤란한 일을 겪는 건 없는 편이었다. 거기다 겉보기에 예민해 보이던 성격의 성현제는 대화를 몇 번 나누어 보면 그저 사람을 대함에서 조심성이 많고 숫기가 없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정함과 배려심을 두껍게 둘러 낯가리는 걸 알아차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저도 그에게 반해 있어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칠 만한 행동이었다. 무례하지 않게 상대방의 눈을 살짝 비껴가는 시선이라거나. 할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입술을 물었다 놓는 행동 등. 곤란해 하는 모습이 퍽 보기 좋았으나 저의 앞에서만 곤란해 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태원이 너만 괜찮으면 우리 소속사로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괜찮을까?”
그리고 오롯이 저가 꾸준히 들이댄 끝에 얻어낸 반말에 기분 좋게 웃고 있다가 마냥 흘려넘길 수 없는 말이 지나갔다.
“...네?”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태원아. 잘 생각해봐.”
“아니, 그게 아니라….”
저와 같은 소속사에 들어가자는 말이 사랑 고백과도 같이 들렸다. 영화촬영도 막바지에 들어서는 이때 같은 영화를 촬영하고 있다는 접점이 없다면 까마득한 대선배인 성현제와는 더는 마주할 일이 없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리던 차였다. 그렇게 당황하는 저의 얼굴에 부스스 웃은 그는 남 실장님을 통해 명함을 건네주었다. 다르게 생각해둔 곳이 없다면 자신의 소속사로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드물게 직설적인 표현을 해왔다.
“현제가 송 선수 많이 좋아해~”
“형.”
만류하는 성현제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연기지도를 핑계로 열심히 다가갔던 일이 주요했던 건지 한결 저를 편해 하는 모습에 좋으면서도 슬펐다. 순순하지 못한 의도로 다가갔지만, 그의 열렬한 연기지도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 저가 무슨 의도로 다가간 것인지 알게 되었을 때 차마 싫은 소리도 잘 못 하는 그가 애써 웃는 얼굴이 절로 그려졌다.
짧은 시간 내에 롤러코스터라도 타는 듯 오르내리는 감정을 추스르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는 말로 피했다. 조금 굳은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의 그에게 차마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다. 이 감정을 내내 속이고 갈 수 있을까.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불가능하다는 결론만이 나올 뿐이었다. 부딪치고 깨져야 할 타이밍이 왔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고 돌아왔을 때는 곤란한 얼굴의 남 실장만이 남아 있었다.
“태원 씨 우리 소속사로 오는 게 별로라면 거절해도 상관없어. 강제적인 건 아니니까.”
라는 황당한 말을 들어 버렸다. 문맥 파악을 하지 못하고 어리바리한 저에 남 실장님이 어색하게 웃더니 소속사 권유를 듣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진 저에 그가 저에게 한 말이 너무 강요하는 것으로 비친 건 아닌가 안절부절못했다는 것이다.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는 제 말에도 어깨를 다독이는 남 실장님의 미소는 미묘했다.
“나랑 현제는 송태원 씨 연기와 연기에 대한 진지한 마음. 정말 좋아하고 응원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실장님도 자리를 옮겼다. 뭔가 일이 꼬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고. 그건 그가 저를 피해 다니는 것으로 현실로 다가왔다. 정말로 저가 자신의 권유를 싫어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연기 이외의 것을 물어보면 겉으로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시선을 마주하지 않음에 한숨이 나왔다. 송태원 멍청한 새끼. 저 자신을 향해 욕지기가 치밀었다.
처음에는 모두 평소와 같은 줄 알았다고 했다. 저를 교묘하게 도망 다니는 성현제의 모습이 지속 되자. 통성명만 한 스텝이 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성 배우님이랑 싸우기라도 한 거냐고 물어올 정도로 상황은 차례로 악화하였다. 일방적으로 쫓고 쫓기는 모습이 남들이 보기에는 싸운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게 전혀 아니라고 도리질을 하고서는 결국 남 실장님의 도움을 얻기로 하였다.
당시 표정이 굳었던 것에 대한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좋은 일만 계속되니 도리어 무서워 져서 그랬다는 말에 그제야 그런 거였느냐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현제는 저가 잘 붙잡아 놓을 테니 촬영 후에 보자는 말을 끝으로 멀어졌다.
그래, 저의 감정이 무슨 소용인가. 이런 식으로 오해로 멀어지는 게 더 마음 아플 뿐이라고 생각했다. 마음 정리를 끝내고 난 뒤 촬영 후의 약속을 생각하며 쉬는 시간마다 뒤를 쫓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러고 나니 되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맴돌며 저를 흘끔 이는 시선이 느껴지자 당장에라도 붙들고 고백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았다. 저가 조금 힘들면 뭐 어떤가. 계속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기만 하다면 감정을 억누르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들이 어지럽게 산개했다. 뭐가 잘못되었던 걸까.
감정선이 어그러지는 것이 신경이 쓰여 스턴트를 쓰지 않고 직접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장면을 찍기로 했다. 모든 안전장치를 점검하고 두 번의 리허설 끝에도 문제는 없었다. 세 번째 본방 직전에도 점검 끝에 이상이 없다는 싸인을 받고 뛰었건만. 어째서 저의 밑에 성현제가 깔린 것인가.
팽팽하게 당겨진 와이어에서 투득. 하고 불길한 소리가 들렸을 때 크레인으로 들어 올리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위쪽과 아래쪽에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아파트 2층 높이에서 떨어짐에 절벽 아래 장미 덩굴의 미약한 쿠션을 믿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둔탁한 부딪침이 아닌 절 잡아채고 넘어지는 품이 느껴졌다. 성현제가 쿠션이 돼주어 가벼운 타박상을 입은 저와는 달리 절 받고 넘어진 성현제는 대기하고 있던 응급구조팀에 의해 들것에 실려 이동하는 내내 눈을 뜨지 않았다.
많이 놀랐을 테니 쉬라는 말에도 그저 그의 병상 옆을 지켰다. 떨어짐을 직감하고 눈을 감았을 때 크게 외치던 저의 이름이 맴돌았다. ‘태원아!’ 요 며칠 그토록 부름을 받길 원하던 이름이었으나 그 결과가 이런 형태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도대체 그냥 떨어지게 두지 거길 뛰어들길 왜 뛰어들었어요.”
그리 높지 않은 높이였기에 그대로 떨어졌어도 타박상 정도로 끝났을 터였다. 손을 뻗어 이불 밖으로 나온 손을 부여잡고 탓하는 듯한 말부터 나와버렸다. 저가 뭐라고 몸을 던져 구한단 말인가. 떨어지는 저희 둘의 등에 뭉개지고 터져나간 붉은 장미꽃들이 피처럼 번져 나가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려던 비명을 집어삼켰다. 구급대원들의 손길에 이동하면서도 장미 덩굴 사이에 파묻혀 있던 성현제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시는 절 위해서 그렇게 뛰어들지 마세요.”
