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Tropical Love *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미꽃이 핀 날이었다. 여기서 ‘그’란 송태원이다. 장미와 송태원을 연관 지어 생각하기 쉬울까? 놀랍게도 성현제는 그랬다. 그냥 장미는 아니고, 그 중에서도 파란 장미만이 그랬다.
‘파란 장미는 오직 인간의 손으로만 만들어진다지. 품종이 1만 5천종이나 되는데 말이야.’ 송태원은 그가 자넬 보면 장미가 떠올라, 라고 운을 띄울 때 부터 조막만한 입술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을 걸 짐작 했다. 성현제가 하는 말은, 그것이 침대 위라면 특히 귀담아 들을 것이 못됐다. 이어지는 말은 드물게도 진중한 투였다. 그렇다고 헛소리가 아닌 건 아니지만.
‘해서 최초의 파란 장미가 탄생하기 전까지 파란 장미의 꽃말은 불가능이었다네. 과학이 그것을 가능하도록 만든 뒤엔 희망이라고 부른다더군.’
하얀 침대 위에서 성현제가 천사 같은 얼굴로 그리 말할 때, 송태원은 그것이 헛소리라고 생각 하면서도 얌전히 귀 담아 들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파란 장미의 꽃말이 불가능이며 이제는 희망이라면 그것은 나보단... 까만 눈이 지그시 성현제를 내려다본다. 마주친 눈이 나른하게 깜빡인다. 나보단 당신이 닮았지.
‘무슨 생각 하나?’
잠에 덜 깬 눈으로 그저 속눈썹만 팔랑여도 성현제는 그랬다. 세상 어떤 미사여구도 만족스럽지 않겠지만 굳이 꼽으라면 그래, 꽃이겠지. 꼭 파란색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장미가 아니더라도 햇빛 아래 흐드러질 것만 같은 아름다움은 꽃잎을 연상케 했다. 지금처럼 온몸이 울긋불긋할 땐 더더욱. 송태원은 가만 고개를 돌린다. 아닙니다, 대답하는 목소리는 평이했다. 그렇게 믿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불현듯 그때의 대화를 떠올린 건 우연이었고, 해서 홀린듯 꽃집에 들어간 건 불행이며 손에 들린 꽃다발은 최악이었다. 송태원은 지그시 눈을 감고 꽃다발을 든 손으로 제 이마를 서너번 내려 치는 상상을 했다. 십삼만원이나 하는 빨간 장미꽃다발만 아니었으면 실제로 실행 했을지도 모른다. 이걸 대체 어쩌자고 출근 길에 사 온 거지? 송태원이 그런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를 이을 수 있게 된 건 엘레베이터에 탄 동료가 커다란 꽃다발을 흘끔이는 걸 느끼고 나서다.
“실장님, 좋은 아침...인데 웬 꽃이에요?”
냄새 너무 좋다, 며 이어진 말에 송태원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꽃다발은 송태원의 가슴을 다 가릴 정도로 크고 풍성 했다. 그는 뭔가에 찔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황급히 말을 붙였다.
“아니, 아닙니다.”
“예?”
“누구 주려고 산 거, 아닙니다.”
“아...네...”
“아무도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 나는 사람 없습니다.”
“네...그러시구나...”
눈이 마주친 직원이 어색하게 웃는다. 그는 어서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기만을 바라는 것 같았다. 그건 송태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날따라 작정이라도 했는지 엘레베이터는 고작 6층에 다르는 동안 세 번을 멈추고 아홉 명을 더 태웠다. 송태원은 같은 질문에 비슷한 표정으로 조금 다른 대답을 뱉으며 열두번은 후회 했다. 아주 조금만 더 찌르면 세성 길드장 생각한 거 아닙니다, 성현제가 꽃이랑 닮았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하고 나오겠다. 다행히 엘레베이터에서 내린 이후론 개인 집무실에서 머리를 식힐 수 있었다. 그렇다고 십삼만원이나 주고 산 꽃다발이 어디 사라지는 건 아니라 심란의 무게는 여전 했지만 끝나고 어디 가세요? 누구 만나세요? 따위의 질문에 사르르 휘어지는 노란눈을 떠올리는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그 뿐이었다.