“...싫어.”
흐느끼듯 읊조린 말에 기대하지 않던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어 올리자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깜빡이는 성현제가 보였다. 너스콜을 누르려 하자 저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잠시 꽉 잡아 내린 그는 입이 마르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물이라도 따라 손수 먹여주고 싶은데 차마 잡힌 손을 뿌리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만 보았다. 그제야 저를 마주 보는 올곧은 눈동자가 보였다.
“같은 일이 반복돼도 난 또 뛰어들 거야.”
“...어째서요.”
바보 같은 물음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비겁한 마음에 눈물이 고인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눈물을 흘려보냈다. 그에 반대쪽 손은 뻗어 젖은 뺨을 어루만져준 그가 저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 맞춰 왔다. 그에 결국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 나온 눈물을 뒤로 볼썽사납게 고백해 버렸다. 처음 보았던 그 순간. 첫 만남. 저의 감정을 자각하고 느꼈던 암울함. 찌질하다 못해 처절한 저의 울음 섞인 고백에도 그저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등 언저리를 다독이며 저가 진정하기만을 기다렸다.
울음을 그치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미뤄뒀던 너스콜을 눌러 그가 깨어났음을 알렸고 그사이에 1인실 병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와 세수부터 했다. 건강 체질이라 약간의 타박상 말고는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에 근육통약과 진정제만 처방받은 상태였기에 거동에 문제는 없었다. 몰아쳐 오는 창피함에 나무문에 몇 번이나 이마를 찧었는지 모른다.
그만하고 나오라는 목소리에 나가자 일어나 앉아있는 그가 있었다. 뒷수습하느라 바쁜 남 실장님을 대신해 저가 대신 병실을 지키겠노라 말한 뒤였기에 한적한 병실은 고요하기만 했다.
“..몸은 좀 괜찮아요?”
“덕분에.”
어둑해지는 바깥과 달리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핀 계절이었다.

* 장미꽃 소년 *
[태원현제] 장미꽃 소년
*미래 날조 및 설정 날조 다수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길 가다 핀 장미를 지나치지 못하고 기어코 가지 하나를 꺾어 쥐었다. 송태원은 피처럼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시체조차 없는 무덤 위에 놓았다. 시퍼렇고 무성하게 자란 잔디들 사이에 장미꽃 홀로 붉었다. 바람이 불면 쏴아아, 물결처럼 잔디가 흔들렸다. 송태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선을 들어올리면 하늘이 눈부시도록 맑다. 당신이 떠나간 날도 그랬다. 송태원은 눈이 시큰했다.
*
성현제는 홀로 들어간 던전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시퍼랬다.
한유진의 말로는 시스템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머지않아 닥쳐올 세계의 멸망을 막겠다며 괴물은 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발걸음이 이 세계의 모든 이에게 축복일지는 몰라도 송태원은 차마 동의하지 못했다. 각성자 관리실의 실장으로서, 한국 땅의 공무원으로서의 직무를 다하지 못한다고 해도 좋았다. 스스로 상자에 몸을 구겨넣을 만큼 미쳐돌아버린 S급답지 못하다고 해도 좋았다. 누가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간다는 것을 동의하겠는가?
송태원이 미리 알았다면 성현제를 못 가게 말렸을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애원을 견딜 자신이 없던 성현제는 송태원에게 끝끝내 작별인사를 하지 않고 떠났다. 던전에 간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성현제의 실종 아닌 실종 소식을 한유진에게 전해들은 게 그토록 비참할 수가 없었다. 한유진은 송태원에게 그 말을 하며 어쩔 줄을 모르며 난처해했다. 그것은 한유진이 송태원과 성현제의 관계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송태원은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지 않았다. 미동 없는 얼굴과는 달리 속이 쓰렸다. 한유진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무슨 말을 해도 위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송태원이 기억하는 성현제의 마지막은 아침 햇살이 희끄무레하게 비칠 때 마주한 상냥함이 깃든 미소였다. 전날 진이 빠질 때까지 뒹굴어놓고도 말끔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지어 보이던 그 미소가 눈 앞에 선했다. 붉게 짓무른 눈가마저 사랑스러웠다. 그 모든 게 눈이 부신 사람이었다.
성현제는 단 한 번도 괴물이었던 적이 없었다. 송태원은 성현제가 떠나고서 그걸 알았다. 아니, 괴물은 송태원이었다. 괴물이라는 팻말이 붙여진 상자 안에 갇혀 마지막까지 괴물이었던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송 실장님.”
한유진이 송태원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그를 불렀다. 송태원은 퍼뜩 생각 속에서 깨어났다.
“네, 한유진 씨.”
“제가 이런 말을 드려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돌아오실 거예요.”
“……성현제 씨가 그렇게 말하셨습니까?”
송태원은 기대하는 내색도 없이 침착하게 되물었다. 이미 가능성에 대해 체념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한유진은 입술을 짓씹다가 느리게 대답했다.
“죄송해요. 제 바람이에요. 그래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해요. 송 실장님도 아시겠지만 성현제 씨가 많이, 좀 많이, 특별하잖아요.”
“아뇨, 그렇게 위로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안다. 송태원은 담담히 말하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이들의 관계는 보기보다도 더 깊게 결속되어 있어서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비밀을 아는 건 자신뿐이었다는 게……. 한유진은 조금 울 것 같은 낯을 하고 한숨을 뱉었다. 낮게 가라앉은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송태원은 한 번 더 반복해 말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느리게 깔리는 목소리는 침중했다. 아까도 그렇게 말하셨잖아요. 아마 괜찮다는 말은 반쯤 몸에 배인 습관일 터였다. 한유진은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삼켰다.
송태원은 정말로 괜찮은 것 마냥 한유진에게 목례하고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거대한 뒷모습이 이토록 초라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한유진은 두 손을 감싸쥐고 눈을 감았다. 쓸데없는 오지랖일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신이 있다면 단 한 번이라도 저 사람에게 행복을 허락해주세요. 송태원은 정말 안타까운 사람이니, 이렇게 바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속으로 같은 말을 두어 번 더 되뇌인 한유진도 제 할 일을 위해 자리를 떴다.
비보만이 남은 자리는 따스한 날씨와 달리 유달리도 서늘했다.
*
상황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성현제가 던전에 홀로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던전에서 죽었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성현제의 예상치 못한 죽음이 한국의 정세와 길드의 협력 관계에 있어서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에 대한 추측이 기사로 매일같이 쏟아져나왔다. ‘성현제가 없는 세성은 이빨 없는 호랑이다’, ‘해연에게 흡수당할 것이다’, 따위의 부정론과 ‘성현제가 쌓아둔 기반이 남다르다’, ‘어쨌거나 한국 1위의 길드다’, 따위의 긍정론이 부딪혔다. 100분 시사 토론 주제로 떠오르기까지 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둘 다 아니었다.
성현제는 이 혼란을 예상하고 미리 유언장을 남겨두었다. 사적인 내용 하나 없이 오로지 업무 관계에 대한 내용만으로 빼곡했다. 혼란이 가중될 무렵 성현제의 유언장이 공개되었고, 세성은 해연과 병합의 형태로 연결되었다. 동등한 계약 관계를 통해 합쳐진 것이다. 이미 한유현과는 말이 오갔다고 했다.
이름은 해연 그대로였으나 시스템의 변화나 인원이 크게 변화했다. 이름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 사실상 해연의 흡수가 아니냐는 말이 한참 많았었다. 그러나 한유현의 확고한 입장 표명으로 찌라시들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이제 세계적으로 S급이 제일 많은 길드 중 하나가 된 해연의 심기를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는 탓이기도 했다.
송태원은 그 외에도 성현제의 부재로 골머리를 앓았다. 단순한 온기의 부재만으로도 서러울진데 그의 공백은 길드와 정부 간의 힘의 줄다리기에서 절절히 실감할 수 있었다. 그가 있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라도 용케 이어졌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매번 의견다툼을 하며 이익싸움을 하기는 했어도 기실 성현제는 송태원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다. 송태원의 입장을 고려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송태원은 나라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다. 항상 정부의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괴로웠다. 그의 마음을 위로해줄 사람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서러웠다.
한 번 뿌리까지 흔들린 고목은 쉬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법이다. 송태원은 작은 바람에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세상 풍파가 힘겨웠다.
“송태원 실장님, 성현제 씨가 남기신 유언장입니다.”
성현제의 부재가 어느정도 정리되어 일거리가 줄어들 무렵에, 세성을 담당하던 변호사는 송태원을 찾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현제와 친분이 있던 모든 이에게 각자의 유언장이 전해졌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했던 성현제의 재산 문제도 이 유언장에는 쓰여 있었다. 혼란하던 상황이 어느정도 정리되어 봐줄 만해지면 공표하라고 남겨둔 것이라고 했다.
송태원에게 전해진 유언장에는 가타부타 긴 말 대신 단순한 내용만 담겨 있었다. 사택을 송태원 앞으로 남기며, 관리가 어려울까 하여 사용인도 함께 남긴다고. 애인에게 남긴 유언장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단출했으나, ……정말 예상치도 못한 선물이었다.
송태원 앞으로는 성현제의 사택이 놓였다. 3만원 이상의 선물은 안 받는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았다. 송태원은 연인이 저에게 남긴 유산을 거부하지 못했다. 아니, 거부할 수 없었다. 송태원은 사실 그리 냉정한 사람은 못 되었다.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사실이 송태원이 성현제의 사택을 넘겨받는 것에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송태원과 성현제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외적으로는 그저 한 길드의 길드장과 각성자관리실의 실장의 공적인 관계에 불과했다. 둘의 다툼이 매스컴을 탄 적은 많았으나 그게 전부였다. 성현제와 송태원의 개인적인 친분이 깊다는 것이 유산을 통해 드러난 셈이었다. 어느정도 깊은 관계였길래 사택을 통째로 넘겼느냐는 의문이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둘이 연인 관계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한유진 단 한 명 뿐이었다.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도 송태원은 아무것도 답하지 않았다. 그와의 사랑을 그저 가슴 속에 묻고 싶었다. 돌아오지 못할 이를 추억하는 것은 혼자만으로 족했다. 더 이상 남들의 시선에 성현제를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너무 그리워 견딜 수 없이 힘겨울 때면 송태원은 하루를 통째로 반차를 내고 사택을 찾았다.
“당신은 정말 잔인합니다, 성현제 씨.”
사택은 사용인이 주기적으로 드나들어 언제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들이 함께 뒹굴던 침대 위에 앉아 송태원은 중얼거렸다. 손끝으로 이불을 하나하나 더듬었다. 끌어당겨 코에 파묻으면 이불에서는 보송한 햇빛 냄새가 났다. 성현제에게서 나던 은은한 향과도 비슷했다. 하얀 솜이불에 묻혀 영원한 잠이 들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럴 수 없는 것은,
“제가 당신이 남긴 것을 버리지 못할 걸 아시는 분이 이렇게 나오시는 건, 너무 잔인한 거 아닙니까.”
성현제의 빈 자리조차 송태원이, 눈물이 눈 앞을 흐리도록 아끼는 탓이었다. 그가 남긴 모든 것을 놓을 수 없는 탓이었다.
송태원은 사택에서 그와 함께했던 추억을 더듬었다. 어스름이 내리면 성현제와 함께 잠들던 침대에서 혼자 눈을 붙였다. 아무리 바라도 꿈에 나오는 일이 없던 성현제가 이 곳에서 잠이 들면 꼭 얼굴을 비췄다.
그와 언제나 그랬듯이 처음에는 한국과 세계의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현제는 이럴 때마저 자네는 참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미소지었다. 송태원은 문득 투정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당신이 없는 세상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성현제는 그의 모든 이야기를 경청했다.
“많이 힘들었구만. 자네도 참 여전해. 이제 좀 놓아줘도 될 것 같은데.”
“언제까지 상자에 갇혀 있을 거냐고 물으셨었죠.”
“왜. 이제 나올 마음이 좀 들었나?”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성현제는 송태원의 뺨을 어루만졌다. 입술이 베일 듯 날카로운 콧날위로 스치듯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눈가를 희고 가는 손가락이 덮었다. 송태원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안타깝지만, 언젠가는 태원이 너도 그 안이 답답해 견딜 수 없는 날이 오겠지. 그 날에 나오면 되는 거야.”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요?”
“내 맘 같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오라고 하고 싶은데, 지금 자네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하지.”
“…….”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뚝뚝 다정이 묻어나, 결국 그 끝에는 그리움을 속삭였다. 성현제 씨, 정말 보고 싶습니다. 그래, 내가 송태원 실장을 못 보는 게 이리 아쉬울 줄 알았다면 앨범이라도 가져가는 건데. 태연하게 대꾸하는 성현제의 서늘한 살갗을 손끝으로 더듬다보면 송태원은 불현듯 꿈임을 깨닫고 말았다. 성현제의 희끄무레한 미소에 입술을 가져다대며 눈을 감았다.
성현제의 팔이 송태원의 목을 감쌌다. 숨결이 얽히며 몸이 바짝 붙었다. 꿈이라는 게 놀라울 만큼 생생했다. 특유의 은은한 체취가 코끝에 맴돌고, 혀가 맞닿으면 허리가 찌르르 울렸다. 고개를 틀어 더 깊이, 안쪽 깊숙한 곳을 탐했다. 숨결마저 다 집어삼켜 성현제의 흔적을 제 안에 새기고 싶었다. 으응, 입술 사이로 작은 비음이 흘렀다. 송태원은 성현제를 밀어 침대에 눕혔다. 성현제는 사르륵 눈을 휘어 웃으며 그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두었다. 침대가 출렁이며 몸이 겹쳐졌다.