송태원은 그것을 책상 아래에 내려놓았다. 받침대에 기대 간신히 쓰러지지 않도록 고정한 뒤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코 끝에 향기가 간질인다. 언젠가 성현제에게서도 이 비슷한 향기가 났었다. 목에 이를 박아 넣을 때면 하얀 살결에선 매번 다른 향이 났는데, 개중에서 송태원이 좋아했던 냄새다. 향수는 아니고, 은은하게 침대에서만 몇 번 풍기던 걸 보면 샴푸나 바디워시였던 것 같다. 같은 가격이면 향수를 살 걸 그랬나. 아니지. 성현제라면 뒤에 0이 두 개는 더 붙은 고가 브랜드 제품을 종류별로 가지고 있을 테다. 어차피 전해주지도 못할 꽃, 그저 집에 장식으로 두면... 미간을 문지르던 송태원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누구한테 뭘 줘? 이건 아주 우연히 들른 가게에서 충동적으로 지른 지출일 뿐이잖아. 발치에 얌전히 놓인 꽃다발을 보다가, 다시 정면을 본다. 그러나 머리에 아른거리는 하얀 시트 위의 가닥가닥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늘어진 성현제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와 어울리던 향기도, 너무 선명해서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열기도, 몽롱하게 들떠서 멍하니 몇 번 깜빡이는 눈동자도... 뿌득, 앙 다문 턱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씨근덕 오르내리는 숨을 가다듬은 송태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꽃다발을 제치고 개인 집무실을 나서는 모양새는 거의 도망치는 것 같았다.
그래봤자 멀리 갈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됐다. 송태원은 여전히 책상 바닥 한구석에서도 큰 존재감을 발하는 꽃다발을 흘겨보다가 자리에 앉고는 결국 인정 했다.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조명 하나 없는 암담한 침실 아래서도 스스로 빛나는 듯한 남자가 열에 들떠 허덕이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꼭 그런 수준까지 가지 않더라도 성현제를 수식하는 단어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달고도 늘 부족하곤 했으므로.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성현제와 꽃을 연관 시키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를 생각 하며 꽃집에 들어가 결국 꽃다발까지 들고 나와버린 것 까지 합리화 할 수는 없었지만 송태원은 그마저 인정 했다. 그래, 성현제에게 주고 싶어서 산 것이다. 왜냐면, 왜냐면... 왜냐면 그러고 싶었으니까.
성현제한테 주고 싶었으니까. 그를 보며 떠올린 것을 그에게 안겨주고 생명을 머금은 미려한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싶었으니까. 이런 걸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이고 싶으니까. 성현제가 좋으니까...
맙소사, 미쳤나봐. 쿵, 책상에 머리가 부딪히는 소리다. 박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이마에 닿는 서늘한 감촉에도 부유한 정신은 멍하기만 했다. 송태원은 늘 운이 없었다. 불행하다고 할 것 까지야 없었지만 행운이라는 건 늘 그와 너무나 동 떨어진 성질인 것만 같았다. 부상으로 유도를 관뒀을 때도 그랬고, 세상이 격변을 겪은 뒤엔 손에 꼽기가 민망할 정도로 그랬다. 이제 하다하다 성현제를 좋아하기까지 하다니 이쯤이면 불행이라고 불러도 손색 없지 싶었다. 그와 성현제의 관계를 표현 하자면, 표현 하자면... 표현할 것도 없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같은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잠을 자는 것 이상의 행위를 하지만 같이 일어나지 않는다. 은밀하고 정확하게 서로가 원하는 때에만 이뤄지는 정사는 차라리 전투에 가깝다. 얄팍한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고 그마저 오가는 횟수가 적다. 이런 관계에도 굳이 이름이 붙는다면, 글쎄, 그게 뭔들 의미가 있을까. 송태원은 집에 가는 길 어딘가에 꽃다발을 버릴 것이고,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를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종종 성현제를 떠올리게 하는 뭔가를 보면 그게 성현제 품에 안기는 상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뿐이다. 어쩌다 충동을 못 이겨 오늘 같은 일이 다시 생긴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래야 했다.
“먼저 퇴근 하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좋은 시간 보내시고요.”
“그런 거 아닙니다.”
7시면 양호한 퇴근이다. 가슴팍에 달랑 안긴 꽃다발만 아니면 퍽 기분 좋은 귀가였다. 이걸 어디다가 버린담. 차라리 누굴 줘버릴까. 오해도 풀 겸 적당한 안면을 돌아본 송태원은 서너개의 반짝반짝한 시선을 맞닥뜨리곤 고개를 돌렸다.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 주말인데요. 주말 평일 가리는 처지는 아니니까요. 예... 퇴근 직전에 나누는 대화 치곤 영 기운이 없었다. 송태원이 내딛는 발걸음도 딱 그랬다. 집에 가는 길이 천근만근이다. 오늘 막 자각한 감정의 무게만큼 몸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제 어쩌지, 이제 어쩌지.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뒤이은 생각이 따라 붙었다. 그의 불화산 같은 감정이 어쩔 줄 모르는 속도로 번져 간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성현제와의 관계가 어찌 바뀌진 않았다. 여전히 몸을 섞기도, 후에 아무 일 없었던 양 업무를 보기도 한다는 뜻이다. 송태원과 성현제 사이엔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데, 모든 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가운데 송태원만이 모난 돌처럼 비져 나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고. 앞으로의 전망은 커녕 집에 가는 길도 잘못 들어선 것 같은 그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아...”