성현제는 항상 꿈이 깨기 직전의 마지막에 고백의 말을 건넸다. 마치 송태원이 언제나 그 말을 바라고 있던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하긴 자신의 꿈이니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태원아, 사랑해.”
“저도 사랑합니다, 성현제 씨.”
그럼에도, 듣기에 좋았다. ……깨어나면 서러울 만큼 행복한 꿈이었다.
눈을 뜨면 달콤한 환상에서 벗어나 쓰디쓴 현실을 마주했다. 하루치의 꿈을 끌어안고, 송태원은 또다시 일을 하러 나갔다. 꿈은 언제나 더 달았다. 송태원은 여전히 바빴으며 윗선에서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 성현제가 없는 틈을 타 죽어라 부려먹었다. 상자에서 나오지 못한 송태원은 그를 따르며 묵묵하게 일을 했다. 답답할 정도로 변함없는 남자였다.
“송 실장님, 이제 그만하셔도 괜찮잖아요.”
한유진은 송태원에게 불합리한 구조에서 빠져나오라는 말을 하고는 했다. 성현제가 재촉하지 않으니 이제는 한유진이 그 뒤를 이었다. 나쁘지는 않았다. 삐뚤게 듣기에는 한유진은 퍽 다정한 사람이었고, 송태원은 그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이 있었다. 그것을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자각도 했다. 확고한 답 대신 그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유진은 그의 미련에 혀를 찼다. 송태원은 그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답했다.
아직은 아니었다. 그래,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가둔 상자는 점점 더 송태원을 조여들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압박에 목을 조르듯 숨이 막혔다. 힘겨운 나날이 지속될수록 꿈은 손에 쥔 모래알처럼 금세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몇 번을 긁어모아 그러쥐어도 자꾸 샜다. 사택을 찾는 빈도가 늘고, 성현제의 꿈을 매일 꾸지 않았다. 더 이상 손에 담을 수 없어 휑하게 비어버린 바닥을 벅벅 긁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
점차 던전 브레이크며 던전의 출현 빈도가 잦아졌다. 곧 세상의 끝이 다가온다는 징조였다. 세계는 각성자들을 비롯한 모든 인간들을 극한의 상황에 몰아붙였다. 각성자가 아무리 날뛰어도 피해에 휩쓸리는 비각성자들의 수가 나날이 늘었다. 하늘은 본래의 푸름을 잃고 늘 잿빛으로 흐렸다. 도시 곳곳이 사람들의 비명과 연기로 자욱했다.
굽히느니 부러질 것 같던 송태원은 무너져가는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다.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포기했다. 작은 상자에 갇혀 제 목을 졸라 숨죽이던 송태원은 이제 없었다. 그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성현제가 스스로 이 세상을 떠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세상을 구하고자 함이었다.
세상에 평형과 안전을 주고자 험한 길을 택한 사람이었다. 송태원은 그를 사랑했고, 그가 사랑한 세상을 또한 사랑했다. 헌터 협회에 기대기에는 당장 세상이 앞둔 현실이 급박했다. 성현제가 아껴 마지 않던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송태원은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헌터협회와 길드 사이의 균형이 깨졌다. 다시 말해, 송태원 하나에 의지하던 헌터협회는 박살이 났다. 송태원은 어딘가에 매이는 대신 개인으로 나서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그의 태도 변화를 반기는 이들은 꽤 있었다.
“송 실장님, 아, 맞다. 이제 실장님이 아니시네. 너무 익숙해서 자꾸 깜빡한다니까요. 송태원 씨, 이번에 넘어온 정보에 의하면요.”
한유진은 넉살좋게 웃으며 받아넘겼다. 그 ‘패륜아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극히 드문 사람 중 하나이기에 송태원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고는 했다. 한유현이야 한유진이 좋다면 아무 상관 없는 사람 중 하나니 제외하고, 박예림은 호들갑을 떨었다. 심지어는 자기 길드 영업까지 했다.
“실장님은 거기 있는 게 아깝다고 했잖아요! 진작 나오셨으면 얼마나 좋아요. 저희 해연도 괜찮은데, 안 들어오실래요?”
“우리 길드에 들어오는 건 힘들겠고, 아이고. 어지간히 미련했어야지!”
문현아의 반응은 더했다. 진작 그랬어야 했다고 있는 힘껏 등짝을 후려쳤다. S급이 얼얼하게 느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송태원은 문현아의 손바닥이 등에 닿는 순간 손바닥 모양으로 멍이 생기는 게 아닐지 걱정해야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무사히 제 변화에 적응했지만 단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를 축하해줄 성현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급격하게 세상이 변할 무렵부터 성현제는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꿈이니 간절히 원하는 걸 보여줄 법도 한데 기어코 성현제는 옅은 머리카락 한 줌조차 안 보였다. 만일 꿈에 나타나는 것의 빈도에 한계가 있을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빨리 그 안을 박차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송태원은 이번에도 늦은 제 행동에 가슴이 저렸다.
성현제의 일에서만큼은 어째 항상 때를 놓쳤다. 그게 안타까웠다.
모두의 노력이 모여 멸망은 닥치지 않았다. 몇 년간의 소모적인 투쟁 끝에 멸망을 무사히 빗겨나간 세계는 좀 더 긴 기간의 평화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음울하던 무채색 하늘은 맑게 개였고, 던전은 사라졌다. 망가진 세상을 복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동분서주했다. 무너진 구조물들을 다시 올리느라 매일같이 시끄러운 공사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울음소리와 비명소리 대신 웃음소리가 퍼졌다. 각성자들은 사태 수습에 비각성자들보다 조금 더 많은 도움을 보탰다.
어느 순간부터 차차 낮은 각성자의 능력부터 사라졌다. 결국에는 S급에서 B급까지만 능력을 가진 채로 남았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 역시 이전처럼 아주 절대적이거나 강력하지 않았다. 일상 생활에 약간의 편리함을 더하는 게 전부였다. 전투에 특화되었던 능력들 중 일부는 아예 소실되기도 했다. 던전의 부재로 능력의 필요성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추측되었다. 능력이 사라져도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만큼 세상은 안정을 찾아갔다.
시간은 아무 일도 없던 것 마냥 흘러 평화를 그렸다.
송태원은 앞자리가 4로 넘어갔다. 아저씨라는 소리가 어색하기도 힘든 나이였다. 약화된 능력에는 쉬이 적응했다. 여전히 그는 S급이었으나 괴물은 아니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은 의외로 송태원의 적성에 맞았다. 야근에 시달리지 않으니 삶의 질은 급격하게 올라갔다. 개인 여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나름대로 소소한 행복이 존재하는 삶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평화 속에 여전히 성현제만이 없다는 사실에는 끝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송태원은 그게 미칠 것 같았다. 괜찮을 줄 알았으나 죽어도 괜찮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살면서 성현제의 흔적을 끊임없이 그렸다. 성현제의 사택을 찾는 날이 늘었다.
매 해, 그가 떠나간 날에는 그의 무덤 앞에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돌아오곤 했다. 벌써 그가 떠난지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길 가다 핀 장미를 지나치지 못하고 기어코 가지 하나를 꺾어 쥐었다. 송태원은 피처럼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시체조차 없는 무덤 위에 놓았다. 시퍼렇고 무성하게 자란 잔디들 사이에 장미꽃 홀로 붉었다. 바람이 불면 쏴아아, 물결처럼 잔디가 흔들렸다. 송태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만치로 시선을 들어올리면 하늘이 눈부시도록 맑다. 당신이 떠나간 날도 그랬다. 송태원은 눈이 시큰했다.
“오랜만일세.”
환청이 들린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듣고 싶은 말을 환청으로 듣는구나 싶었다. 송태원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압박했다. 눈이 질끈 감겼다. 이러다 진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미쳤지.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가 없었다. 십 년 가까이 성현제의 흔적 하나하나를 손 끝으로 훑고 그러쥐며 살았다. 제 한심한 미련에 이골이 났다. 송태원은 천천히 눈을 뜨고 숨을 들이켰다. 폐부를 가득 채우는 것은 또다른 미련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말하는데 뒤 정도는 돌아봐주는 게 예의 아닌가?”
송태원은 나이 지긋한 사람이 쓸 법한 말투를 쓰는 환청 속의 목소리의 주인이 어리다는 것을 깨달았다.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듯한 어린 소년의 가느다란 미성이었다. 송태원은 전격에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쳐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성현제의 억양을 쓰는 어린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기대하게 되었다. 만일 누군가의 기만이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먼저 들었다. 송태원은 한참을 망설이다 몸을 돌렸다.
장미꽃 옆에 앉은 어린 꼬마가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말 한 번 걸기 힘들구만. 햇빛 찬란한 밀빛의 머리카락이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태양보다 반짝이는 노란 눈동자 위로 길게 속눈썹이 드리운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느리게 팔랑이는 것이 마치 나비 같았다. 눈꼬리가 더 쳐지며 고아하게 휘었다. 어린애답게 통통하게 자리잡은 젖살 위로 은은한 홍조가 돌았다.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며 분홍빛 입술이 오물댔다. 봄볕보다 따스한 사랑스러움이 뚝뚝 묻어났다.
“다시 한 번 인사하지. 오랜만일세, 송 실장.”
아, 이제 실장은 아니겠군. 그렇지?
나붓한 어투로 아이가 속삭였다. 송태원은 홀린 듯이 아이에게 다가갔다. 덜덜 떨리는 손이 말랑한 뺨에 닿았다. 아이는 제 얼굴을 한 번에 감쌀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손에 뺨을 기댔다. 서로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송태원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시선을 떼면 사라질까 두려워 마주한 눈동자를 바라본 채로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아, 이것마저 깨어나면 서러운 꿈일까.
“태원아. 눈은 깜빡여야지. 그러다 울겠다.”
아이는 비슷한 눈높이의 송태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이 특유의 뜨끈한 체온이 말랑하게 목덜미에 닿았다. 어깨에 툭 자그마한 머리통이 얹힌다. 그 순간에 현실감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차가운 물이라도 뒤집어쓴 마냥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성현제가 돌아오기를 바랐어도, 진짜 돌아올 거라 확신해본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송태원은 메인 목으로 겨우겨우 말을 뱉었다.
“성, 현제……, 씨.”
“응, 태원아. 돌아왔어.”
긴 기다림 끝의 재회였다. 많이 기다렸나. 미안하구만.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어조로 성현제는 송태원을 달랬다. 까칠한 뺨에 쪽 소리나게 입맞추며 꺄르륵 웃었다. 송태원은 낮은 침음성을 뱉었다. 어린 아이 모습으로 그러지 마십시오……. 정신은 40대가 훌쩍 넘었는데 무슨 상관인가. 성현제는 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입 맞추었다. 맞는 말이었으나 말캉한 감촉이 닿을 때마다 영 께름칙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송태원은 성현제를 안아 들며 몸을 일으켰다. 너른 품 안에 쏙 안겨들고도 자리가 남았다. 아이의 자그마한 몸뚱아리가 앙증맞았다. 편한 자세를 찾아 바르작거리던 성현제는 어깨 너머로 장미를 가리켰다. 송태원이 무덤 앞에 놓은 그 붉은 장미였다.
“근데 이건 날 위해서 준비한 건가? 그래도 무덤 오는 길인데 장미는 좀 특이하구만.”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 꽃이니까요.”
“송태원, 자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던가.”
“제가 처음으로 사드린 꽃도 장미였잖습니까. 성현제 씨와 잘 어울려서 골랐었습니다.”
“아, 그 엎드려 절받기로 받은 꽃 말이라면 지금도 내 사택에 잘 보존되어 있을 텐데.”
아니, 그건 엎드려 절받기가 아니었습니다만……. 장미는 그의 선물로 염두에 두고 있던 꽃 중 하나였다. 그리고 송태원은 성현제에게 무슨 선물을 주어야 할지 고민 중이었던 차였다. 그러나 선물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성현제였다. 어떤 말을 해도 변명이 될 터였다.
송태원은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도로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애하기 전의 이야기는 불리한 부분이었다. 그 때의 송태원은 다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미련했다. ……무엇보다 성현제가 즐거워보이니 되었다. 송태원은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주한 시선 속에서 아이는 한여름날에 어울리는 청량한 웃음을 터뜨렸다.
“태원아, 몸 좀 숙여 봐.”
송태원은 성현제의 지시에 따라 몸을 숙였다. 성현제는 장미를 제 작은 두 손으로 감싸들었다. 길가에서 꺾은 장미의 줄기에는 가시가 박혀있었으나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만족스레 웃었다. 몸은 아이여도 신체의 강도가 여전히 S급인지 움켜쥔 손에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제 얼굴 옆으로 가져가 귀에 꽂았다. 옅은 밀빛 머리카락 사이에 붉은 장미꽃만이 선연했다. 성현제는 입술로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어때, 잘 어울리나?”
“잘 어울리십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답이었다. 진심 그 자체였다. 우리 태원이가 못 본 새 더 솔직해졌어. 성현제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반달로 휘었다. 녹아내릴 듯 달콤한 눈동자가 송태원을 향한다. 그 사랑스러움을, 송태원은 참지 못하고 이마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떼었다. 그 숨결이 간지러워 성현제는 눈매를 약간 찡그렸다. 피식, 송태원의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 아기를 어르듯 느리게 흔들며 속삭였다.