“어...”
핸드폰을 손에 쥔 남자도 막 송태원을 발견 했는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는 것과 동시에 송태원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를 생각하며 꼭 닮았다고 나름 고심을 들인 꽃다발이 어이 없을 정도로 볼품 없어졌다. 성현제는 몇 걸음 움직이지도 않고 성큼, 손쉽게 가까워졌다. 송태원은 꿀꺽 침을 삼키며 그 소리가 성현제의 귀에 들어가진 않았을지 걱정 했다. 망했다. 벌써부터 평범한 대화를 이어가긴 글렀다는 경고가 떴다.
“근처를 지날 일이 있어서, 퇴근 전이라면 얼굴이나 볼까 했는데.”
“저를...굳이, 세성 길드장님이 말입니까.”
“그래, 좀... 별로긴 하지.”
품에서 뭔가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성현제의 시선이 잠시 가슴팍에 머물다 떨어지는 걸 보고 나서야 송태원은 그것이 십삼만 사천원짜리 꽃다발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내가 날을 잘못 잡은 모양이야. 선약이 있나보지?”
“...아닙니다.”
“말 하기 싫다...”
“아닙니다.”
“누군지 알려달라는 것도 아닌데,”
성현제가 다시 한 번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이번엔 틀림 없이 송태원의 숨 삼키는 소리까지 모조리 들었을 거리였다. 귓가에 성현제가 나직이 뱉는 음성이 골을 때리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면 코가 닿을 거리에 성현제의 입술이, 숨결이, 팔랑이는 속눈썹이 있다.
“그냥 궁금해서.”
“...”
“이런 사람이 있는데...나랑 그래도 되는 건가?”
부스럭, 송태원의 품에서 형편없이 일그러진 꽃다발이 다시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이번엔 그보다 좀 더 희고 가느다란 손에 의해서다. 장미를 한웅큼 쥔 손이 매끄럽게 떨어진다. 손 안에서 바스러지며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흩어지는 꽃잎이 뭐라고 표현하기 어렵게 아름다웠다. 송태원은 그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만 성현제의 얼굴은 송태원을 고려하는 법이 없었다.
“애써 준비한 걸 내가 망쳤네. 비용은 내 앞으로 청구하게. 그리고... 이 쯤 하지.”
뭘? 성현제는 부지불식간에 가까워졌던 것 처럼 멀어질 때도 그러했다. 코 앞에서 반짝이던 호박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성현제가 제게서 완전히 몸을 돌리고 나서야 송태원은 성현제가 뱉은 말을 이해했다. 이 쯤하지, 그러니까...섹스를.
“세, 성 길드장님...”
그건 말을 했다기보다 숨 소리에 섞였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미미했다. 그러나 성현제의 예민한 청력엔 충분히 닿고노 남았다. 망설임 없이 내딛던 발걸음이 부드럽게 멈춘다.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할 말이 있으면 그 상태로 하라는 듯이.
“뭔가, 오해...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현제가 반쯤 돌아섰다. 송태원은 꽃다발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가 사 온 장미는 새빨간 색이었는데, 귀 끝에 열이 오른 걸로 보아 얼굴 역시 같은 색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건...꽃은...당신 주려고...”
하아... 내가 무슨 말을 하는거지? 그러나 성현제가 이름도 없는 얄팍한 관계마저 없는 것으로 돌리고 그렇게 가버리는 것 만큼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송태원은 한손으로 꽃다발을 들고 남은 손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 주려고...산 겁니다. 하나에 삼 만원이 넘고... 십삼만 삼천...사천원 입니다... 개인적으로 호감 있는 상대한테 주는 선물이니 청탁은...아니지요...”
망했다. 망했다고! 송태원은 파묻힌 손바닥 사이로 성현제의 구두 끝이 완전히 돌아간 것을 보았다. 송태원이 서있는 방향이었다.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확실하진 않았다. 허리가 붙들리고, 꽃다발을 든 손이 무방비하게 내려가며 입술이 겹쳐진 순간부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으므로.