“집으로 모실까요?”
“내 집은 잘 관리되고 있겠지?”
“사용인이 계속 드나들고 있습니다.”
“자네도 자주 드나들고?”
“……그랬죠.”
지금은 거의 성현제의 사택에서 살다시피 했다. 성현제가 꿈에 나오지 않아도 송태원은 그 곳을 찾았다. 그만의 안식처였다.
송태원은 성현제를 안은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빨간 마티즈 앞에 서자 성현제는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여전히 이건가? 이게 익숙합니다. 뻔한 대거리를 주고받고 조수석에 아이를 앉혔다. 아까 하는 모습을 보건대 S급의 신체라 짐작하면서도 어째 조금 불안해 안전벨트까지 꼭 붙들어 매주었다. 성현제는 송태원의 불안한 태도가 재밌는지 연신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다. 송태원은 알면서도 몇 번이나 안전벨트를 확인했다. 그리고 나서야 좁은 운전석 안에 몸을 들이밀었다.
송태원은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운전실력이 얼마나 능숙한지 경차치고 승차감이 퍽 나쁘지 않다. 성현제는 귀에 꽂은 장미를 빼지 않은 채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송태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라디오를 만지작거리자 치직거리는 소음이 끼어들었다. 성현제는 버튼을 이리저리 돌리며 겨우 주파수를 잡았다. 옛날 팝송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차 안에 깔리는 노래가 분위기 있었다. 성현제는 문득 예상치 못한 주제를 꺼내들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혹시 내가 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나?”
끼익, 마티즈가 갑작스러운 브레이크에 삐걱대듯 멈췄다. 성현제는 윽, 소리를 내며 안전벨트에 몸을 거칠게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송태원은 작은 사과를 중얼대며 조심스레 엑셀을 밟았다. 다시 매끄럽게 차가 전진했다. 그 꿈에서 이것저것 못하는 소리도 못하는 짓거리도 없었다. 아무리 환상이라고 해도 꿈을 회상하면 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송태원은 조금 붉어진 귓가를 하고 대꾸했다.
“어느 순간 뚝 끊기긴 했습니다만, 꿨었습니다. 꿈 속에서 당신이 너무 생생해서 잊을 수가 없었어요.”
“떨어져 있는 연인 꿈 꾼 게 뭐 부끄럽다고 귀까지 붉히고 그러나. 새삼스럽게.”
“…….”
“왜, 내 상대로 몽정이라도 했니?”
적나라한 단어 선택에 송태원의 귓가는 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건 아니…….”
라고 말하려 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라 끝이 잠잠하게 잦아들었다. 성현제는 숨겨진 말뜻을 안다는 듯이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송태원은 시선을 멀리 두었다. 성현제는 한참을 웃어제낀 후에 숨을 고르며 비밀을 속삭였다.
“그야 당연하지. 내가 기껏 무리하면서 찾아간건데 아니었다면 좀 서운했겠어.”
“……예?”
송태원은 반쯤 얼이 빠진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현제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태원이가 꿈에서 여러모로 어찌나 솔직하던지, 아주 몸이 남아나지 않더군.”
“성, 성현제 씨…….”
“어차피 나라고 생각하고 그런 거 아니었나?”
“그건 그래도, 진짜 성현제 씨일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어떻게 태원이를 두고 그렇게 매정하게 돌아서겠어. 가끔이라도 만날 수 있도록 접점으로 쓸 우리 집까지 일부러 넘겨줬잖니.”
그래서, 일부러 사택을. 세상이 무너져갈 때에는 너무 바빠 꿈에 찾아올 틈도 없었다고 했다.성현제의 말을 듣고보니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송태원은 성현제를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둔함에 괴로워했다. 성현제는 그의 반응을 즐기는 듯 웃음소리를 흘렸다. 송태원은 끙끙 앓았다. 제가 꿈에서 했던 말들과 행동들이 주르륵 파로나마처럼 스쳤다. 옆에 있는 연인이 어린 아이의 모습이라 다른 의미로 괴로워졌다.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 밀려들었다.
그 와중에도 마티즈는 목적지를 향해 착실히 달려갔다.
송태원의 복잡하게 엉킨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성현제의 사택 앞에 도착했다. 송태원은 찡그린 얼굴을 하고서도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성현제를 다시 제 품에 보듬어안고, 사택 안으로 발을 디뎠다. 성현제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사택이 원주인을 반겼다. 성현제는 제일 먼저 제 귀에 꽂혀있던 장미꽃을 투명한 유리병에 물을 담아 꽂았다. 얼룩 하나 없이 흰 식탁 위에 장미가 붉게 튀었다. 송태원은 그 옆에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성현제는 그의 무릎에 올라타 앉았다. 바짝 붙은 몸의 온기가 안정을 주었다. 송태원의 고민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이 성현제는 귓가에서 말했다.
“나는 금방 자랄걸세. 그러니 이제 쭉 같이 있자.”
“네. 기다렸습니다.”
어린 연인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무렴 어떤가. 송태원은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 그걸로 되었다.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았다. 불쑥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합니다, 성현제 씨.”
“응, 나도. 사랑해, 태원아.”
긴 기다림 끝에 딴 사랑의 열매는 너무나도 달콤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소년의 사랑스러움에 질식해버려도 좋았다. 죽어도, 좋았다.

* 헛소문 *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때문에 송태원은 제 아파트 근처 상가에서 십여 년을 지나쳐온 꽃집을 평소처럼 빠르게 지나치지 못해 5분 지각을 했다. 전날 그 어떤 야근이 있었어도 차라리 각관실에서 밤을 새울지언정 출근 시간에 늦은 적은 없었던 이였는데 말이다. 이 때문에 그 문제의 5분간 혹여 던전브레이크가 터진 것은 아닌가 각관실 직원들이 온갖 포털 사이트와 뉴스 속보 등을 뒤지는 작은 소동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이전까지의 근태가 워낙 성실했던 덕에 지각 자체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고 금세 일상으로 복귀했다. 오히려 ‘송실장님도 역시 사람이구나.’ ‘하긴 피로하실 만 하지.’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동료들의 눈이 더욱 상냥해졌다면 모를까.
그러나 소동의 당사자인 송태원은 여전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저 혼자 일상으로 완전하게 복귀하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에 인이 박힌 만큼 습관적으로 서류를 결재하고 업무를 지시하고는 있었지만 정신의 한구석은 아직도 아침의 그 순간에 사로잡혀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미.......”
“예? 실장님.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아닙니다. 혼잣말이었습니다.”
구내식당 점심을 코로 먹었는지 입으로 먹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지경에까지 오자 그제야 송태원은 스스로의 이상을 마냥 무시할 수 없겠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송태원으로서는 또다시 이례적으로,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식사 후 잠시 잡담 시간을 가지고 있는 동료들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들어가는 것을 시도했다. 송태원이 스스로 사람들을 찾아온 적은 몇 번 없던 일인지라 스스로 가지는 위화감이 상당했지만 이전에도 잡담 정도는 나눴던 동료들이 몇 있던 덕분에 생각보다 부담 없이 받아들여졌는데, 산더미만한 덩치의 그가 쥔 종이컵이 마치 소주잔 같이 손아귀에 폭 파묻혀 있어 절로 소주 마시고 싶어진다는 누군가의 농담이 나올 정도까지는 그러했다. 소소한 웃음이 지나간 후, 송태원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꽃을 사고 싶어졌습니다.”
“송실장님이요?”
“와, 왠일이시래! 송실장님이 그런 말씀하시는 거 처음 들어요!”
주로 여성 직원들의 감탄사가 많았지만 남성 직원들의 의외롭단 반응도 다수여서 송태원의 넓은 어깨가 미세하게 움츠러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말 그대로 매우 미세한 반응이었기에, 같은 S급이 아닌 동료들로서는 그의 반응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래서 어떤 꽃을 사고 싶으신데요?”
“왜 사고 싶으신 지도 말씀해주세요!”
“오늘 갑자기 사고 싶어지신 거예요?”
사방에서 밀려오는 질문에 어디서부터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하나씩 순서대로 답해주기로 했다. 업무적인 파란만장함이야 전국에서도 뒤지지 않을 만큼 대단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일상적인 화젯거리는 그다지 많지 않은 곳이라서인지, 이런 소소한 일에도 한껏 호기심을 드러내며 신나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장미를... 사고 싶어졌는데, 오늘 본 장미가... 어떤 사람과 잘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누군데요!”
“사랑하는 사람인가요?”
“실장님이 사랑에 빠지셨대!”
“우와, 대~박!”
“.......”
와글와글 떠드는 와중에 왜 그쪽으로 이야기가 빠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냥 장미꽃이 자꾸 생각날 뿐인데. 그리고 그 장미를 보고 있자면 누군가가 겹쳐 보일 뿐인데. 이런 분위기에서 그 겹쳐 보이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했다간 그야말로 대 오해가 벌어질 분위기였다.
“누군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요? 저희가 아는 분인가요?”
“그분이 아시면 안 되는 건가요?”
“실장님 짝사랑이신가?”
“헉, 우리 실장님이 짝사랑을 하시나보다!!”
“...........”
...말하지 않아도 대 오해가 생겨나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나. 송태원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실제 대화가 이루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5분 남짓이었을 텐데 한 10년은 늙은 기분이다. 아무래도 괜히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피곤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로서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닌데.
“저는 그냥, 장미를 사고 싶을 뿐인데요.”
“그 장미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시다면서요!”
“그럼 사랑이죠!”
“맞아맞아!”
대체 왜 그쪽으로 바로 이야기가 연결되는지 알 수 없다. 송태원은 머리를 감싸 쥐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가시방석 같았던 휴식 시간 이후로는 함께 휴식하고 있지 않던 다른 동료들에게까지 소문이 퍼져, 다들 한 번씩은 송태원 근처에 다가와 기웃거리며 그 소문이 진짜인지를 확인하려 애를 썼다. 그나마 말단이나 태원과 말을 많이 나누지 않는 부서의 사람들은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주위만 맴돌 뿐이었지만 두어 번이라도 송태원과 말붙여본 적 있는 사람들은 사양도 않고 다가와서는 “세기의 미녀에게 짝사랑을 하고 계시다던데 사실이에요??”하고 캐묻는 것이다. 그 바람에 송태원은 하루 종일 정신 사납게 업무를 보아야 했다.
하필이면 오늘은 서류 작업이 평소보다 적은 편이었고, 평소에는 그만 좀 일어나라 할 정도로 자주 일어나던 각성자 폭주 사건이나 던전브레이크까지 그날따라 어찌나 얌전하고 조용하던지, 밖으로 도망갈 틈도 주지 않았던 게 소소하게 가중된 불행이다.
.
.
.
“송실장님, 짝사랑 중이시라는 게 사실이에요?”
“...어디서 그런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하루 내내 지끈거리며 아팠던 머리에 다시 두통이 몰려오는 기분에 송태원이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마수 사육소에서 일할 헌터들의 법적 가이드라인에 대해 조언을 구하겠다며 각관실로 찾아온 한유진의 질문이었다. 해연 법무팀은 어디 갔다 팔아먹었는지 송태원은 굳이 묻지 않았다.
“각관실 사람들이 다 물어보던데요, 자기 실장님이 짝사랑을 하는 모양인데 혹시 짐작 가는 데가 있으시냐고.”
“.......”
아무래도 각관실 내의 작은 소동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기어코 참지 못하고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짝사랑 아닙니다. 그냥 꽃을 사고 싶다 말했을 뿐인데, 소문이 그렇게 퍼지더군요.”
“꽃이요? 송실장님 주위가 워낙 삭막하니 꽃을 사두면 분위기 환기도 되고 좋겠네요. 괜찮은 생각이신 것 같은데?”
“그냥 변덕 한 번 부려본 게 이렇게 널리 퍼질 줄은 몰랐습니다.”
“오해라니 고생 많으시겠네요. 역시 전 송실장님 성격에 짝사랑을 하시기보단 직접 고백을 하는 쪽이라고는 생각했어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부터 말했지만 송실장님껜 힐링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귀여운 기승수 한 마리 들이시지 않... 어, 송실장님? 저기요? 가지 마시고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는지 기회만 되면 기승수 이야기를 꺼내려는 한유진의 수작을 피하려는 시늉을 하자,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 따라오며 원래의 목적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한유진이 생각보다 쉬이 말을 받아들여주는 것이 다행이고 기뻐야 할 텐데, 왜 마음 한 구석이 따끔거리며 불편해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잖아도 골치 아픈 시기에 기승수 이야기까지 꺼내서 그런 건가? 송태원은 머리를 기울이며 답답함의 원인을 추리해보려 했으나, 결국에는 포기하고 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
.
“어?? 송실장님 도망가신다!”
“실장님 오늘 회식하자니까요!”
“그래서 그 상대가 대체 어떤 분이신데요!”
간만에 평온한 하루를 보낸 각관실 사람들이 퇴근길에 붙잡을까 싶어 송태원은 정말로 오랜만에 6시 정각이 되자마자 도망치듯 칼같이 퇴근했다. 던전 공략팀원 중 한명인 A급 헌터가 각 잡고 쫓아오려는 기색을 보이는 걸 스킬을 써서 피해버렸으니 그냥 도망쳤다고 해도 맞는 서술이겠지만. 그렇게 재빠르게 각관실 건물을 떠나는 바람에 전에 없이 일찍 집 근처에 도달한 송태원은 그러나 집에서 빠른 퇴근을 즐길 수도 없게 되었다.
“........”
장미, 팔려있을 줄 알았는데. 혹여나 싶어 소리 내지 않고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십여 년 간 봐왔지만 항상 무심히 지나치던 알록달록한 꽃들임에도 특히나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화려한 장미였다. 그러니 자신이 퇴근할 때쯤에는 그 누구라도 반하여 금방 팔려나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신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그 자리에 여전히 그 장미가 놓여있었다.
역시, 저 장미를 갖고 싶다.
살면서 그토록 많은 장미를 봐왔는데-송태원은 꽃 종류에 큰 관심이 없던 저에게 한때 온갖 품종의 장미 꽃다발을 하루가 다르게 보내오던 누군가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왜 굳이 저 장미 하나에만 이토록 눈을 떼기 어려울까. 화려했기에 그를 생각나게 만든 건지, 그를 생각했기에 장미가 더욱 화려해 보이는 것인지를 구분하기 힘들다.
아침보다 조금 더 오래 제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장미를 바라보던 송태원이 이윽고 마음을 굳힌 듯 조심스럽게, 꽃집에 들어간다. 활짝 웃을 때 얕게 드러나는 주름이 한없이 보드라운 아주머니와 몇 번 쑥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목적했던 장미꽃을 포장지에 싸서 들고 나온다. 구매한 꽃은 장미 한 송이 뿐인데 자주 들려달라는 뇌물 명목의 덤으로 몇 줄기의 안개꽃도 소박한 포장지 안에 함께 싸여 나왔다. 절대로 크지 않은 꽃다발이었으나 다른 장미와 함께 있을 때에도 독보적으로 아름답다 여긴 꽃이 작고 소박한 안개꽃과 함께 있게 되자 대비 때문인지 더욱 아름답게 빛나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나던 누군가를 더욱 선명히 떠올리게 했다.
낮에 동료들이 얘기하던 사랑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그저, 자주 일어나지 않던 변덕에 불과하다. 쉬이 보기 힘든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미꽃을 보았기에 가볍게 아름다운 것을 잠시 손에 쥐고 싶어진 것일 뿐이며, 장미를 보면 떠오르는 그 역시 어디를 가도 보기 힘들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니 그저 그렇게 비슷한 점을 찾아내어 어울릴 것 같다 생각했을 뿐이라고. 두 가지 생각의 사이에는 그 어떤 연관성도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 실장.”
그렇게 연관성을 지워내려 애를 쓰고 있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는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을 익숙한 구두소리와 함께 익숙하다 못해 반사적으로 찌릿하게 올라오는 감각에 송태원은 차마 바로 고개를 돌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이마를 또다시 짚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송실장이 세기의 로맨스를 찍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지.”
언제 또 그 헛소문이 세성 길드까지 갔단 말인가.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옛 조상님들의 지혜를 이런 곳에서 다시 되새기고 싶진 않았는데. 씹어뱉듯 읊조리던 송태원이 한숨을 쉬며 성현제를 향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시정지.
“그 꽃다발은 고백하려고 산건가? 오랫동안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기엔 너무 소박하지 않은가 싶은데.”
“.......”
성현제의 놀리는 듯한 말투에도 송태원은 화를 내지 못했다. 아니 화를 내지 못했다기 보다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기에 화를 낼 만지 아닌지에 대한 상황 판단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겠다.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서.
S급이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집값이 오르기는 했지만 그렇다 하여 건물을 무너뜨리고 새로 건물을 올릴 만큼 상권이 좋은 동네도 아니었기에, 이십여 년 전 지어진 후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는 낡은 건물들 앞의 성현제는 낮은 곳에 강림한 천사의 명화처럼 붕 떠 보여 현실 같지가 않았다.
“음?”
정말로 하필이면, 바로 이 순간에 나타나서는. 그렇게 생각하며 송태원이 제 손에 들려있는 장미를 성현제에게 건네주었다. 전혀 로맨틱하다고도, 세기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심한 손길에 성현제가 더 놀려먹을 생각도 하지 못한 체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일언반구 없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헌화에 상대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심지어 꽃다발을 든 성현제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안고 움직여 작은 장미 꽃다발이 성현제의 얼굴 근처에 가까이 가도록 조정하기까지 한다.
“...송태원 실장?”
무슨 졸업사진 찍는 사진사도 아니고 이게 뭐란 말인가. 성현제가 드물게 얼이 빠진 얼굴로 송태원을 불러보았으나, 성현제에게 자신이 원하는 포즈를 취하게 한 송태원은 그에 답해주지 않고 마저 미세하게 성현제의 자세를 조정한 후 뒤로 두 발자국을 물러나 자신이 세팅한 포즈를 감상하듯 훑어보았다. 정확히는 성현제의 얼굴과 그가 들고 있는 장미 꽃다발 위주로.
“지금 이게 뭐 하는...”
“역시.”
이어지는 정적에 정신을 차린 성현제가 짜증스러운 눈웃음으로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자신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 송태원을 부르려 했으나, 그나마도 송태원의 만족스러운 한마디에 막히고야 말았으니.
“잘 어울리실 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눈썰미에 더없이 만족하는 듯, 또는 계속해서 떠오를 듯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던 아이디어가 방금 막 떠올라 답답함이 날아가고 후련해진 듯, 송태원의 얼굴이 드물게 풀어지며 가벼운 눈웃음이 떠올랐다.
“........”
그래, 이걸 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저 장미를 보았던 오늘 아침부터 이 시간까지 쭉 계속해서. 그 누구도 아닌 성현제에게 가장 잘 어울릴 장미라고 생각된다면, 그 어울려 있는 어여쁠 모습을 실제로 보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 아니겠는가. 마침내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모습이 그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미모를 빛내는 것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 같은 게 아니라고, 송태원은 생각했다.
비록 하루 종일 자신을 따라다녔던 미묘한 답답함이 이 한순간에 날아갔다는 시원한 감각을 즐기느라, 제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게 된 성현제가 얼마나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신경 쓰게 되기까지는 앞으로 약 3분 정도 남아있었다.
-그날 낮, 송태원이 퇴근하기 전.
[아, 제 말이 맞잖아요. 송실장님 짝사랑까지 하기엔 이미 인생이 너무 고달프시다고요.]
가이드라인 핑계를 대고 각관실에 직접 쳐들어갔다 온 파트너의 의기양양한 문자에 성현제가 빙긋 눈가를 휘며 웃었다.
“우리 귀여운 파트너가 친히 짝사랑이라고 확정까지 지어 주었는데, 내가 안 가볼 수는 없겠지.”
자신의 파트너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뭐든 내어줄 터이지만, 세성 주식만큼은 절대로 필요하게 만들지 않을 성현제가 그렇게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